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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도시,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타향인들에게는 싸우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하고, 섣부른 변화보다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대구!
최근 대구는 도심 스토리 만들기에 열중이다. 그 가운데 근현대를 아우르는 문화유산을 가진 이점을 살려서 도심 스토리 발굴에 치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스토리가 화두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하나의 스토리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에는 객관적인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애환과 정서가 숨어있다. 그러므로 스토리의 원형은 과거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 속에 녹아 있는 무형의 가치이며 역사가 놓치고 간 실제 우리들의 지난 모습이기도 하다.

이 스토리의 발굴을 위해 대구시는 도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그 중 '길' 이 지닌 가치는 단순히 '지역 명소'를 넘어서서 지자체 '브랜드'로 뜨고 있는 중이다. 이에 대구 중구 구(舊)도심 골목투어는 2만여 명 찾은 '히트 상품'으로서 지역 예술 활동 근거지 역할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대구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대구 중구 종로거리의 진골목을 심층 취재하며 대구에서 골목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파악하고자 한다.... 기자주

진골목의 역사

대구에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100년이 넘는 골목길이 하나 있다. '진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곳은 대구의 과거와 현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서 조선시대부터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당시 대구 지도에도 종종 등장했다.

진골목이란 이름에서 '진'은 경상도 말로 '긴'이란 뜻이다. 경상도에선 'ㄱ' 발음을 'ㅈ'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몇몇 있다. 밥에 싸먹는 '김'을 이곳에선 '짐' 이라고 하며, '(길이가) 길다'라는 표현을 '질다'라고 하는데 진골목 역시도 좁고 긴 그 골목의 지형을 본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골목의 100년 된 붉은 담 .
진골목의 100년 된 붉은 담. ⓒ 조을영


경상감영(慶尙監營, 주1)터로 이어진 진골목은 서민의 애환과 생활이 배어 있는 장소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영남 제일 관문에서 진골목 옆 큰길을 따라 경상감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양반들과 부딪치길 꺼려하는 백성들은 진골목을 경상감영 통로로 이용했는데, 한마디로 서울의 피맛골과 같이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이후 근대에 들면서면서부터는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바뀌었다. 또한 일제시대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여, 진골목 안에 살던 7명의 부인들이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이틀 뒤인 1907년 2월23일 금붙이 등 패물을 모아 나라에 헌납하며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를 기념하는 비가 진골목에 세워져 있다.

주1)경상감영(慶尙監營);감영(監營)은 조선시대 때 각 지역의 관찰사(觀察使)가 상주하며 업무를 보던 관청이다. 오늘날의 도청과 같다. 그러므로 경상감영은 오늘날의 경상북도청과 같은 의미다. 조선에 감영은 모두 8곳이 있었으며, 17세기 초에 이르면 감영 장소가 고정되었다.

진골목의 부자들

한국 근대사에 처음 등장한 진골목은 '부자동네'라는 이미지로 정리할 수 있다. 진골목은 대구의 가장 번화가인 중앙로보다 집값이 훨씬 비쌌다. 게다가 예전부터 대구 부자들이 살던 동네라 건물들이 하나 같이 200평 넘는 것들이었다.

근대 초기 달성 서씨들의 집성촌이었던 이곳에는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고려시대부터 달성 서씨들은 대구의 달성, 동산, 계산, 남산, 종로 일대를 기반으로 명성을 누리던 호족이었는데, 이들의 후손인 서병국은 근대 시기 진골목에서 1000평이 넘는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또한 섬유회사인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이자 체육인이던 신도환, 대구 소주의 대명사인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대구 부자들이 살던 진골목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그 면모를 잃고 만다.

진골목 .
진골목. ⓒ 조을영

부자들이 하나둘씩 떠난 진골목의 저택들은 쪼개져 팔리며 요정과 술집 골목으로 바뀌게 된다. 경상감영에서 일하던 관기(官妓)들이 1급 기생학교인 권번(券番, 주2)의 기생으로 바뀌면서 주요 활동무대로 삼은 곳이 진골목이 위치한 종로거리였고, 이 거리는 1970년대까지 요정이 흥성해 한때 종로 일대에 30여개의 요정에서 500여명의 기생이 일했다고 한다.

그럼에 따라 유려한 건축미와 식물로 잘 꾸민 아늑한 마당을 갖춘 진골목 한옥들도 하나 둘 요정으로 바뀌어 1970년대 중반에는 그 수가 9개나 됐다. 양반의 큰 기침소리만 울리던 골목에서 접대부들의 목소리와 밴드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주민들이 수차례 대구시에 진정하기에 이른다. 이후 여관들까지 여럿 들어서며 윤락가로까지 전락한 진골목은 쇠퇴일로에 접어 들들었다.

이후 1980년대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한옥이 풍기는 복고풍의 정취와 소박하고 맛깔스런 음식, 적절한 가격이 어울린 식당이 하나 둘 들어서며 노년층과 샐러리맨들이 드나드는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현재는 식당이 된 진골목 부자의 저택 .
현재는 식당이 된 진골목 부자의 저택. ⓒ 조을영

주2) 권번(券番);어린 기생(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한 기관. 권번에서 많은 명기(名妓)가 배출되었고,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할 무렵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권번은 폐지되었다.

소설 <마당 깊은 집>에도 등장하는 정소아과건물

대구가 낳은 현대 문학가 김원일의 1988년 작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의 삶을 대구 종로거리와 진골목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실화 작품이다. 그 가운데 그려진 정소아과는 진골목의 건물 가운데 가장 운치 있고 흥미를 끄는 곳이다. 원래 이곳은 앞서 밝힌 부자 서병국의 자택이었던 곳으로서, 1937년 화교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유럽 스타일의 일본 건축물이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주택으로 당시의 세계적 문화 격변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집은 634㎡의 대지에 히말라야시더가 심어진 넓은 정원, 별채, 벽돌조 2층 양옥이 잘 어울려 있다. 곡선으로 처리한 담, 1층에 있는 일광실, 서양식 욕조 등을 통해 일제 강점기부유층의 생활 모습과 그 시절 근대 건축의 진수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대구의 근대건축물 가운데 양옥 주택은 거의 남지 않아 당시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북대 의대 출신인 정필수(91) 원장이 1947년 이 집을 인수받아 소아과를 개원하여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구의 역사와 함께 하였으나 고령인 정 원장의 건강상 이유로 최근 문을 닫았다. 이 건물은 가치를 아는 시민 연대 등에서는 시에서 건물을 매입하여 박물관화 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소아과 .
정소아과. ⓒ 조을영

예술인들의 아지트, 미도다방

70년대 소방 도로를 뚫기 위해 그 허리가 잘린 진골목은 길다는 의미로서의 그 이름이 무색해져 있다. 그 진골목의 허리쯤에 위치한 미도다방은 퇴역 교수, 문인 등이 모여 2000원짜리 약차를 마시거나 문인들의 시낭송회를 즐기는 복고풍의 공간이다.

하얀 모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담은 27살 때 이 다방의 주인이 돼서 30년이 넘게 진골목을 지키며 미도봉사회를 만들어 독거노인을 돕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사는 훈훈한 골목의 인정을 말없이 실천하는 모습은 진골목을 알리는 현재진행형의 스토리가 되어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미도 다방 .
미도 다방. ⓒ 조을영

현재의 진골목

과거에는 부자들의 저택에서 요정과 술집으로, 이제는 식당과 선술집이 들어선 진골목은 대구의 전통 먹거리 타운으로 변했다. 한약 도매업소들이 몰려 있는 약전골목이 인근에 위치해 있어 노년층이 주로 많이 찾는다. 또, 인근의 금융프라자, 백화점 등에서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향토음식 등을 파는 진골목의 식당들에는 '옛맛'을 즐기려는 노년층과 바쁜 직장인들을 위한 5000원 이하의 비교적 저렴한 한식을 즐길 수 있는 골목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10~20대들은 진골목 반대편의 화려한 동성로 거리를 찾는다.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젊은이와 실버들의 거리가 공존하는 것이다. 노인들은 이른 아침 이 거리에서 친구들을 만나 커피를 한 잔 한 뒤 바둑을 두며 정담을 나눈 뒤 저녁이 되서야 자리를 뜬다. 이곳을 찾는 노인들의 수는 하루 평균 1000여 명. 골목 좌우에 늘어선 식당만 30여 곳이고 기원도 5, 6곳이 영업 중이다.

음식점 거리로 바뀐 진골목 .
음식점 거리로 바뀐 진골목. ⓒ 조을영

'길 전성시대' 진골목의 방향

바쁘게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걷기 시작했다. 이에는 건강, 성찰, 풍경 감상 등 다양한 이유가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길이란 무엇인가? 길에는 역사와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따뜻한 그 무엇을 만난다. 그러기에 길은 단순히 사람과 교통수단이 지나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다. 오랜 시간 사람의 발자국이 켜켜이 쌓이고 삶이 배어야 길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골목길이 진정한 길로 대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새로 뚫린 종로와 중앙로 사이에서 진골목이 영남제일관과 경상감영을 잇는 통로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좁고 긴 진골목과 그 속 건축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과거의 삶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지역예술의 산실, 뒷골목의 가치

그렇다면 우리가 도시의 뒷골목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뒷골목과 전통 가옥을 없애고 도시 미관 정비 작업에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뒷골목을 사랑하는 전 세계 골목 마니아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일본 도쿄에서 도시의 뒷골목을 재정비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을 때 관광객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했다. 그들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진 도시를 보려고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사람들의 숨결이 배이고 지난 이야기가 담긴 진짜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뒷골목의 가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지역 예술가들 사이에서 마을과 공동체를 예술 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지역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골목이 예술의 주제로, 하나의 화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낡고 허름한 바다절벽 마을 동피랑의 골목길들이 '벽화마을'로 알려지며 골목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됐다. 문턱 높은 갤러리 대신 생활 속 예술로서 그 화지를 골목의 벽과 담장이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골목길 여행은 자연을 둘러보는 여행과 달리 도시의 역사와 문화, 과거부터 현재까지 골목 사람들의 삶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있으며, 과거를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까지 내다 볼 수 있는 호젓하고 조용한 사색의 공간인 것이다.


#대구 진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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