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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장례식 장면 홍미화의 무대의상은 독특하다. 배우들은 그의 옷이 '둥지'처럼 편안하다고 말한다.
극중 장례식 장면홍미화의 무대의상은 독특하다. 배우들은 그의 옷이 '둥지'처럼 편안하다고 말한다. ⓒ 뮤지컬 서편제

"옷의 본디가 뭔지 아는 이라야 옷 짓는 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이치 모르면 옷 입는 이도 진짜 멋쟁이 되기 어렵고요."

패션디자이너 홍미화, 무슨 일에 열 받았을까? 지난 11월 초 사무실에 들어서자 들려온 전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 한 기자와 토론을 했다고 했다. 뮤지컬 <서편제> 의상 만든 일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 얘기 나누고자 만난 자리였지만, 먼저 그 '토론'에 관해 좀 더 듣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옷, 옷은 없고 로고만 있다?

송화의 옷 송화 역 배우 중 하나인 차지연은 이 배역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송화의 옷송화 역 배우 중 하나인 차지연은 이 배역으로 한국뮤지컬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 뮤지컬 서편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지, 어찌 꼬리가 강아지를 흔듭니까? 본디는 까먹고, 밖으로 드러난 트렌드 쫒기에만 급급한 이들이 행세하는 요즘 세상에 관해 기자분과 좀 길게 얘기 나눴지요.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왝더독' 그 영화 보셨어요?"

10년도 더 된 더스틴 호프만,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코믹터치 정치영화 <왝더독(Wag the Dog)>을 말하는 것. 주객전도(主客顚倒), 본질과 주변이 바뀐 황당한 상황에 대한 영어 표현이기도 하다. '옷'은 없고, 로고와 가격표만 있다는 얘기인가? 이 양반, 비유 매섭네.

옷을 옷으로 보지 않고 브랜드로 보는 세태라는 얘기다. 피알(PR)이 옷(본질)보다 더 비중있는 요소로 인식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요즘 자주 듣게 됐다. '마케팅만 잘하면 개나 소나 다 디자이너'라는 우스개도 나돌지 않던가. 익살이지만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얘기다.

이름 근사한 수입 호사품에 언론도 푹 절어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업계도 '앞잡이' 노릇으로 버는 빵부스러기 맛에 큰 것 다 내준다고 했다. '큰 것'이 뭐지? 그는 공분(公憤)의 솔직한 표현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공적인 분노, 우리 모두의 일에 대한 걱정을 말함이다.

상상하고, 그림 그리고, 옷본 뜨고, 재봉질 하는 옷 만드는 전 과정을 그는 다 해낸다. 손가락 끝까지 옷의 본디를 안다. 집을 짓듯, 옷을 '짓는다'고 하는 표현의 뉘앙스는 그의 뼛속까지 채워져 있다. 요즘 후배 '패션 디자이너'들에 대한 걱정도 있다. 공분 중 하나다.

"숨 안 막는 옷이면 좋은 옷 만들었다 생각"

배우와 의상 뮤지컬 서편제 출연 배우들과 그들의 의상
배우와 의상뮤지컬 서편제 출연 배우들과 그들의 의상 ⓒ 뮤지컬 서편제

홍미화는 최근 화제를 모았던 뮤지컬 <서편제>(이지나 연출, 윤일상 작곡)의 옷을 지었다. 한여름 두산아트센터에서 시작해 지난 7일 막을 내렸다. 뮤지컬 의상은 역시 이지나 연출의 <바람의 나라>(2006년)에 이어 두 번째다. 크고 작은 연극과 무용 의상은 자주 했다.

"숨은 들숨 날숨이고, 소리고, 노래지요. 목숨도 숨이지요? 끊어질 수 없는, 그러나 끊어질 숙명(宿命)을 지닌 예인(藝人)들의 얘기에 옷을 입히는 것은 그 아픔을 여러 밤 새워 몰래 맛보는 것이지요. 그 숨 안 막아야 한다는 것이 해답이었고요. 좋은 옷 만들었다 여기지요."

'어려운 일이었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옷 마르고 나서 한참 '병원서 쉬었다'고도 했다. 오래 그를 취재해 온 기자가 보기에 그는 시인이기도 하고, 무당이기도 한 것 같다. 좀 신기(神氣)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그의 옷에서 시(詩)가 보이는 것일까?

분장실의 디자이너 홍미화 씨가 공연 전 분장실에서 배우 임태경 씨의 출연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
분장실의 디자이너홍미화 씨가 공연 전 분장실에서 배우 임태경 씨의 출연 준비를 도와주고 있다. ⓒ 패션맵 강상헌

그가 뮤지컬 <서편제> 작품 해설집에 적은, 말하자면 '작가의 변(辯)'이다. 좀 길지만 토 달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는 게 나을 것 같다.

… 옷이 날갠디 고것이 숨을 막아뿔믄 쓰겄냐. 글믄 어찌게 내가 날아가겄냐. 숨은 소리의 본디여.

그 이쁜 여자 송화에게 옷 입히려고 얘기 시켜봤다. 숨을 살려 내라는 주문이었다.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서편제의 숨 가쁜 이야기 흐름, 그 안에서 디자인 얘기는 생뚱맞다. 그냥 우리 속, 숨에 묻어 나오는 대로 줄긋고 색칠하면 그것이 옷이겠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 품어 내는 것이 이 옷 짓는 이의 역할이다. 요즘 세상이 잊어가는 우리의 숨이 자연과 더 가까운 것이리라.

아름다운 것은 가슴 저미듯 슬프고, 숨이 넘어가도록 기쁜 것이다. 옥양목 한 조각만큼 작고 소박한 화폭에 기쁨을 함께 보듬는 일, 이지나 쌤 등 멋진 창작자들과 함께 숨 쉬는 일, 이 옷 만들면서 가슴 설렜기에 이 옷을 입은 배우들이 더 이쁠 것이다.

서편제의 장면들./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지만 관객들에겐 미래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그것들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내 옷이 자연이면 좋겠다.

'우리 숨'을 살려 내는 일,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내내 기뻤다. 세 번은 혼자 많이 웃었다. (홍미화의 제작노트)

"<서편제> 옷은 의미를 얹지 않고 덜어내며 비운 것"

그는 자신의 옷을 '원초적(原初的)'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프리카든 남미든, 아시아든 지구촌 여러 지역의 첫 사람들이 입었을 원래의 옷들은 어떤 모습일까? 대동소이(大同小異), 서로 닮은 점이 많았을 것이며, 이 지점이 바로 그의 옷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인류학의 원형(原形) 즉 프로토타입(prototype)의 개념을 이르는 것이겠다. 홍미화는 이런 뜻을 배내옷 짓듯 한다고 표현했다. 배내옷은 아기가 태어나면 입히는 옷이다. 깃도 섶도 없이, 자연의 섬유 그대로를 써서 자궁 속에서 만큼이나 편안한 옷을 지향한다는 얘기였다.

한국 사람은 한복 모양이라고 보는 그의 옷을 일본 사람, 또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네 옛날 옷 느낌으로 읽는 까닭이겠다. 서양 사람들 또한 배내옷의 개념을 놀라워한다. 한복을 지을지 모르는 그가 지은 옷에서 의외로 '우리의 숨결'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겠다.

이번 뮤지컬 <서편제>의 옷들은 원초적일 수 있는 이 배내옷이 원본임을 곧 알 수 있다. 홍미화는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을 자연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보이게 하는 옷"이라고 뜻을 말했다. 의미를 얹지 않는 것, 덜어내는 것, 비우는 것이 그의 <서편제> 옷이란다.

이 대목에서 앞서 언급한 '큰 것'은 우리의 정서(情緖), 정신세계, 생각의 틀이라고 말했다. 입고, 먹고, 깃들여 사는 의식주(衣食住)의 바탕이 제 것이 아니니, 그 마음자리 또한 수입품의 그것과 같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돈 말고도 더 큰 것도 잃고 있다는, '공분'이다.

"세상이 글로벌로, 지구촌의 의식으로 바뀐다 하지만 현실은 미국과 유럽만 따르는 서구화 일변도지요. 특히 의상과 장식은 더 그렇고요. 제 것만 좋다는 속 좁은 국수주의(國粹主義)도 밉지만, 줏대 없이 서구의 호사품만 추종하는 행색도 의젓해 보이지는 않지요."

이런 호사품을 명품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유감이 많다. 비싸면, 비싸서 명품인가? 그 '명품' 없이는 외출을 못한다는 우리는 누구인가? 특히 한국 겨냥해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드는 '대중명품'(매스럭스라고 한다던가)의 값이 유럽의 '진짜'보다 더 비싼 현실은 또 뭔가?

옷이 극에 맞아야 배우가 행복하고, 제대로 숨 쉬어
   
작업실의 디자이너 자신의 패션하우스 홍크리에이션 작업실에서의 한 때
작업실의 디자이너자신의 패션하우스 홍크리에이션 작업실에서의 한 때 ⓒ 패션맵 강상헌

옷이 극(劇)에 맞아야 배우가 행복하고, 그 '숨'을 제대로 쉬어낸다. 그 반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극(慘劇)이다. 아직 무대에 서는 이들의 의상에 관해 충분한 인식과 착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여러 관계자들에게 할 말도 많다. 그러나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그는 본다.

"배우가 편하고 행복하도록 옷을 지어줬다고 기쁘게 생각해요. 옷은 스스로 정서적인 환경,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 있지요.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도구이고요. 좋은 옷을 입었다는 자신감이 좋은 극을 짓는다고나 할까요. 무대의 배우들에게 옷은 둥지지요."

'서편제'라는 이야기의 애틋한 정서에 옷을 입히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연출자 이지나 씨의 담대함을 지지하고 싶기도 했다. 자신의 패션하우스를 경영하는 패션디자이너가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서 무대의상에 뛰어든 이유다. 큰 작업 마치면 항상 '성장'을 느낀다.

'내가 이 옷 만들었네'하고 나발 부는 것을 부러 피했다. 대개는 '의상 아무개' 이름표 넣고 마케팅하려고 이런 일을 맡는다. 이는 신진(新進)도 대가(大家)도 마찬가지다. 필자도 그래서 늦게사 알고 끝물에야 공연을 봤다. 역시 그의 옷은 숨길 수 없는 홍미화의 분신이다.

"내 옷이 가지는 좌표(座標)를 스스로 점검해 보고 싶었습니다. 아무 연줄도 없는 관객이 배우를 보고 어떤 정서적 교감을 가지는지, 내 옷이 그 소통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느끼고 싶었던 것이지요. '어머, 저 옷, 홍미화네' 수군거림이 들려왔을 때 기뻤지요."

'무식해야 용감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치열한 '쟁이'의 마음자리라는 것이다. 그는 이 수준을 좀 넘기도 한다. 뻔뻔하다 싶을 때도 있다. 어떤 때, 필자 기억에 외환위기 때, 그렇게 (회사가) 어려웠지만 말없이 내내 웃으며 재봉틀을 돌렸다. 참 씩씩한 여자다. 용감하다.

분장실에 가면 옷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온다. 아 맞다, 영락없는 홍미화구나. 이런 옷 만들 이는 그 밖엔 없지. 배우를 느끼지 못하고 송화를, 동호를, 유봉을 만나게 되는 이유겠다. 기자 노릇 아니면 이 묘미(妙味)를 알까? 일가(一家)를 이룬 그를 무대 뒤에서 다시 본다.

빈손에 어쩌다 들린 꽃 한 송이, 밤 새워 겨우 날려 보낸 비둘기 한 쌍. 그러더니 심기(心氣) 모아 빈손 펴면 장미 한 송이, 또 한 송이, 감은 눈 뜨니 손 안에 세상 담겼네. 오랜 연마 끝에 얻은 마술, 마법사처럼 그의 손끝에선 이제 옷이 웃는다. 그 손으로만 지은 옷이다.

"옷이 뭔지 이제는 알 것 같다"는 홍미화의 옷은 바늘로 빚은 한 줄 시(詩)다. 온갖 격정 다 녹아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널 패션맵(www.fashionmap.co.kr)에도 실렸습니다.



#홍미화 패션디자이너#뮤지컬 서편제#패션협회#수입명품브랜드#무대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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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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