1896년 당시 법부에서 백범에게 교수형을 건의하였다는 것이 신문에 나온다. 그러나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넉 자를 이상하게 여기고 이미 재가가 끝난 안건을 다시 꺼내 임금에게 보여 집행을 보류하였다.(또는 '법부는 고종의 재가를 명분으로 판결을 지연시켰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형 집행이 되지 않은 청년 백범은 1898년 3월 20일 새벽에 인천감리서를 죄수들과 함께 탈옥한다. 이 일로 부모님 모두 대신 감옥에 갇혔다. 어머니는 곧 석방되었으나 아버지는 백범 대신 1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밤새도록 바닷가 모래사장을 헤맨 백범은 큰 길을 피해서 시골 마을 길만 골라 걸어 부평, 시흥을 지나 양화진에서 서울로 건너온다. 감옥 동기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의관을 갖추니 백범은 눈물이 저절로 떨어졌다. 그들이 노잣돈을 한 짐 지워주어 백범은 동작 나루를 건너서 삼남지방으로 향했다.
동작 나루는 조선 시대 서울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거쳐 호남으로 내려가든가, 또 서울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지였고 현재 동작역이 있는 이수천 입구로 추정된다.
마음이 울적한 백범은 밤낮으로 계속 술을 마시며 과천과 수원을 지나 오산에 도착하니 노자가 다 떨어졌다. 감옥에서 알게 된 사람을 찾아가 그 형제들과 며칠을 보냈다.
제 자리에서 이동·방치된 표지석
지난 14일 옛날 인천감리서가 있었던 인천시 중구 내동 83번지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동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오래 전 부터 있었던 인천감리서 표지석은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없어졌고, 지금의 자리에 다시 제작해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세운 표지석은 폐자재에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뜻을 함께하는 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간단한 출정식을 하고, 복잡한 인천 시내를 뚫고 부천 중앙공원으로 향했다. 부천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을 만나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부천에서 바로 양화대교로 가는 도로를 타지 않고, 한강 둔치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타려고 행주대교로 올라갔다. 한강으로 빠지는 길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넓은 국도를 빨리 달리는 많은 차량 때문에 잔뜩 긴장했다.
한참을 가니 한강변의 아파트가 보여 혹시나 하고 들어갔더니 다행히 한강으로 빠지는 길이 있었다. 잘 꾸며진 한강 둔치의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많은 인파가 양쪽에서 오고 갔다.
양화진 나루터가 있었던 현재의 절두산 성당으로 가기 위해 양화대교까지 달렸다. 양화대교 밑으로 가니 다리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자전거를 들고 올라섰다. 백범 선생이 건넜던 양화진 나루터는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장소가 됐다.
마침 절두산으로 야외 수업 나온 남녀 중학생들이 있어 기행의 목적을 설명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학생이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절두산 성당 아래 한강 둔치에 잘 놓여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를 타고 동작대교로 향하던 중 폭우를 만나 거북선 나루터 앞에서 잠시 피신을 해야 했다. 동작대교로 갔으나 올라가는 길 역시 계단으로 돼 있었다. 한강을 건너니 더 이상 자전거로 가기는 힘들었다. 동작역으로 들어가 반포아파트 둔치를 따라가니 사당으로 향하는 큰길을 만날 수 있었다.
또 한 번 빠른 속도를 내는 차들과 도로를 공유하며 머리끝이 바짝 솟는 긴장감을 느꼈다. 남태령을 올랐다. 오늘 만난 고개 중 가장 높은 고개였다. 과천과 안양을 지나 의왕에서 1번 국도를 탔다. 수원 입구의 지지대 고개의 쉼터에 들어서니, 민족문제연구소 경기 남부지부 회원들이 마중하며 물과 수박을 내놓아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오늘의 종착지인 오산시청에 도착하니 5시였고, 전체 달린 거리는 98km였다. 백범 선생에게 감옥 동기들이 노잣돈을 주었듯이 환영 나온 몇 사람이 나에게 노잣돈을 주었다. 백범 선생은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받은 노잣돈을 다 쓰며 오산에 도착하였는데,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노잣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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