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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단임제의 한계도 있고 4년 중임제일지라도 주어진 시간 안에 대통령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백마를 타고 오는 엄청난 초인이 경제를 바꿔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정당이 연립해서 정부를 구성해야 체질적인 경제 개혁이 가능해집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 만능주의가 무너진 후 한국 경제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유럽 국가들을 답으로 꼽았다. 지난 16일 열린 '2010 시민경제강좌'에서 최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철지난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매달리면서 우리 사회가 사회 통합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며 "향후 한국 경제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북유럽 국가들이나 독일, 일본이 취하고 있는 '조정시장경제'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경제의 다양한 모델'을 주제로 서울 한국NPO공동회의 교육장에서 열린 이날 강의에서 최 교수는 영국, 미국, 호주 유형인 '자유시장경제'와 조정시장경제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한국에 맞는 조정시장경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최 교수는 "재벌로 상징되는 한국 경제를 개혁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제도 개혁"이라며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해야 경제 체질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자유시장경제를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는 크게 자유시장경제와 조정시장경제의 두 부류로 나뉜다. 조정시장경제는 노사관계나 고용체계 등의 작동에 국가나 사회의 조정이나 큰 정부의 개입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자유시장경제는 모든 생산 관련 제도의 작동이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이뤄지는 것을 의미한다.

 

최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과거의 한국은 국가가 나서서 경제 개발의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 주도형 조정시장경제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후 세계화 추세에 따라 규제완화, 시장개방, 민영화, 금융 자율화, 작은 정부 등 자유시장경제 쪽으로 체질이 변화했다. 최 교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크게 강화시킨 것이 사실"이라며 "현재 이명박 정부는 국가 주도형 신자유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시장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그런 부작용이 쌓여 터진 것이 지난 2008년 발생한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최 교수는 "사정이 이런데도 이명박 정부가 계속 신자유주의를 강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기하거나 수정하고 있거든요. 한국 사회도 양극화가 심화되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등 그 폐해가 심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합의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조정시장경제가 한국에 적합한 시장경제체제입니다."

 

복지국가 되려면 민주주의 발전 더 필요해

 

북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합의제 조정시장경제는 견고한 노동권과 복지, 강력한 노동조합이 특징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말 그대로 시장의 조정이 주로 노조와 회사, 정부의 합의를 통해 이뤄진다.

 

최 교수는 "이 모델을 택하고 있는 유럽 선진국들은 사회적인 부의 분배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 면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며 "합리적이고 강력한 노동조합과 보편적인 복지체계가 그 이유"라고 설명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이 있으니 임금 수준과 고용조건이 노동자에게 유리하며 기업의 입장에서는 보편적인 복지체계가 있으니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잘 갖춰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산업이나 기업의 구조조정을 순조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조건들은 경제 통합이나 시장 개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하는 사회통합 장치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꼭 필요한 부분이지요."

 

문제는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런 합의제 조정시장경제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본이나 대기업에 비해 노동자나 중소상공인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발언권이 미약한 수준이기 때문. 최 교수는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을 특별 지원해서 각각의 경제 주체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시장을 조정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합의제 조정시장경제 국가의 역할"이라며 "이러한 국가를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재의 양극화를 줄이고 사회적 격차가 적은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필연적이라는 분석이다. 최 교수는 "합의제 조정시장경제를 채택한 유럽의 국가들은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와 온건다당제, 연립정부라는 정치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며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로는 합의제 조정시장경제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가 경제 개혁 만든다

 

최 교수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은 이념과 정책을 놓고 절충, 합의하는 것"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들이 누군가를 대변하고 있는 정책 정당, 이념 정당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의 선거가 인물과 출신 지역 위주로 이뤄지다보니 정작 정당마다 정책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정당들에 정책 색깔이 뚜렷해지면 덩치가 큰 정당에 대항하는 작은 군소 정당들이 연립해서 정권을 잡는 일도 가능해진다는 것이 최 교수의 설명이다.

 

"복지를 강화한다는 주제를 놓고 정당들이 토론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좌파 정당은 당연히 찬성할 테고 중도 좌파도 찬성, 중도 우파는 부분적이지만 아마 찬성 쪽 입장에 서겠죠. 우파는 반대할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정당이 연립해서 정권을 잡으면 결국 복지가 강화됩니다. 유럽의 합의제 조정시장경제 국가들은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집권하면서 경제를 개혁해 온 겁니다."

 

최 교수는 "재벌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며 "현재의 자유시장경제를 조정시장경제로 바꾸고 싶다면 선거제도 개혁이 첫 번째"라고 말했다. 

 

"선거제도를 개혁해서 정당의 비례대표 의석을 50% 이상으로 올리면 정책으로 승부하는 이념정당들이 원내로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민주당 같은 잡탕정당들이 긴장해야 할 겁니다. 한나라당도 합리적 보수가 될 것이고 각각 자기 당의 '고객'들이 생길 겁니다. 정당의 구조가 그렇게 되면 비로소 점진적인 경제 개혁이 가능하지요. 당장 2012년 총선에서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로 선거를 치른다면 진보정당들이 다수 의석을 차지할 겁니다."


#시민경제강좌#최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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