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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말 그대로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에게 성 밖에서 떨고 있는 굶주린 소년은 낯선 풍경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왕자는 어느 순간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거지 소년이 된다. 내용이 자세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하루아침에 꿈에도 생각지 못한 자리로 추락한 그 비참함은 생생하다.

 

나보다 남을 높게 여기기는 어렵지만 낮게 여기기는 쉽다. '저 사람은 오지랖이 너무 넓어, 저 사람은 머리숱이 너무 적어, 저 사람은 겁이 너무 많아...'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자신하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경험은 중요하다. 이런 취지에서 한 시민운동가가 책 대신 사람을 대출하여 읽는다는, 즉 대화를 한다는 '리빙 라이브러리' 행사를 열었다. 김수정의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는 이 행사에서 30분씩 대출해 읽은 '사람책'의 사연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여기엔 싱글맘, 장학사, 레즈비언, 우울증 환자, 여자 소방관 등등 평소 쉽게 접하지 못했던 사람책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사람책은 '정신병 환자 가족'인 토니 랑포드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한 학교를 졸업해 평범한 직업을 가졌던 토니.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토니는 아내를 돌보고 일을 하면서 살림까지 도맡아해야 했다. 그런데 아들 스티브마저 십대가 된 이후 심한 강박증과 공포증, 정신분열증상을 보여 입원을 했다. 스티브는 조금 괜찮아졌다 싶어 복학시키려 하면 또 다시 증세가 심해지곤 했다. 그러던 중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토니는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토니는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절망의 바닥에서 처지가 비슷하며 의지할 수 있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럼 지금 현재 당신에게 그녀는 어떤 의미예요? 여자친구? 애인?" 저자가 질문하자 토니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 "소울 메이트." 그는 그 여인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도우미'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다. 그가 겪었던 아픔들은 이제 그가 다른 정신질환자를 사랑하며 성의껏 돌볼 수 있는 힘이 된다.

 

사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에는 남과 다른 삶을 살기에 자연히 따르는 흥미로운 모험담, 특별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토니의 이야기를 인상적으로 읽었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이웃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토니 외에도 혼혈이기에, 트랜스젠더이기에, 채식주의자이기에 눈총을 받거나 차별을 당하는 이들이 있다. 혹은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장애인이기에, 노숙자이기에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행복한 왕자가 계속 행복하기 위해선 역지사지의 자세로 거지를 도왔어야 했다. 우리에게도 사건이 벌어질 날이 올지 모른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다르게 사는 이들을 향한 비웃음을 거두고 그 살아있는 책들에게 다가가 귀를 기울여 보자. 밥 딜런이 "너도 구르는 돌처럼 사는 처지가 되어보니 기분이 어때?"라고 비아냥댄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말이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김수정 지음, 달(2009)


#나는 런던에서 사람책을 읽는다#리빙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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