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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박용만의 꿈은 장차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 활동을 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 둔전병을 이끌 핵심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소년병학교' 설립에 적극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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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병학교 열병식(1911년 헤이스팅스대학 교정에서)
소년병학교 열병식(1911년 헤이스팅스대학 교정에서) ⓒ 독립기념관

박용만이 주목한 것은 미국 독립전쟁시의 미니트맨(Minuteman) 제도다. 농사를 짓던 주민들이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즉각 총을 잡고 뛰쳐나와 영국군과 싸웠다. 그렇게 해서 끝내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박용만은 일본의 경응의숙에서 정치학을 2년 동안 공부했다. 그런 그가 조선의 독립이 과연 무력투쟁으로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외려 제국주의 열강들의 먹이가 돼 있는 조선의 앞길에 절망만이 가로놓였다고 좌절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 열강들의 정치역학을 배우면서 제국주의 생리는 오직 무력에 의해서만 작동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달은 것은 아닐까.

태프트와 가쓰라가 각서를 교환하면서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후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맥을 추지 못했다. 박용만의 집요한 무력양성이 통쾌한 결실을 맺지 못한거나 지나고 보면 피장파장 아닌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절정을 이루고 있던 시기 하소연 대신 무력항쟁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박용만의 고집은 궁극적으로 보면 유효한 것 아닌가.

1912년 하와이로 가기 전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박용만은 만주에 있는 손정도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와 소년병학교 사진엽서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가 불법 검열했다. 그걸 번역해서 일본 외무성에 보낸 게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손정도 목사는 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관여했고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기도 했다.

"(전략) 전번 하서(下書)에 논급하신 만주 식민책은 앞서 졸신(拙信)으로 다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장소, 지질, 지가 및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개소와 그 견적가격 등을 빨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현금 미국 서북 지방으로 향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소요(所要)의 첫째 목적은 형이 권고하신 식민책의 실현에 있습니다. 일의 성패를 감히 알 수 없사오나 오직 형의 원대한 계모(計謨)를 받아들여 이를 성취시키고자 하는 바입니다. (중략) 소생의 귀국은 어쩌면 1915년 이후가 될 것입니다. 1912년 10월 10일 손제(損弟) 박용만 배수(拜手) "

이 편지를 보면 손정도 목사가 한인들을 만주에 이주시켜 독립운동의 기지를 삼으려는 구상이나 박용만이 벌써 품고 있던 구상이나 같음을 알 수 있다.

박용만이 중국에서의 식민책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하와이에서만 둔전병 개념의 국민군단을 시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15년 후에는 중국으로 가 역시 둔전병을 도모하겠다는 끈질기면서도 원대한 계획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무력으로 원주민을 제압한 미국은 무력을 언제나 가까이 두는 습성이 있다. 네브래스카 주의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옷가게에 가면 군모에서부터 군화까지 군복 일체를 장만할 수 있었다. 건 스토어(총포상)에 가면 남북전쟁 때 쓰던 스프링필드 장총을 아무나 단돈 2불이면 살 수 있었다.

1860년대에 남북전쟁이 있었고 1889년 스페인과의 전쟁이 있었다. 그 화약 냄새를 잊지 않고 있는 미국 시민들은 군사훈련도 열심이었다. 대학에서는 모든 남학생들이 사관후보생 훈련과정(Reserved Officer Training Course)을 2년 동안 의무적으로 받게 했다.

전문적으로 군사훈련만 시키는 군사고등학교도 있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커니 고등학교에는 여군대대도 있었다. 여학생들이 목총을 메고 남학생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

박용만이 세운 '소년병학교'는 군사교육 과목들과 훈련시간을 따지면 군사고등학교 수준이었다.

박용만이 처음 '소년병학교'를 세운 1909년 경 커니 시는 인구 6000명 미만의 작은 도시였다. 그런데도 군사문화는 일상적이었다. 군복을 입고 군사훈련을 받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군악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게 빈번했다. 그래서 난데없이 동양에서 온 청년들이 '소년병학교'를 세우고 군사훈련에 들어간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박용만은 1908년 가을 학기에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들어가면서 ROTC 훈련을 받았다. 무력 양성이 코앞의 목표였던 그에게 그거야 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  아니었을까.

 네브래스카 주립대학 사관후보생 훈련단(ROTC)의 일원이었던 박용만. 셋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미국 청년들 보다 키가 작다.
네브래스카 주립대학 사관후보생 훈련단(ROTC)의 일원이었던 박용만. 셋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미국 청년들 보다 키가 작다. ⓒ 독립기념관

ROTC 훈련과정에는 야전에서의 전투훈련도 포함된다. 이듬 해 링컨 시와 오마하 시 사이의 애쉬랜드(Ashland)에서 야전훈련을 받을 때 박용만은 그 감상을 한시(漢詩)로 표현했다.

 從軍行 (종군의 노래)
己酉夏從美軍在艾蘇蘭城作  (기유년 여름 미군을 따라 애소란성에 있을 때 지음)

十里平郊一片城    십리 들판에 작은 성이 외롭고           
人家斷續路縱橫    인가는 드므드믄 길들이 종횡으로 났네
夕陽下寨分相守    석양에 경계를 나누어서 지키는데
特地安危卽我兵    특별지역의 안위가 아군에게 달렸네

野營杖劍獨巡軍    야영에 칼을 잡고 홀로 순찰하니
殘月疎星夜己分    달은 기울고 별은 듬성하니 한밤중이네
一步徘徊三步立    한 걸음 내딛고 세 걸음에 멈춰 서니
烽烟處處盡疑雲    곳곳의 봉화연기는 모두 구름인 듯 하고나

마지막 구절의 봉화연기는 야영장의 보초들이 피운 모닥불로 추정된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도 말과 글에 관심이 많았던 박용만은 '신한민보'와 '신한국보'의 주필로서 명문의 정치논설을 썼을 뿐 아니라 마음속에 스민 느낌이나 생각을 아름답고 선명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선비로서 문학적인 소양을 타고 났으나 시대가 급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군사적인 대응이었기에 그의 집념은 점점 문(文) 보다 무(武)에 더 기울어갔다. 決志修兵學(병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다)이라는 한시(漢詩)는 그의 결심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決志修兵學(병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다)

壯志平生好讀兵    장한 뜻으로 평생에 병서 읽기를 좋아하며
蒼磨一劍捧秋聲    칼날을 푸르게 가니 가을에 나는 소리 같고
互千萬古丈夫業    천만 년 예부터 장부의 사업이란
文武兼全然後成    문무를 아울러 갖춰야 이뤄지는 것이니라
     
소년병학교의 군복을 단정하게 입고 찍은 사진에 그의 단호한 결심을 드러낸 한시(漢詩)를 곁들인 박용만. '칼날을 푸르게 가니 가을에 나는 소리 같고'라는 구절이 서릿발 같기만 하다. 

 자신의 저서 '국민개병설'에 소년병학교 군복을 입은 모습과 자작시 '決志修兵學(병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다)'를 실었다.
자신의 저서 '국민개병설'에 소년병학교 군복을 입은 모습과 자작시 '決志修兵學(병학을 공부하기로 뜻을 정하다)'를 실었다. ⓒ 독립기념관

사진에서 박용만이 입고 있는 군복이 소년병학교 군복이다. ROTC 훈련생으로 입었던 군복과 다르다. 박용만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는 소년병학교 군복을 입었다. 소년병학교 군복은 가슴께의 주머니가 아주 크다. 이 군복은 스페인 전쟁 때 미 육군들이 입었던 것인데 미국정부가 불하품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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