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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역사 탐방
희망제작소 호프메이커스 클럽 회원들과 함께 중국 실크로드 역사탐방을 다녀왔습니다. 특히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는 약 160만㎢의 면적으로 중국 전체의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중국 최대의 분지, 최고의 고원, 대사막, 대초원, 대고비, 대삼림은 웅대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서방의 황금과 중국의 비단을 바꾸고 불교와 이슬람문화를 전한 동서문물 교류의 접합점입니다. 신장의 실크로드는 사막과 낙타로만 여겨지던 과거 버려진 길이 아닌 천태만상의 자연환경과 다채로운 민속, 유전과 가스로 이어지는 막대한 지하자원을 가진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곳입니다. 우루무치에서 카스까지의 7월 25일부터 8월 2일까지 7박 9일간의 여행을 연재 중 입니다. <기자주>

 키질 석굴 모습
키질 석굴 모습 ⓒ 오문수

둔황석굴, 룽먼석굴, 윈강석굴과 함께 4대 석굴의 하나인 키질 석굴은 바이청 현 커쯔얼 향에서 동남쪽으로 약 7㎞, 쿠차현에서 약 6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키질 석굴은 4대 석굴 중에서도 조영이 가장 오래되고 내용물에 교류적 요소가 많다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1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벽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는 둔황 석굴의 그것과 견줄 만하다고 한다. 키질 석굴이 한국인에게 더 뜻깊게 다가온 것은 작품의 진가를 한국인이 바르게 밝혀냈기 때문이다.

 한락연의 자화상. 키질의 10호굴 한쪽에 놓여있다. 1935년 작품
한락연의 자화상. 키질의 10호굴 한쪽에 놓여있다. 1935년 작품 ⓒ 오문수
실크로드 연구에 20년을 바친 국립중앙박물관 민병훈 박사와 석굴 책임자가 친구이기 때문에 일행은 다른 탐방객들이 볼 수 없는 동쪽 석굴을 볼 수 있었다. 일행 대부분은 석굴 벽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이게 저것 같고 저게 이것 같다. 가이드나 민박사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서야 수긍이 간다.

신장지구를 여행하며 본 석굴벽화의 대부분은 훼손되거나 약탈당했다. 여기도 러시아나 독일, 일본 등지에서 온 도굴꾼들에 의해 뜯기고 할퀸 자리가 선명하다. 전문가가 아무리 설명하고 들여다봐도 비전문가들에게는 모두가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일행의 발길을 오래 끈 석굴이 있었으니 10호굴이다.

원래 이굴은 선방으로 벽화가 없다. 약 2.5미터 높이의 주실은 방형이고 창문과 벽난로 자리가 있다. 길이 3.35m, 폭 1.95m의 커다란 글씨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세로로 새겨져 있다.

주실 한가운데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나무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그 글씨와 사진의 주인공은 조선족 출신의 화가 한락연이다.

"본인은 독일의 르콕이 쓴 신장문화보고기와 영국의 스타인이 지은 서역고고기를 읽고 나서 신장이 고대 예술품을 대단히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는 곧 신장에 올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5일 단신으로 이곳에 와 벽화를 보니 실로 아름다운 옥이 눈앞에 가득한 것처럼 훌륭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모두가 우리나라 여타 동굴들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러한 고상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쉽게도 벽면은 외국 고고대(탐험대)에 의해 벗겨졌는데, 이것이야말로 문화사에서 일대 손실이다. 본인은 이곳에서 유화 몇 폭을 모사하려고 14일간이나 머물면서 준비를 충실히 하는 데 진력하였다.

이듬해 4월 19일 조우보우치, 천톈, 판꾸어챵, 쑨비둥을 데리고 두 번째로 이곳에 왔다. 우선 번호를 매겼는데, 정부번호를 매긴 동은 모두 75좌다. 그러고 나서 개별적으로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을 진행하여 6월 19일에 잠정적으로 한 단락을 지었다. 고대 문화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참관하는 제위께서는 이곳을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관해 주시기를 삼가 바라는 바이다."

윗글을 보면 화가의 각별한 애정과 역사문화의식, 도굴꾼들에 대한 분개를 읽을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한 당시 머나먼 사막의 한구석까지 찾아와 석굴벽화의 가치를 설명하고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한락연! 그는 누구인가.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한락연'

그의 본명은 한광우(1898~1947)이고 어릴 적 이름은 한윤화다. 조선족이 많이 살던 연변의 용정에서 태어났다. 용정은 '선구자'들이 조국 해방의 꿈을 꾸던 곳. 일찍 아버지를 여읜 윤화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전화국과 세무서에서 말단 사환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3·1운동의 여파로 '룽징 3·13' 반일 시위가 일어나자 세무서 안에서 몰래 태극기를 시위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시위에 앞장선다.

이를 계기로 세상에 눈을 뜬 광우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갔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1920년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주경야독한다.

1924년 1월 15일 자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2수재'라는 제하의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 한광우가 4년 간 줄곧 우등 성적으로 중국 최고의 미술학교를 졸업했다고 썼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 선양에 가서 기독교청년회의 도움으로 첫 유화 전시회를 열고 사립미술전문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취임한다. 후에 보육중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던 그는 항일구국의 투지에 불타는 열혈청년이 되었다.  

보다 더 큰 꿈을 꾸던 그는 1929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 기간에 식당 잡부로, 신문사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파리의 국립루브루예술학원에 입학해 천부적 실력을 다듬기 시작했다. 유학기간에 피카소란 명성을 얻기도 했던 그는 국제적인 반파시즘 운동에도 가담했다.

1937년 8년 간의 유럽 생활을 마치고 중국에 돌아와서는 우한과 충칭, 시안 등지를 돌며 작품 활동을 하고 항일구국투쟁에 헌신한다. 그러던 중 1940년 시안에서 국민당 군에 체포돼 3년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락연이 모사한 키질석굴의 비구승 벽화
한락연이 모사한 키질석굴의 비구승 벽화 ⓒ 오문수
출옥 후 란저우로 자리를 옮겨 평생소원이던 석굴 벽화의 복원 작업에 착수한다. 둔황 천불동에 두 번이나 가서 '뇌신' 같은 모사 작품을 남겼으며 <키질 벽화와 둔황 벽화의 관계>라는 학술논문까지 발표했다.

키질로 가는 투루판에 들러서는 고창성과 아스타나 등 유적지에서 미라를 비롯한 여러 점의 유물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7년 7월 30일 국민당 257호 군용기를  타고 우루무치를 이륙해 란저우로 향하던 중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그는 나라를 잃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같이하면서도 <일본의 조선침략사>같은 한글 서적을 지니고 다니며 고국에 대한 사랑과 망국의 한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중국 출신의 민족주의자로 평가해 2005년 8월 국가보훈처에서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독립운동가 포상이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관광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는 조선족 출신이다. "연변 조선족들은 남북이 빨리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며 안타까워한다. 선각자로 독립운동가로 역사문물지킴이로 먼저 간 한락연 선생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네통'에도 송고합니다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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