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제2일 2009년 10월 27일]

먹빛 북녘 산하

한러 국경지대 포셋트만에서 바라본 한러 국경지대
한러 국경지대포셋트만에서 바라본 한러 국경지대 ⓒ 박도

01:00, 배의 롤링(흔들림)이 몹시 심해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막 1시를 넘고 있었다. 그새 두어 시간 눈을 붙인 셈이다. 화장실을 다녀 온 뒤 스낵코너로 가자 두 그룹의 승객들이 깊은 밤을 잊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포커판이요, 다른 한쪽에서는 마작에 빠져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몇 승객들은 배의 롤링에 맞춰 흔들리면서 텔레비전 시청에 넋이 빠졌다.

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가자 바다는 온통 검은 너울이 넘실거린 게 무서웠다. 하늘에는 상현달이 구름 속에 잠겨 뿌옇게 비췄다. 왼편 북녘 산하는 먹빛이었다. 두꺼운 파카를 입었지만 밤바다 바람이 차고 강했다. 다시 객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배의 롤링에 메스꺼워졌다.

마침 가방에 아내가 챙겨준 사탕이 있기에 그걸 꺼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메스꺼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이번 답사 길은 아내가 유독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일러도 끝내 듣지 않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가능한 안중근 의사가 이용했던 교통기관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었다.

2008년 3월 하순, 호남의병전적지 답사가 마무리 될 즈음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승용차에다 안중근 관련 자료를 한 상자 싣고서 그 무렵 내가 살고 있던 강원 산골 안흥 말무더미 마을로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2009년 10월 26일이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 되니 그때를 맞춰 출간할 수 있도록 안중근 평전을 부탁했다. 나는 얼떨결에 분수도 모른 채 승낙했다. 그 뒤 자료들을 두루 살피면서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평전을 쓰기에는 부담이 갔다.

마지막 여행

1909년 10월 하순, 늙은 여우 이토 히로부미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드넓은 만주조차도 삼키고 싶은 야욕으로 일본을 떠나 다롄과 뤼순을 거쳐 장춘에서 하얼빈 행 열차를 타고 거침없이 달렸다. 또 다른 하얼빈 행 열차에는 조국을 위해,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어이 당신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권총을 가슴에 품은 안중근을 태운 채 달렸다.

두 열차는 서로 피할 수 없는 단선이었다. 이 두 열차는 끝내 하얼빈에서 일대 충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네 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당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런 우리 근대사의 큰 흐름을 강원도 산골에 앉아 자료만 뒤척이며 안중근 의사를 그린다는 것이 불경스럽기도 하거니와 이미 출판된 책의 아류작이 될 것 같아 역사 현장을 답사해서 쓰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현실로 갈 수 없는 북한지역은 그만 두고라도 연해주 일대와 다롄, 뤼순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아닌가.

특히 연해주는 러시아 땅으로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요, 아는 이도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답사 비용도 만만치 않을 듯했다. 곰곰 생각하다가 4년 전 중국 동북일대 항일유적지답사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한 방송국에 동행 제작 의사를 타진하자 즉각 좋은 기획이라고 흔쾌히 수락하여 제작진과 만나 세부 계획을 세웠다.

마침 내 계획을 알고 있던 의병선양회 조세현 부회장이 안중근의사기념관 김호일 관장을 연결시켜줘서 곧장 찾아뵙고는 유적지 답사여정에 협조 말씀 드렸다. 김 관장은 당신이 아는 바로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답사하여 쓴 책은 여태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매우 좋은 기획이라기에, 그 참에 길안내를 간청하자 어렵게 동행을 허락해 주었다. 방송국 측에서는 나에게 대본까지 부탁해 그걸 쓰면서 출국을 기다리던 차, 갑자기 방송국 측의 사정으로 계획이 무산돼 망연자실했다.

그런 나에게 김 관장은 마침 '2009 청년 안중근 유적답사 대학생해외탐방단'에 동행하자고 권유하기에 거기에 참여키로 하고, 2009년 7월 12일 출국을 기다리는데 일주일 전 갑자기 심장에 바늘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안흥마을에서 가까운 횡성의 한 병원에 갔더니 큰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아무래도 대학생 해외탐방단 동참은 일행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아 최종 확인 단계에서 불참을 통보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하고 통원 치료하였더니 다행히 심장의 통증은 멎었다. 하지만 이미 탐방단은 출국한 뒤라 단념하고는 다른 작품에 매달렸다.

9월 하순 그 작품이 끝나자 안중근 의사 자취를 쫓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2009년 10월 26일이 의거 꼭 100주년 기념일이기에 10월 중순 쯤 출국하여 100년 전 그날 그 시각을 하얼빈 역에서 맞고 싶었다. 김호일 관장을 다시 만나 연해주 일대의 아는 분과 연해주 방면 전문 여행사를 소개받아 국제전화와 메일로 안내인과 일정을 조정하고 중국 러시아 비자를 받는데 열흘 이상 걸려 도저히 의거일 그 날짜에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출발 일을 의거일인 10월 26일로 정하고 속초에서 자루비노 행 동춘호에 승선한 것이다.

원래 하나였던 조국

03:00, 다시 잠이 깼다. 객실이 추운 탓으로 새우잠을 자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운동 겸해 선내를 돌다가 갑판으로 나갔다. 여전히 동해바다는 검은 너울이 출렁거렸고 하늘에는 옅은 구름으로 뿌연 상현달이 배를 따르고 있었다. 북녘 산하를 바라보니 까마득히 불빛이 가물거렸다. 거리나 시간상으로 보아 단천이나 성진(김책) 항 앞 바다를 항해하는 듯했지만 항로 이동 지도도 없을 뿐더러 깊은 밤이기에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배는 큰 너울의 검은 파도를 헤치며 북한 공해를 지나 마냥 북쪽으로 스멀스멀 헤쳐 갔다.

한 원로시인(고은)의 절규처럼 "일백년 전 하나였던… 일백년 후 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 그 언젠가는 다시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합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는 오늘을 조국분단시대로 나눌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글쟁이의 역사관은 어느 것이 옳을까.

평양산원에서 만난 산모  한 산모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다.
평양산원에서 만난 산모 한 산모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다. ⓒ 박도
2005년 평양 남북작가대회에서 만난 나의 안내원은 솔직히 북녘 땅은 '고난의 행군' 중으로 몹시 어렵다고 했다.

내가 둘러본 평양 산원에서 만난 산모도 아이도 양양이 부실해 보였고, 청천강 강마을 어느 농촌에서 살펴본 그곳 주민의 삶도 매우 힘들어 보였다.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든 한 인사는 나에게 말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쌀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갔습니다. 그 대신 북쪽에서 풍부한 전기, 명태, 가자미, 광물들은 남쪽으로 내려왔고요.

이것은 풍부한 쪽이 적은 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자연스런 물자교류였습니다. 이런 물자교류가 분단으로 끊어진 거지요.

다행히 요즘 남쪽에서 쌀이 남아돈다고 하니까 아무 소리 말고 슬그머니 북녘으로 식량이 흘러가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잘사는 형이 가난한 아우 좀 돌봐주면 안 됩니까? 쌀 몇 됫박 주면서 돕는다고 요란을 떠는 것은 형제답지 않지요. 상대의 자존심까지 구기는 동정은 올바른 형제애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남북 화해무드로 얻은 사회적, 경제적 이득은 남쪽이 북쪽에 지원해준 물자의 수십 배 이상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벽 바다 이슬을 함초롬히 맞은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바다 건너 먼 조국을 바라보다가 다시 객실로 돌아왔다. 어제 일정도 빡빡했지만 오늘 일정도 벅찰 것이다. 파카를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억지로 눈을 붙였다.

06:00 아침 식사를 안내하는 선내방송에 잠이 깼다. 밖은 여태 어둑새벽으로 동녘은 여명으로 밝아왔다. 답사여행에서는 잘 먹고 잘 자는 게 건강 유지 비결이다. 구내식당에 가자 아침 메뉴는 된장국이다. 맛이 좀 그랬지만 야무지게 먹어두었다. 점심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는가. 아침밥을 먹고 난 뒤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장으로 갔다. 뜨거운 물로 몸을 닦자 피로가 가신 듯하다. 객실로 돌아오자 졸음이 왔다. 이보다 반갑고 고마울 수가.

 한러 국경지대의 섬
한러 국경지대의 섬 ⓒ 박도

안중근 행장(4)

그때(1907년 가을) 나는 바삐 행장을 차려가지고 북간도로 가니 그곳에도 또한 일본 병정들이 막 와서 주둔하고 있어서, 도무지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서너 달 동안 각 지방을 시찰한 다음, 다시 그곳을 떠나,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 연추(烟秋)란 곳을 지나,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니, 그 항구 안에는 한인 4,5천 명이나 살고 있었고, 학교도 두어 군데 있으며 청년회도 있었다.
- <안응칠 역사> 115쪽

러시아 영토인 연추 일대의 벌판 지난날 우리나라 의병부대의 활동무대였다.
러시아 영토인 연추 일대의 벌판지난날 우리나라 의병부대의 활동무대였다. ⓒ 박도

안중근은 연해주 일대에 머물면서 의병조직에 참여하여 이범윤(李範允), 김두성(金斗星)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대한국 의군(義軍)을 창설하여 안중근은 참모중장(參謀中將)에 선임되어 독립특파대장의 임무를 띠고 치열한 항일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때 김두성과 이범윤 등이 모두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 사람들은 전일에는 이미 총독과 대장으로 피임된 이들이요, 나는 참모중장 직책으로 피선되어 의병과 군기 등을 비밀히 수송하여 두만강 근처에서 모인 다음 큰일을 모의하였다. 그때 나는 (의병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우리 병력은 2, 3백 명밖에 안 된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적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아무리 백번 급한 일이 있다하여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다음에 큰일을 꾀해야 한다'고 했다.

이제 우리들이 한 번 거사로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 번에 이루지 못하면 두 번, 두 번에 이루지 못하면 세 번, 그렇게 네 번, 열 번에 이르고, 일백 번을 꺾어도 굴함이 없이, 올해에 못 이루면 내년에 도모하고, 후년, 내후년, 그렇게 십년, 백년까지 가도 좋다.

만일 우리 대에 목적을 못 이루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두 준비하기만 하면 반드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안응칠 역사> 130~132쪽


#안중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