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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 지도를 하다보면 '외교관'의 꿈을 가진 아이들이 많습니다. 지난해부터는 그런 아이들에게 다소 다른 방향으로 지도를 해왔습니다. 외무고시가 점진적으로 폐지되고 외교 아카데미가 설립되며, 특채 형식의 선발이 늘어난다는 외교부 발표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 외시 안 보면 외교관 어떻게 되나요?"

선배들의 '외무고시 00회 합격' 등 플래카드에 익숙한지라 아이들은 그와 같은 설명에 놀라는 듯했습니다. 몇 해 전 검사며 변호사가 꿈이라던 아이들이 로스쿨 설립 발표에 당황했듯, 이 아이들도 "외무고시 안 보면 앞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해요?"라고 물어댔습니다. 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시대 변화에 맞게 앞으로는 고시라는 방법으로 법조인이나 외교관을 선발하지 않을 거야. 신림동에 틀어박혀 세상과 단절된 채 법전이나 수험서만 파는 인재는 이 시대에 걸맞지 않거든. 그래서 로스쿨이나 외교 아카데미를 통해 여러 전공을 거친 학생들을 그 전공별 법조인, 외교관으로 양성하자는 것이 정부의 취지이지. 또, 3년 전부터 외교부 공무원 특채 전형을 만든 것이나 행시를 대체할 공무원 특채를 활성화하는 것도 모두 같은 취지야."

특히 저는 외교관 선발 방식 중 특채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통상, 재외국민 치안, 법률, 언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는 한편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그저 외국어 능력만 우수한 사람보다 더 능력 있는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특채 방식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거야. 선생님은 너희가 그 특채를 활용하는 것도 아주 좋을 것 같아.

법조, 의료, 언론, 통상 등등에서 일단 전문가가 되고 사회에서 전문적인 실무 경험을 먼저 쌓은 뒤 꾸준히 연마한 외국어 능력으로 외교부에 특채된다면 그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거든. 또는 치안, 교육과 같은 공무원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뒤 공무원 조직 간 교류를 위해 특채하는 길을 따라도 좋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제가 아는 선에서 외무부 특채의 루트는 둘입니다. 하나는 법조인, 회계사, 박사학위 소지자 등 전문직을 특채하는 길이고, 둘은 타 부처 공무원을 특채하는 길입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일단은 전문성을 중시하는 측면이 있지만, 후자의 경우 공직 사회의 순환이 또 다른 중요 이유가 됩니다.

아이들에게 외교관 특채 권하던 전, 어쩌나요?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 권우성
제 설명에 아이들의 눈은 반짝거렸습니다. 운동복 바람으로 고시원에 틀어박혀 있는 삼촌이나 이모의 모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세상에는 다양한 길이 있으니 전문성과 외국어 능력을 꾸준히 키워간다면 언제고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란 생각. 이 생각들로 아이들은 분명 설렜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채 파동은 한순간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생님이 틀렸네. 미안하다. 자, 다시 설명해줄게. 아빠가 외교관이거나 장관, 하다못해 시의원인 사람 어디 한번 손들어보자. 어, 그래. 너희는 전문직이나 박사학위, 공무원 이런 거 준비할 필요도 없어. 그냥 가만히 있다가 외교부에서 계약직 공무원 그거 뽑거든 그때 원서내고 들어가.

계약 기간인 2년 뒤엔 어떻게 되냐고? 걱정 마. 선생님이 두 가지 루트 설명했지? 계약직 공무원도 공무원이니 너희는 공무원 특채 루트로 정규직 외교관이 될 수 있어. 어머, 이를 어째. 손 안 든 애들이 있었구나. 니들은…. 음. 포기해. 니들 땐 어차피 외무고시도 없어. 뭐, 외교 아카데미? 얘들아, 특채 선발이 이런 식인데 아카데미 입학이 공정할 거라고 정말 믿는 건 아니지?"

저, 이렇게 가르쳐야 하는 걸까요? 특히 외교부 공무원 특채의 본래 목적은, 넓은 의미의 공직(공기업 포함한 모든 부처의 공무원들이 대상)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얻은 전문성과 함께 우수한 외국어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경우 특별 채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에는 직업공무원제가 명시돼 있고 원칙상 공무원은 엄정한 공개 시험으로 채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소 간단한 면접 등의 절차로 외교부 특채를 하는 것은 그 대상들이 이미 엄정한 시험을 거친 공무원이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이 같은 특채 제도가 사실상 '음서 제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제도가 생겨난 첫 해에는 다양한 부처의 외국어 능통자들이 합격한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 2~3년 동안 합격하는 이들은 모조리--예외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계약직 공무원들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진로 지도를 위해 외교부에 계신 이들에게 알아본 결과, '우리가 들어갈 땐 계약직 공무원이 없어서 합격이 된 거지, 이 제도 자체가 전문직이 아닌 자녀들을 외교관으로 채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타부서 공무원 특채 제도'의 진짜 목적은 타부서 공무원이 아니라 그분들 자녀를 뽑기 위한 거란 말이지'란 엄청난 답변을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하며 믿지 못하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유명환 외교부장관 사태는 정말이지 저를 힘빠지게 만듭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저는, 대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배경 없고 돈 없는 아이들도 실력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오길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별채용 파문을 계기로 고위 공직자 자녀의 채용 특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주최로 기자회견을 갖고 양성윤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특별채용인사 비리에 대한 전면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별채용 파문을 계기로 고위 공직자 자녀의 채용 특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7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주최로 기자회견을 갖고 양성윤 전국공무원노조 위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이명박 정부의 특별채용인사 비리에 대한 전면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저는 외교부 관계자 분들에게 요청하는 바입니다. '공무원 특채'의 진정한 취지를 왜곡하지 말아 달라고. 자신들의 자녀, 지인들의 자녀를 계약직 공무원으로 합격시켜 일단 '공무원'이란 이름을 달게 한 뒤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이런 방법은 '공무원 특채'의 진정한 취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타 부서 공무원들은 죄다 떨어지고 별다른 경력 없는 나이 어린 계약직 공무원들이 온갖 의혹 속에서 외교관의 직위를 얻게 되는 겁니까?

제발 배경 없고 돈 없는, 하지만 너무나 우수한 우리 아이들이 실력만으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 지난 국사 수업 시간 고려시대 문벌귀족이 부패한 증거로 강조했던 '음서제도'가 21세기에 부활했음을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도록 좀 해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 '외교부 공무원 특채'가 음서제도로 변질된 것만이 문제일까요? 저는 이제 로스쿨도 외교 아카데미도 행정부 공무원 특채도 또... 입학사정관 제도도, 각종 경시대회도... 모두 믿지 못하겠네요. 교사인 제가 이런데, 아이들은 어떨까요.



#유명환#외교부#공무원 특채#음서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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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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