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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대성중학교.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대성중학교. 지금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 김현

 용정제일중학교. 옆에 대성중학교가 있다.
용정제일중학교. 옆에 대성중학교가 있다. ⓒ 김현

교하에서 한참을 달려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용정에 도착했다. 용정은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모교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늘 책속에서, 시 속에서만 봐 왔던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약간 들떴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의 움직이는 모습과 차량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본 낯선 곳인데도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왜 그럴까? 아마 한글로 쓴 수많은 간판들 때문일 게다. 연길 시내의 간판 대부분은 한글과 한자 두 가지를 써놓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한글이 앞이나 위에 있고 다음 한자가 뒤나 밑에 있다는 것이다. 연길시뿐만 아니다. 연변 자치주 내에 있는 상점 간판들 대부분이 그랬다.

조선족 자치주인 이곳에선 우리말과 글이 한자보다 먼저라고 한다. 중국 땅에 살면서도 한글의 얼을 잃지 않은 그들을 보니 지난날 바람불고 눈보라 치던 이곳에 이주해오면서 자신을 지키려했던 선조들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런데 이런 한글을 중국이 자신들의 언어라고 주장하며 국제표준을 만든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버스는 시내를 돌아 용정에 들어섰다. 말로만 듣던 용정이란 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데 기분이 묘했다. 언젠가 한 번은 오고 싶었던 마음이 용정이란 두 글자만 보고도 들뜨게 한 것 같았다.

 해란강. 비암산을 둘러싸고 길게 흐르고 있다.
해란강. 비암산을 둘러싸고 길게 흐르고 있다. ⓒ 김현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넓고 기다란 강이 흘러가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강이냐고 물으니 해란강이란다. 해란강을 조금 지나니 그리 높지 않은 산 하나가 보였다. 비암산이다. 비암산 정상에 희미하게 정자 하나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일송정이다. 고등학교 때 수없이 불렀던 '선구자'의 동네가 여긴가 싶어 차창 너머로 다시 보고 또 보았다. 일송정과 해란강을 바라보려니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라는 노랫말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당시 우리는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노래에 얽힌 이야긴 듣지 못했다. 일송정은 그냥 정자 이름인가 했고, 해란강은 어느 지역의 강인가 했다. 이것이 북간도 용정에 있는 소나무이고 강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또한 이곳이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여들고 의견을 나눴다는 말도 처음 들었다.  

 비암산의 일송정 모습.
비암산의 일송정 모습. ⓒ 김현

용정은 단순한 지명으로서의 용정은 아니었다. 용정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 무렵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청년들이 모여 독립의 꿈을 품고 몸과 마음을 닦았던 곳이다. 특히 일송정은 당시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해 일송정 아래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을 이야기하고 투쟁할 방법을 논의했던 곳이 일송정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안 일제는 일송정이란 이름을 가진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것도 모자라 약품을 주입하여 말려 죽였다. 당시 조선인들이 그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으나 살리지 못하고 새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소나무는 노래 선구자 속에 나온 일송정이 아니라 새로 심은 소나무였다. 소나무까지 말려 죽었다는 이야길 들으며 일제가 얼마나 국내외를 떠나 사람은 물론 독립의 씨가 보이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나무라도 서슴지 않고 해를 끼쳤는가 놀랍기만 했다.

버스는 비암산의 일송정과 해란강을 뒤로 하고 달려 윤동주의 체취가 묻어있는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용정제일중학교 터 안에 있는 옛 대성중학교는 지금은 학교가 아닌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대성중학교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윤동주뿐만 아니라 당시 북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는 곳으로 , 한국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단다.

 대성중학교 앞 윤동주 시비
대성중학교 앞 윤동주 시비 ⓒ 김현

 동주의 성적표와 생가에서 장례식 모습, 묘지
동주의 성적표와 생가에서 장례식 모습, 묘지 ⓒ 김현

잠시 사진 촬영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복도를 따라가자 북간도에서 활약했던 이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를 맡은 여교사 한 분이 '룡정의 인물'란의 사진들을 보면서 지나온 역사를 설명하는데 말이 청산유수다.

설명을 들으면서 사진 속의 인물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사진 속엔 눈에 익숙한 인물들도 있었다. 윤동주는 물론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가신 문익환 목사와 또 하나의 인물, 안중근 의사도 그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을사늑약 전문과 일제세력에 둘려싸여 있는 고종의 모습
을사늑약 전문과 일제세력에 둘려싸여 있는 고종의 모습 ⓒ 김현

안중근 하면 하얼빈을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 하얼빈 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곳 용정에 '안중근 의거'라는 이름으로 저격 당시의 사진과 저격 내용을 담고 있는 신문, 일본 경찰에 둘러 싸여 있는 체포되는 장면의 사진들이 있을까.

이곳 용정도 안중근 의사에겐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연해주로 가기 전 이곳 연변에서 머물렀다. 또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윤동주 생가가 있는 뒷산의 선바위라는 곳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위를 볼 수 없었다. 한 밤중에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대성중학교 건물 안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
대성중학교 건물 안에 전시되어 있는 책들 ⓒ 김현

전시물을 보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윤동주의 시집과 연변 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의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곳에 들렀다. 스물두 살 가량의 곱상한 아가씨 혼자 앉아 있다 손님을 맞이한다. 윤동주의 시집 일곱 권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오래된 시집처럼 보였다. 시집의 제목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별 헤는 밤>, <윤동주 시집> 등 여러 제목이다. 또한 룡정의 역사와 발해사를 다룬 책 등 대부분 우리민족의 삶을 다룬 책들이다.

"여기 있는 책들 파나요?"
"네."

아가씨는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곤 말이 없다. 그곳에서 윤동주의 시집이 아닌 시조집 한 권을 샀다. 우리 돈으로 5천 원. 시집은 연변 지역에서 윤동주에 비견할 만한 민족시인이라 칭송 받는 '심련수 시조집'이다.

 용드레 우물
용드레 우물 ⓒ 김현

대성중학교를 나와 '룡정' 지명 우물터로 향했다. 대성중학교에서 버스로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우물터는 도롯가에 있는데 주변이 한가롭다. 주민들 몇몇이 우물터 주변에 앉아 이야길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우물터 주변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룡정'이라는 이름이 생긴 연유를 기록한 비석이 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에다 <용드레>를 세웠는데 룡정 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용드레 우물 내력글
용드레 우물 내력글 ⓒ 김현

그러나 이 우물도 내력글을 통해 역사의 파고 속에서 험난한 과정을 거쳤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우물을 통해 조선인의 삶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유추해 볼 수 있다. 좀 아쉬운 것은 우물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용드레 우물터를 뒤로하고 식당으로 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도로엔 자동차뿐만 아니라 어릴 때 봤던 세발 자동차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또 하나, 자전거를 이용한 인력거가 사람을 태우고 가는 모습도 보였다. 연변의 저녁은 저물어 갔다. 그렇다고 하루의 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다음 행선지인 명동촌으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8월에 다녀오고 쓴 글입니다.



#대성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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