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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녘 따라 삶과 노동을 만나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들녘 따라 삶과 노동을 만나는 지리산 둘레길에서.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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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 따라 삶과 노동을 만나고, 고개 넘어 마을과 마을을 만나고, 옛길 따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지리산 둘레길. 모든 생명체들과의 아름다운 공존과 느림이 주는 행복을 꿈꾸는 자라면 아마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은 길이리라.

지난 19일, 나는 경남사계절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올 6월에 이어 두 번째로 지리산 둘레길을 걷게 되었다. 아침 7시 10분에 마산서 출발한 우리 일행이 중군마을(전북 남원시 인월면 중군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20분께. 모두들 소풍 나온 기분으로, 또는 생명 평화를 전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3구간 길을 나섰다.

전라북도 남원시와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하동, 산청, 함양군의 80여 개 마을을 하나의 길로 잇게 되는 지리산 둘레길은 총 길이가 300여km에 달한다 한다. 현재 걸을 수 있는 길은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에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까지 이어지는 71km 거리로 다섯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지리산길 3구간은 19.3km 거리로 현재 걸을 수 있는 지리산길 다섯 구간 가운데 가장 길고 숲길, 농로, 제방길, 임도, 차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디 전라남도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서 시작되는데 우리는 중군마을에서 출발했다. 중군이란 이름은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중군(中軍)이 주둔하면서 붙여졌다.

 중군마을 
 중군마을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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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작물은 손대지 말고 눈으로만 바라봐 주세요." 고사리밭을 지나면서.
 "농작물은 손대지 말고 눈으로만 바라봐 주세요." 고사리밭을 지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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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로이 쉬고 있는 잠자리와 눈인사도 나누고..
 한가로이 쉬고 있는 잠자리와 눈인사도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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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본업인 농사 외에 잣과 송이도 채취한다. 옛날에는 하지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중군마을의 기우제 풍습이 이색적이다. 여인들의 한 맺힌 통곡 소리가 비를 몰고 온다고 믿었을까, 기우제를 올릴 때 아낙네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로 가서 통곡을 했다는 거다.

숲길로 들어서자 살 것 같았다. 땡볕에 콘크리트 길을 한참 걸었더니 힘들었다. 수성대 계곡에 있는 작은 쉼터에 앉아 막걸리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사람들도 보였다. 둘레길 3구간에는 점심 도시락을 싸지 않고 홀가분하게 와도 될 만큼 장사 목적으로 운영하는 쉼터가 군데군데 있었다. 더욱이 이날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쉼터마다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산골 마을에 경제적으로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일인데, 자칫 둘레길의 본뜻이 퇴색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어쨌든 정상으로 오르는 산행 때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한가로이 노니는 잠자리, 나비와 눈인사를 나누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손짓에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성큼 다가갈 수 있다는 게 둘레길의 매력일 것이다.

 등구재로 가는 길에서. 멀리서 다랭이논을 바라보면 참 예쁘다.
 등구재로 가는 길에서. 멀리서 다랭이논을 바라보면 참 예쁘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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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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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밭이 참 많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지리산 둘레길은 정말이지, 자연의 배움터이기도 했다. 메밀, 토란, 수수, 호두나무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 고사리밭 주인이 밭에 들어가지 말아 달라고 적어 놓은 글을 보고 내가 괜스레 부끄러웠다.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농작물에 손을 대어 애써 지어 놓은 한 해 농사를 망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장항마을 당산 소나무 앞에 이르렀다. 아름다운 자태에 위엄마저 서려 있는 나무이다. 몹시 신성하게 여겨져 지금도 여기에서 해마다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우리는 내리쬐는 햇볕에 사과들이 빨갛게 익어 가는 가을 길 따라, 이따금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바람이 머물다 가는 숲길 따라 계속 걸었다.

구름은 비를 쏟았다
날짜들이 흘러가고
사과나무는 여기저기 사과를 쏟고
마른 나뭇잎 속에서 늙은 거미는
연약하게 댕댕거린다

햇빛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매달아놓은 추처럼.

- 황인숙의 '다시 가을'

중황마을(전북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에서 적당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은 뒤 등구재를 향했다. 황금빛 들녘이 바로 이런 것일까, 풍요로운 가을이 우리들 눈앞에 기다랗게 누워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계단식 논인 다랭이논이 나왔다. 다랭이논은 층층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참으로 예쁘다.

 등구재로 가는 길에서. 
 등구재로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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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창원마을의 다랑논. 볏단을 묶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지리산 창원마을의 다랑논. 볏단을 묶어 놓은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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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마을에서.  햇볕에 도라지를 말리는 풍경이 정겹다.
 창원마을에서. 햇볕에 도라지를 말리는 풍경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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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행과 같이 등구령쉼터에서 잠시 쉬었다. 거기서 구절초식혜를 처음 맛보았는데 맛이 썼다. 그러나 단맛이 없어 오히려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오후 2시께 등구재에 도착했다. 거북등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북 상황마을과 경남 창원마을의 경계가 되는 고갯길로 옛날에 인월장을 보러 가던 길이다.

창원마을(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은 한때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는지 세워 둔 이정표에는 마을을 우회해서 가는 길로 방향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른쪽 방향으로 해서 바로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우리 일행은 오른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창원마을에서도 다랑논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도라지와 토란을 말리던 풍경이 정겨워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지리산 금계마을에서 내게 먼저 다가온 고양이.
 지리산 금계마을에서 내게 먼저 다가온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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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3구간이 끝나는 금계마을(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에서 생각지도 않게 고양이와 마주쳤다. 손가락으로 목 부분을 살살 어루만져도 겁내지 않고 도리어 기분 좋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여튼 야생고양이는 아닌 것 같다.

내게 바싹 다가오길래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고 배낭에서 밀감을 꺼내 주었는데 좋아하지 않고 시큰둥했다.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다른 먹을거리를 줘도 통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었다.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더 지체할 수가 없어 고양이와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지리산 둘레길은 마을과 사람을 잇는 길이다. 그냥 걷고 싶어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찾아가기에 안성맞춤인 길이다. 혼자 떠난다 해도 외롭지 않은 여행길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이 길 위 모든 생명체들과의 평화로운 공존과 느림의 행복을 몸으로 느끼고 싶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모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 또한 가질 수도 있으리라.


#지리산둘레길#느림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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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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