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체포되고 그의 범행행각이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서울과 경기 지역을 오가면서 무려 20여 명의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 자체가 이 사회에 충격을 던져 주기에 충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유영철이 피해자의 장기 일부를 믹서기에 갈아 마시기도 했고, 구속된 이후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이 태연하게 범행과정을 재현했다는 점이다. 경찰들은 여기에 분개한 피해자 가족들이 유영철에게 달려드는 것을 막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피해자 중 한 명의 친동생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자살하기도 했다. 유영철은 은퇴한 노부부, 거리의 상인, 유흥업소 여종업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범행을 했다. '연쇄살인범들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만 노린다'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유영철에게는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유영철 사건을 계기로 '연쇄살인범',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유영철 이전에도 연쇄살인범들은 있었다. 1년 동안 9명을 죽이고 8명에게 중상을 입힌 정두영을 포함해서, 70년대에 17명을 살해했던 '희대의 연쇄살인범' 김대두가 대표적인 연쇄살인범들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유명한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연쇄살인은 더 이상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범죄와 살인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연쇄살인범 역시 계속해서 생겨나는 모양이다. 이런 연쇄살인범들을 보면 몇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오른다. 연쇄살인범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왜, 어떻게 연쇄살인범이 되었을까? 경찰은 10명이 넘는 피해자가 생겨나도록 왜 이들을 체포하지 못했을까?
연쇄살인과 연속살인, 다중살인의 차이점베테랑 수사관이기도한 경찰대학 표창원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램덤하우스 중앙 펴냄)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우선 '연쇄살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표 교수는 책 속에서 여러 페이지를 할애해서 연쇄살인에 대한 정의에 다가가고 있다.
연쇄살인하면 흔히 '동일한 범인이 장소를 옮겨가며 시간차를 두고 사람을 계속해서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연쇄살인(Serial Murder)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위의 특징을 갖는 살인 중에는 연속살인(Spree Murder)도 있다.
연쇄살인과 연속살인을 구별하는 조건 중 하나는 살인과 살인 사이에 '심리적인 냉각기'가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한 차례 흥분이 시작되서 그 흥분을 유지한 채 여러 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연속살인이다. 80년대에 경남 의령에서 극도의 흥분상태에 빠진 우범곤 순경이 소총과 실탄, 수류탄을 챙겨들고 인근 마을을 돌며 56명을 살해한 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연쇄살인은 살인범이 살인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범행을 저지르고 나면 일시적으로나마 그 충동이 가라앉는 냉각기를 갖는다. 그리고 일정한 냉각기 후에 다시 살인충동을 느껴서 계획 끝에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냉각기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기간은 하루나 이틀 또는 한 주나 두 주가 될 수도 있다. 우범곤 순경의 사건은 살인과 살인 사이에 심리적 단절, 냉각기가 없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연속살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연쇄살인은 각각의 살인사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완결된 사건이다. 범인은 하나의 살인을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사전조사를 한 후에 범행에 나서고, 증거인멸 등의 과정을 거쳐서 현장을 깨끗하게 만든다. 그 후에 냉각기간을 거쳐서 벌이는 또다른 사건현장에서 이전 사건과의 유사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형사들은 동일범의 소생이라고 파악한다. 대신 우 순경 사건은 복잡한 현장검증이 없더라도 동일인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중살인(Mass Murder)이란 것도 있다. 한 명의 범인이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상을 증오한 김대한씨가 2003년도에 대구지하철에 휘발유통을 집어넣고 불을 붙여서 192명을 죽게 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런 조건들을 바탕으로 표 교수는 '한국의 연쇄살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동기나 계산없이, 살인에 이르는 흥분 상태가 소멸될 정도의 시간적 공백을 두고, 2회 이상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연쇄살인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 이유는 점점 늘어나는 연쇄살인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추가범행의 신속한 차단, 용의자의 특성 파악을 비롯한 특수 수사 기법의 사용, 숨겨진 범행의 발견, 예상 피해 대상 보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연쇄살인이 일반 살인과 다른 만큼 연쇄살인이 확인된 순간부터 특별한 조치와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노하우가 쌓이다보면 연쇄살인을 예방하거나 효과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저자가 묘사하는 연쇄살인범의 초상표 교수는 무엇이 연쇄살인범을 만드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연쇄살인범을 만든다고 알려진 여러가지 요인들 중 '어린 시절의 학대 등 충격적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이 제기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학대는 여러가지로 악영향을 미친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뇌기능이 손상되고 그로인해 감정이나 충동조절, 정서, 학습 능력 발달 등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는 다시 청소년기부터 다양한 대인문제를 유발시키며 극단적인 반사회적 성격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연쇄살인범 존 케이시는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정두영은 어린 시절에 엄마한테 두 번이나 버림 받고 고아원에 맡겨졌고, 고아원에서도 작은 체구 때문에 늘 폭행과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이렇듯 자아 정체감과 성격이 형성되는 12살 이전의 학대 등 어두운 경험은 연쇄살인범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인으로, 연쇄살인 등 흉악범죄의 원인이 되는 이상 성격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의 연쇄살인>은 이렇게 일반적인 이야기를 시작으로해서 그동안 한국을 뒤흔들었던 연쇄살인범들의 모습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영철과 김대두, 5명을 연속으로 독살한 여성연쇄살인범 김선자, 살인공장과 소각로를 만들어서 부자들을 납치해 죽였던 지존파,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라고 경찰에게 호소했던 정두영을 포함한 많은 연쇄살인범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책을 읽다보면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많은 연쇄살인범이 있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가 묘사하는 잔인한 살해방법과 피가 흥건한 범죄현장은 외국의 그 어느 범죄소설 못지않게 충격적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밤에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혼자 걷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뒤를 돌아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연쇄살인> 표창원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