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 포크 더 크루세더스, 임진강 임진강은 통한의 강이다. 휴전 직후, 양민들에게 임진강이란 고향을 지척에 놓고도 건널 수 없는 '통한의 강'이었다.
군인들에게는 정전협정이 발효된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던 '통한의 땅'이었다. 지금도 임진강에는 실향민들의 절규와 남북 간 군인들의 증오가 상존한다. 고향에 갈 수 없는 이들에게도, 서로 긴장하며 대치하는 군인들에게도 이곳은 '통한의 땅'이다.
2010년 3월, 통한의 땅 임진강에서 내려오다2010년 3월 어느 날. 나와 우리 전우들은 한낮에 임진강을 건너 내려왔다. 군용차를 타고 통일대교를 넘어가는 순간, 전우들은 소리를 질렀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13개월 동안의 GOP 생활이 끝난 것이다. GOP란 '일반전초'란 뜻으로 휴전선에서 남측이 관할하는 남방한계선을 지키는, 155마일(약 249㎞)에 이르는 경계초소를 말한다.
경계부대 교대작전을 수행하면서 생긴 피로와 스트레스는 이미 저만치 날아가고 없었다. 이제 다시 밤에 자고 낮에 일할 수 있다. 민간인들을 만날 수 있고 가족들을 볼 수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찾아오는 황금마차(이동식 PX)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언제든지 PX에서 맛있는 것들을 사먹을 수 있다. 물이 끊겨서 지뢰밭 앞에서 볼일을 볼 필요도 없다.
'내려간다'. 우리는 약 380일간의 작전을 이 생각 하나로 버텨왔다. 남자라면 다들 하는 군 생활이고 흔해 빠진 고생이라지만 임진강을 건너 내려올 때,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 험한 땅에서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1년을 보낸 내가 대견했다.
GOP는 민간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다. 지하수를 펌프로 퍼올려 물을 마시고, 당장 떨어진다 싶은 생필품도 어디 하나 구매할 곳이 없다. 언제나 몸을 스치는 풀들은 억세기 그지없고, 여름에 사정없이 물고 뜯는 얼룩모기들은 말라리아를 유발한다. 잠은 매일 2, 3시간씩 끊어서 자야 하고 휴전선 보강작업을 할 때는 이마저도 잘 수 없을 때가 많다.
겨울엔 야간 근무시간이 10시간을 육박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춥고 배고프고 졸린, 거지의 3요소가 그대로 실현된다. 그나마 우리가 운이 좋은 것은 서부전선의 끝이라 대부분 평지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덜 춥고 이동하기 편했다.
휴가 갈 때도 서울에서 가까웠다. 서해 5도나 중동부 전선에서 고생하는 전우들에 비해 우리는 매우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아무튼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도 전우들과 재밌게 지내다 보면 이런저런 추억도 쌓이는 법이다. 우리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GOP 근무가 싫었던 때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나오는 고단함이 아니었다. 대북, 대남 정책에서 생기는 남북 간의 분쟁과 갈등이었다.
MB정부의 대북정책, 솔직히 좀 불안했다
우리 부대가 관할하는 구역은 경의선 철도, 남북관리구역, 개성공단, 남북 출입사무소 등이 위치한 지역이다. 예전만 해도 이곳은 그저 분단을 상징하는 관광지 정도에 불과했지만, 내가 있었던 당시의 이곳은 남북교류의 상징 그 자체였다.
낮에 근무를 서면, 신 1번 국도를 통해 남측의 화물차들이 수시로 개성공단을 오고가는 것이 보인다. 처음엔 "저 차들 때문에 우리만 귀찮게 됐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1번 국도에 차들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더 바빠졌다. 북한이 개성공단 육로를 봉쇄한 것이다.
부산스럽던 출입사무소와 1번 국도는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을 강경노선으로 선회하고, 북한이 개성공단 봉쇄로 대응하면서 생긴 갈등이었다. 양측 모두가 민족을 위한 생각에서 내린 행동 같지는 않았다.
연이어 현대아산 근로자 유아무개씨가 개성에 억류돼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휴전선에 점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끝내 5월에 북한은 핵실험이라는 결정타를 날리면서 우리는 2주일 내내 비상근무에 돌입했다.
북한도 군사대비태세에 들어갔는지, 우리가 관측하는 북한 GP(경계초소)의 총안구가 완전 개방되어 있었다. 연대장님이나 대대장님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겠다"고 큰소리로 말했지만, 막상 초소에서 근무설 때는 불안했던 적도 많았다.
"죽어도 통일대교 남쪽에서 죽고 싶다." 이게 우리가 서로 하던 농담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갈등은 감지덕지다. 만일 1, 2주일만 더 늦게 철수했어도 우린 천안함 사태를 전방에서 몸으로 느꼈을 테니까. 같은 해 8월, 나는 무탈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전방에서 겪었던 두려움도, 상대를 향한 적의도 지금은 다 추억이다. 결과만을 생각하면 말이다. 동기들은 개성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거품을 물던데, 난 이곳이 아주 가끔 생각난다. 그리고 지금도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을 전우들이 걱정된다.
모쪼록 전방에서 철책선을 지키는 모든 장병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면 좋겠다. MB정부의 대북정책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모두에게 무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