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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일 <남자의 자격>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주제로 경희대에서 강의하는 김태원
 지난 4월 1일 <남자의 자격> '청춘에게 고함'이라는 주제로 경희대에서 강의하는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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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콘서트를 다녀왔다. 생각해 보니, 홍대 클럽 말고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를 간 것이 처음이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서 서태지 팬 시절에도 하지 않던 일이다. 이것이 다 '김할머니'(김태원) 때문이다. 내가 어쩌다 서른 넘어서 마흔 넘은 아저씨의 광팬이 되었을까나. 순전히 웃다가 벌어진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김할머니가 무심코 던지는 말 몇 마디에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김할머니가 열심히 홍보하는 노래를 듣다가, 결국 콘서트까지 다녀오는 팔자가 된 거다.

웃다가 팬이 된 사람으로서 나는 김할머니의 유머 세계가 제대로 분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김할머니의 예술적인 유머가 그저 다른 예능인들과 비슷하게 4차원 개그, 막무가내 개그, 혹은 약골 캐릭터 정도로만 수식되는 것, 나아가 김할머니의 유머가 그가 성취한 음악 세계를 흠집 내는 요소로 오해되는 것이 진정 안타깝다. 김할머니의 유머가 얼마나 예술적인 차원에 이른 것인지를 안다면 그의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조차 김할머니가 진정 천재이자 타고난 예술가라는 점을 인정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어설픈 솜씨로나마 김할머니의 유머의 세계를 분석해 보기로 했다. 김할머니는 기본적인 개그 감각도 풍부하기 때문에 그가 구사하는 여러 가지 개그 속에서 특이 사항들만을 골라내 살펴봐야 한다. 이 요소들을 모아 보면 막연히 4차원이라고 분류되어 왔던 김할머니의 개그가 생각보다 훨씬 고차원적이며 예술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1. 허를 찌르지만 상처 입히지 않는

김할머니의 유머에는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말장난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유머다. 둘 다 모두 유머의 세계에서 가장 흔한 것들이라 이 두 가지 없이 개그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벼운 말장난은 단순히 김할머니의 취향이 아닌 것 같아 제한다 치더라도 타인을 소재로 한 것은 약간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김할머니도 타인을 끌어들이는 개그를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이 경우는 대개 상대를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하려는 때라는 것, 그리고 허를 찌르는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으로 높여주거나 적어도 상처는 입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상대가 음악 하는 사람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 대표적인 예가 <라디오 스타>(2008)에 있다.

김할머니의 예능 감각을 처음으로 알렸던 <라디오 스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하나 있다. 아이스크림을 렌지에 돌려 통째로 마셨다는 금단 증상 이야기보다 더 김할머니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말이다. 록밴드 부활의 보컬리스트로서 신정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저 웃고 넘어가자는 정도의 가벼운 질문을 윤종신이 던졌을 때였다. 보컬로 탐낼 만큼 노래 잘하는 가수를 꼽아보라는 질문이 나오자 신정환이 장난스레 록 발성을 해서 돌발적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신정환을 소재로 개그 하나 던져 보시오, 라는 주문에 가까웠다. 진지하게 답할 필요도,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김할머니가 사뭇 진지하게, 그러나 너무 심각하지는 않게 대답했다.

"자기가 자신을 포기해서 그렇지, 헤비메탈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 진행자 네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특히 허를 찔린 신정환은 드물게 당황하는 얼굴이 되었다. 저 한 문장 안에 아주 많은 메시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1. 신정환은 노래에 재능이 있다.
2. 신정환은 헤비메탈에 대한 꿈이 있었으나 포기했다.
3. 김태원은 가수로서의 신정환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4. 김태원은 음악의 꿈을 가진 후배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격려하는 사람이다.
5. 김태원은 후배에게 직언을 할 수 있을 만큼 음악적으로 탁월한 사람이다.

다섯 가지 메시지를 담으면서 동시에 예능 프로그램의 성격에 걸맞게 충분히 웃긴 말이었다. 신정환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한 탓인지, 이 방송을 보고 한동안 신정환만 보면 저 말이 떠올랐었다.

가만히 보면 신정환의 허를 찌른 것 같지만 사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려 했던 신정환의 노래 실력을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 말이니, 결과적으로 신정환을 더욱 높여준 셈이 된다. 적어도 방송에서 김할머니만큼 신정환의 노래 실력을 인정해 주고 성공할 수 있다며 격려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물론 김할머니의 전공분야가 음악이어서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더더욱 까탈스럽게 굴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보통의 개그 감각이었다면 당연히 신정환의 노래 실력을 비하하는 방식으로 웃음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김할머니는 상식적인 개그의 맥락을 벗어나면서도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고 웃기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2. 주관과 객관의 교묘한 전환

김할머니를 두고 누군가 3인칭 화법의 소유자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소재가 대부분 자기가 겪은 아픈 경험이나 상처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을 마치 초월한 듯 무심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픈 얘기를 무심하게 하는 것은 맞지만 웃음이 유발되는 지점, 그래서 김할머니 식 화법이 돋보이는 정확한 지점은 3인칭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아니다. 그보다는 '주관과 객관이 교묘히 전환되는' 부분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때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보통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주관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전환이 정말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의외의 지점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KBS <남자의자격> 알공예 자격증편.
 KBS <남자의자격> 알공예 자격증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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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 '남자 그리고 자격증'(2010) 편에서 김할머니는 알공예 자격증에 도전 중인데 중간 점검 차 완성한 알공예 작품 서너 개를 가져와 보여준 적이 있다. 깨지기 쉬운 알을 손에 쥐고 섬세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어려운 작업인데 작품의 완성도는 생각보다 높았다. 스스로 보기에도 그럴 듯하다고 여겼는지 김할머니는 뿌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손 떠는 사람은 절대 못 만들어요"

작년에 과도한 음주의 후유증으로 수전증에 시달렸으나 술을 끊고 난 뒤 수전증이 사라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만히 보면 이 이야기는 사실 주관적으로 이야기해야 맞다. 즉 '나는 손을 떨지 않아서 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라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이다.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알공예는 섬세한 작업이다'와 같은 식으로 좀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지 대뜸 수전증과 알공예의 관계를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주관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를 객관적인 문장으로, 갑자기 만들어 버리는 데에서 오는 재미와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데에서 오는 재미가 합쳐져서 웃음이 유발된다.

주관과 객관은 사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 감각이다. 어떤 이야기가 주관적이고 어떤 이야기가 객관적인 것인지를 사회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 일부러 바꾸려고 해도 잘 바뀌지 않는다.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익는 감각이라서 사실 꾸준히 사회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나중에 익히기도 어려운 기술이다. 그래서 개그맨 중에도 이런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같은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데에서 유머가 발생한다고 해도 말꼬리를 살짝 비트는 수준을 넘어 사물을 보는 시점 자체를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의외로 매우 자주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넘나든다.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이 유머를 구사할 때는 본인이 별로 웃지 않는다. 자기가 유머를 던진다고 의식하지 않고 할 때가 많다는 거다. 이런 것을 두고 김할머니의 예술가적 감성이 나타나는 지점이라는 해석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지 몰라도 김할머니의 유머를 매우 독특하게 만드는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3. 철딱서니 없을 때도 예술적으로

다 큰 어른이 딱 초딩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는 것은 사실 흔한 개그 방식이다. 나잇값을 하느라, 근엄한 척하느라 숨기고 사는 모든 어른의 초딩 본능을 일깨우기 때문에 개그의 성공 확률도 높다. 또 이런 종류의 개그는 비개그맨 출신들이 도전하기가 쉽다. 보통 예능에서 활동하는 비개그맨들은 배우나 음악인들로 예술적 기질이 풍부한 경우가 많고, 이 예술적 기질이란 게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과 통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박2일>의 은초딩이 그 전형적인 경우다.

음악인 출신의 김할머니도 딱 그런 케이스다. 그래서 김할머니도 이런 종류의 개그를 자주 구사한다. 그런데 김할머니의 특징은 그 차원이 다른 초딩들보다 몇 차원 높다는 점이다. 초딩이라고 다 같은 초딩이 아니다. 김할머니는 철딱서니 없는 개그를 할 때도 매우 예술적으로 한다.

<남자의 자격> '남자 그리고 자동차' 에피소드(2009)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이 에피소드는 휴게소마다 들러서 제작진이 미리 만들어 놓은 중고차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제였다. 대부분 운전만 겨우 할 뿐 자동차에 대해서는 별반 지식이 없는 멤버들이 고장 난 자동차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김할머니는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 그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KBS <남자의자격> 남자, 그리고 건강검진 편에 출연한 김태원.
 KBS <남자의자격> 남자, 그리고 건강검진 편에 출연한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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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이 초딩스러운 발상을 하면 어떤 개그가 나오는지 정확한 예시를 제시한 셈이다. 초딩 개그라면 수없이 들어왔을, 정통 개그맨 출신 이윤석이 순간 어이를 상실하여 크게 웃었다.

'남자 그리고 건강검진'편(2010)에서도 초딩 개그를 확인할 수 있다. 멤버 전원이 건강검진을 받는 날 당일, 특히 김국진과 이경규 등 OB들 사이에서 검진 결과를 걱정하는 이야기가 오고갔다. 몸속에 장기가 너무 많은 것이 문제라는, 초딩스러운 말까지 이경규의 입에서 나왔을 때였다. 비슷한 처지인, 어쩌면 그중 가장 심각할 수도 있을 김할머니가 마치 걱정하는 이들을 위로한다는 듯 이런 말을 던졌다.

"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 오늘 들은 건 오늘 바로 잊어버려. 난 그렇게 살아왔어."

대책 없기로도 이렇게 대책 없는 초딩이 있을까. 초딩 발상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김국진과 이경규가 크게 웃었다. 초딩 발상도 예술가 김할머니가 할 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차원이 높아진다.

4. 상투적인 겸손에 연연하지 않기

질문과 대답의 형식이 많은 방송에서는 상투적인 겸손의 말로 대답하고 넘어가야 할 상황이 많다. 김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주 쓰는 겸손 어휘 목록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다. 예컨대 "영광입니다" 같은 말이 그렇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가끔 상투적으로 넘어가면 될 상황에서 굳이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혀서 대답하는 유머를 던질 때가 있다. 웃기려고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사실이 아닌 것을 굳이 겸손으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없기에 유머를 섞어서 말하는 듯하다.

아직 김할머니가 '국민할매'로 인기를 얻기 전 <윤도현의 러브레터>(2006)에 출연했을 때였다. 당시 부활의 보컬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정동하는 스물일곱 즈음이었고, 누가 보아도 앳된 얼굴이었다. 윤도현이 새 보컬 정동하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젊은 사람이 보컬로 들어와서 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겠어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사람이 팀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배려해 주고 있답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겸손하지만 상투적인 대답을 할 만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무심하고도 시크하게 말했다.

"그런 건 없어요. 저 친구가 바뀌어야 되는 거지, 우리는 그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얼핏 들으면 잘난 척에, 고집불통에, 오만한 발언인데 객석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결성된 지 20년이 넘은,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이미 구축한 지 오래된 팀의 리더에게 그것은 잘난 척이 아니라 그저 사실이었고, 김할머니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을 뿐이다. 상투적인 것을 알면서 굳이 겸손을 가장하는 것이 어색할 때는 그것을 인정하고 사실대로 말함으로써 관객의 인정과 웃음을 동시에 얻어내는 유머 감각이 빛나던 순간이었다.

얼마 전에 갔던 콘서트(2010)에서도 이런 식의 유머를 보았다. 지나가는 말로 해서 관객들이 크게 알아차리지는 않았지만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으로 크게 웃었을 것이다. 콘서트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컬 정동하가 공연이 모두 끝났다는 내용의 멘트를 하자, 관객들이 매우 아쉬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 웅성대는 소리를 들은 김할머니가 역시 특유의 무심한 듯 시크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오래 했어요."

두 시간이 넘도록 공연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공연이 정말 감동적이어서 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한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 결코 짧은 공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났을 때 아쉬워하는 팬 앞에서 연주자 스스로 오래 했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흔치 않다. 구태여 겸손을 가장하지 않는 데에서 우연히 나오는 유머가 거기에도 있었다.

5. 교과서적 상식의 부재

 KBS <남자의자격>. 이 프로그램을 통해 김할머니는 그의 유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KBS <남자의자격>. 이 프로그램을 통해 김할머니는 그의 유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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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에서 김할머니의 존재감이 가장 부각된 에피소드 중에는 유난히 퀴즈가 많다. 퀴즈를 너무 심하게 못 맞추는 터라, 김할머니 본인에게는 굴욕의 순간일 수도 있었겠으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김할머니가 가장 빛나던 순간일 수밖에 없다.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퀴즈만 나왔다 하면 김할머니와 이경규가 꼴찌를 두고 겨루는데 박빙의 게임에서 결국 영광의 꼴찌가 되는 것은 언제나 김할머니이다.

방송에서는 김할머니와 이경규를 늘 세트로 묶어 다루지만 퀴즈를 맞히는 과정을 보면 사실 김할머니와 이경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퀴즈라는 것이 대부분 교과서적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데 쉰이 넘은 이경규가 그 지식을 갖고 있었으되 오랜 시간의 흐름과 기억력의 쇠퇴 때문에 못 맞히는 것이라면 김할머니는 애초에 그 지식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경우가 많다. 알콜성 치매 증상을 때때로 노출하는 김할머니지만 퀴즈를 못 맞히는 것은 기억력 탓이 아니라 정말로 그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격> '남자 고등학교 가다'(2010) 편에서 적분 기호(∫)를 보고 '인테그럴'이라는 이름을 맞추는 퀴즈가 있었다. 기호를 보여주자 이경규는 분명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오래 되어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괴로워했다. 반면 기호를 처음 보는 김할머니는 전혀 괴로워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해마 닮았다."

방송 하는 것을 두고 "세상에 나왔다"고 표현했을 만큼 오랫동안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왔던 김할머니는 교과서 상식뿐 아니라 일반 상식도 부족하다. 얼마나 부족한지 퀴즈 단짝 이경규마저 할 말을 잃는 순간이 있을 정도다. 초창기 <남자의 자격> '남자 그리고 박학다식'(2009)편에서 이경규와 함께 번갈아가며 '나라 이름을 대면 수도 이름 맞히기' 콩트를 즉석에서 만들던 김할머니는 나라 이름을 댈 차례가 되자 이렇게 말했다.

"소련! ...소련 없어졌어? 왜 나만 몰랐지?"

퀴즈 짝꿍 이경규마저도 그 순간엔 대꾸할 말을 잃어버렸다. 남자의 자격 초창기에 유독 이런 종류의 유머가 많이 발생한 나머지, 김할머니의 캐릭터가 무식함으로 결정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는데 여기에도 오해는 있다. 가만히 보면 김할머니는 결코 무식하지 않다. 음악 혹은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디테일한 지식에도 강한 면모를 보이거니와 그 지식을 토대로 자기만의 메시지와 언어를 만들어 내는 데에도 아주 탁월하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을 외워 나열하는 것을 지식인이라 하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메시지와 이론을 구축할 수 있어야 지식인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김할머니는 결코 무식하지 않다.

김할머니에게 부족한 것은 그러니까 정규교과과정의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의 조각들과 최신 시사 상식인 셈이다. 그것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서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지식들이다. 만약 어느 개그맨이 웃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런 지식을 모르는 척했다면 웃음은커녕 억지 개그라는 비난만 가득 안고 퇴장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정도다.

그런 종류의 지식들을 김할머니가 정말 순수하게 모르고,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웃음을 준다. 무식함을 소재로 한 개그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일차적인 웃음, 그리고 그 무식함이 의외의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데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가 그것이다. 이런 카타르시스는 상식으로 분류되는, 그래서 외워야 하는 지식이 넘쳐 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스트레스를 경감시켜 주는 데에서 발생한다. 미디어가 침대 속까지 파고들어 표준화된 지식을 주입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점점 구사하기 힘든 개그라는 점에서 이 부분도 너무 김할머니의 굴욕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6. 당당함, 막무가내와는 격이 다른

김할머니의 개그에서 가장 쉽게 오해되는 부분 중 하나가 김할머니가 막무가내 스타일의 개그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흔히 막무가내 개그라고 하면 상황의 맥락에 유의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끼어드는 것을 일컫는다. 어떻게든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염치 불구하고 나서는 개그. 그러나 김할머니는 결코 맥락도 모르고 끼어드는 스타일은 아니다. 김할머니는 말투와는 달리 행동이 점잖은 편이라서 스포트라이트의 움직임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김할머니가 막무가내라고 오해받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주눅 들거나 민망해할 법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남자의 자격> '월드컵에 가다' 편에서 축구 조 추첨 행사에 갔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김할머니는 경기를 이기면 16강이 되는지, 32강이 되는지도 모를 만큼 축구에 문외한이었다. 조 추첨이라고 알 리 없는 김할머니에게 옆에 있던 이윤석이 설명해 주겠다고 나서자 김할머니가 아주 당당하게, 살짝 단호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말했다.

"내가 모른다고 막 얘기하면 안 돼!"

적반하장이다. 말하려던 이윤석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월드컵을 앞둔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모르는 자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그러나 사실 축구를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김할머니는 단지 타당한 이유 없이 주눅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고작 축구를 모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놀림감이 되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정반대의 상황도 있다. 이번에는 김할머니의 전문 분야인 낚시를 할 때였다. <삼촌이 생겼어요>(2009)에서 김구라의 아들 동현이와 함께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휘재, 왕석현 커플의 상대가 되어 낚시를 간 적이 있다. 낚시 매니아인 김할머니는 낚시 전문가로서 이휘재에게 낚시를 가르쳐 주기로 호언장담을 해둔 터였다. 그런데 넷이 함께 낚싯대를 꺼내 찌를 끼우는데 낚시의 대가임을 자임하던 김할머니가 그만 낚싯바늘에 손을 찔리고 말았다. 아얏! 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그러자 이휘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에 들어갔다. 무슨 낚시의 대가가 바늘에 찔리고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요? 실력을 의심하는 공격을 받았음에도 김할머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참는 게 더 이상한 거지!"

낚시의 대가도 낚싯바늘에 찔리면 아프다. 낚시의 대가도 낚싯바늘에 찔린다. 김할머니는 주눅 들 이유가 없었으므로 또 당당했다. 너무 당당해서 어이없다는 듯 웃는 상대방까지 어느 순간 슬그머니 그 논리에 설득 당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당당함에서 나오는 개그는 얼핏 보기에 막무가내 개그처럼 보여도 사실 그것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 있다.

7. 아주 무거운 삶만이 주조해 내는 깃털 같은 가벼움

2년 동안 방송된 <남자의 자격>에서 가장 '아름다운 개그'를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남자 그리고 아마추어'의 첫 번째 편을 들겠다. 남자의 자격 밴드를 위해 만든 곡 '사랑해서 사랑해서'를 멤버들에게 소개하고 처음 가르쳐 주던 장면에서 김할머니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종류의 개그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멤버들이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고 상을 받던 그 결정적인 순간보다 그저 흔한 에피소드처럼 흘러간 이 장면이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날 많은 개그가 쏟아졌지만 그중 절정은 김할머니가 기타로 C코드를 쳤을 때 등장했다. 김할머니가 신곡의 코드를 가르쳐 주려고 C코드를 치자마자 낯익은 사운드에 김국진이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다며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의 작품을 의심하는 말 앞에서도 김할머니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혹은 기분 상해하지 않고 다만 시크하게 말했다.

"야, 코드에는 주인이 없어."

이 말도 매우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웃기는 말이어서 명 개그로 자리매김했으나 그래도 여기까지만 말했다면 뮤지션 출신의 김할머니다운 개그로 끝났을 터였다. 어쩌면 이런 농담은 김할머니뿐 아니라 그 주변의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흔히 주고받는 업계 유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할머니는 결정적으로 여기에 아주 간단한 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했다. 바로 이 말이다.

"C가 니 꺼야?"

25년 동안 밴드를 해 왔으며 여러 히트곡을 냈으며, 때때로 '록의 전설'이라는 수식어를 이름 앞에 달고 다니는 김할머니가 기타를 고작 몇 달 잡아보았을 뿐인 친구에게 바로 그렇게 말했다. 딱 다섯 글자로 구성된 그 한 문장으로 김할머니는 오랜 세월 동안 아주 진지한 태도로 음악을 해 온 사람의 삶이 주조해 낼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유머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정확히 보여 주었다. 이런 가벼움은 얼핏 초딩 개그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주 무거운 삶의 저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가벼움이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다. 나는 이것이 김할머니의 유머가 흔한 듯하면서도 뭔가 색다를 수밖에 없는,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만큼 독창적으로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8. 천재적인 화술의 토대 - 이미지 중심의 기억 체계와 과감한 요점 정리

김할머니의 파란만장 인생사를 듣고 혹시 김할머니가 쓴 가사를 모아 보면 투팍 시집 비슷한 책이 한 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가사를 모아 읽어 본 적이 있다. 혹시 아름다운 멜로디나 보컬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가사 읽기에 방해가 될 세라 음악을 듣지 않고 가사만 먼저 보기로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투팍의 시집은 거기에 없었다.

김할머니의 가사는 언젠가 그 스스로 농담처럼 말했듯 "음악으로 들으면 아름답지만 가사만 따로 보면 말이 안 됐다" 김할머니는 그것이 자기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김할머니의 가사는 메시지나 스토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를 나열한 것에 가깝다. 여러 이미지들이 모여 한 곡 안에서 합쳐지면 그것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한다. 굳이 책으로 만든다면 시집이 아니라 화집으로 만들어야 하는 셈이다.

김할머니의 이런 이미지 중심의 기억 체계는 그의 화려한 화술의 토대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곧 말을 논리적으로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김할머니는 결코 논리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김할머니가 말을 잘한다는 평을 듣는 것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데에 탁월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김할머니가 토크쇼에 자주 출연하지 않아서 김할머니가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과거의 토크쇼를 보면 이미지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김할머니의 천재적인 이야기 솜씨를 볼 수 있다. 가장 감탄할 만한 것은 <놀러와>(2009)에서 볼 수 있다. 부활 초대 팬클럽 부회장이었다는 신해철, 부활 초대 보컬이었다는 김종서 등 친한 후배들과 함께 나와서인지 김할머니는 다른 어느 토크쇼에서보다도 더 편안하게, 더 많이 이야기를 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김할머니가 최고의 히트곡인 네버엔딩 스토리를 작곡할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였다. 가장 아름다운 히트곡은 가장 비참한 순간에 탄생했다면서 김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얼마나 비참했었는지를 김할머니는 이렇게 묘사(설명이 아니다)했다.

(곡이 나오지 않아서) 하루 종일 인상 쓰고 있으니까
와이프가 못 견디고 캐나다로 애들 데리고 도망갔어요.
혼자 있으니까 더 비참한 거야.
그때 집이 컸어요. 전셋집을 왜 그렇게 큰 걸 얻었어?
게다가 내 딸이 풍뎅이를 키우고 있었거든요.
걘 또 죽지도 않아요!

김할머니가 당시의 비참함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커다란 집과 죽지 않는 곤충의 딱 두 가지 이미지다. 함께하던 가족들이 없어 심리적으로 더욱 크게 느껴진 공간, 그리고 가족이 떠나 집안이 황량해져 버렸는데도 이와는 아무 상관없으므로 조금의 요동도 없이 살고 있기에 더욱 자신의 비참함을 환기시키는 곤충 한 마리로 당시의 비참함을 압축적으로 묘사해 낸 것이다.

남들은 그저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인생의 사소한 순간들을 포착해 내는 그 감수성과 관찰력도 놀랍지만 수많은 이미지 중 자신의 감정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결정적인 이미지를 포착하여 묘사해 내는 화술은 더욱 놀랍다.

이어진 이야기에서 김할머니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서 가진 또 하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김할머니는 평소에도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을 이야기하는 고도로 경제적인 화법의 소유자인데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장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김할머니는 꼭 필요한 요소만을 남겨 두는 것에 머물지 않고 때로 필요한 요소까지도 삭제하는 과감한 요점 정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사회자 유재석이 '사랑할수록'이 히트했을 때 그랜저를 샀는데 네버엔딩 스토리가 히트했을 때는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다소 예민한 질문일 수 있음에도 김할머니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저작권 협회에서 매달 돈이 나와요.
저는 전화기로 확인을 합니다.
전화기, 놓쳤잖아요! "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 이야기를 이만큼까지 요약해 내기 어렵다. 문장 사이사이에 목적어와 배경 설명을 해야 사실 더 깔끔하고 정확한 요약이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필요한 요소마저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제스추어로 표현하여 자신의 이야기로 순식간에 끌어들이는 능력이 김할머니를 논리적이지 않은데 말을 잘하는 독특한 이야기꾼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해 보자면 김할머니의 유머는 매우 예술가적인 스타일이다. 그것도 김할머니가 긴 세월 동안 하나하나 쌓아올린 하나의 세계 안에 있어 그저 우습지만은 않은, 독창적인 세계관과 경험 안에서 오랫동안 숙성된 종류의 개그. 그래서 짐짓 자학 개그를 하는 양 사람들이 마음 편히 웃게 만들지만 가만히 보면 다른 자학 개그의 마무리처럼 실제로 당사자가 망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웃음 끝에 진한 페이소스를 남길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김할머니가 예능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생존하고 있는 비결이다.

김할머니 같은 사람을 예능 프로그램이 더 많이 발굴한다면 거기에서 예능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가 또 하나 생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 웃다가, 웃다가, 웃다가 문득 웬만한 다큐에서 얻을 법한 페이소스를 얻고야 마는 그런 유머가 가득한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예능이 될까?  그러나 김할머니 같은 천재 개그맨이 세상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아니다. 한국 예능이 김할머니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김태원#남자의 자격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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