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연중 특별기획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재하고 있다. 그 네 번째 대상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의 평화로운 합의'를 이루어낸 '사회협약의 나라' 네덜란드다. 미국식 소득의 양극화 없이 고용성장을 이룬 인간적인 모습의 사회협약모델을 심층취재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
글 : 구영식 기자, 사진 : 조명신 기자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혹시 '사회협약 모델'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에는 시위가 없을까?
사회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갈등'이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는 자신의 저서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산처럼, 2003년)에서 네덜란드 문화의 특성을 "항의와 불평의 문화라고 불러도 좋다"고 진단했다.
사회적 대화도 항의나 불평이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주 교수의 진단처럼 네덜란드인들은 "나는 항의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부류에 해당한다.
"싼 우체부를 고용하면 배달의 질이 낮아진다"
지난 16일 헤이그 중심가의 TNT 건물 앞에 1만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유럽 특송기업 2위인 TNT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던 우체부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우체부 일을 그만두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TNT는 1996년 네덜란드의 민영화 계획에 따라 국영 우체국인 로얄 PTT포스트와 호주의 특송기업 K.W. 토마스 트랜스포트가 합병해 만들어진 특송 및 우편 서비스기업이다. 그런 TNT가 지난해 비용절감을 위해 향후 3년간 1만1000명을 감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사측은 "고용을 보장할 테니 급여를 삭감하자"고 노조측에 제안했지만, 노조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감원을 결정한 것.
세계적인 특송기업인 TNT의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올해 발표된 TNT의 '2009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TNT의 매출액은 104억200만 유로를 기록했다. 이는 2008년 대비 6.7% 감소한 액수다. 또한 영업이익도 2008년에 비해 34%나 줄어든 6억4800만 유로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TNT는 오는 2012년까지 1만1000명의 인력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2015년까지 약 4억 유로의 비용을 절감한다는 계획이다.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우체부들은 반발했다. 이날 시위에 약 1만명이 참여한 것도 이러한 반발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준다.
시위에 참가한 한 크리프턴버르그(Han Kreeftenberg, 58)는 34년 동안 우체부로 일한 베테랑이다. 하지만 그는 오래된 자신의 일터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여 있다.
- 34년이면 우체부로 참 오래 일한 것인데. "내가 여기서 일했는데 이제 싼 사람들을 쓰겠다고 한다. 내가 했던 일을 더 싼 사람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편지를 배달하는 질이 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왜 사측이 이렇게 대량해고를 강행한다고 생각하나?"1998년에 회사가 (국가운영기업에서) 사기업이 됐다. 그때부터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했다. 게다가 이제는 다른 업체도 생겨나고 인터넷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 그만두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그게 문제다. 평생 우체부만 했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는 택시운전사로 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난 뭘 할지 모르겠다. 사측에서는 우편물이 30%나 줄어서 그만큼 사람들이 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래 일한 사람이 해고되면 질이 낮아진다.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도 있지만 아주 빨리 추진하고 있다."
- 해결책은 없나? "나이 많은 우체부가 많다. 그래서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현재 65세)까지 일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해결책이 없어 걱정이다."
얼마 전 다른 일을 찾기 위해 TNT에서 퇴사한 마리케 덴(Maryke Deen, 28)은 동료들을 응원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이 해고당하는 것을 보니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주 복잡한 심경"이라고 말했다.
"30년 동안 일한 우체부를 자르고 더 싼 우체부를 쓴다는 것이 좋겠나? 변화가 필요하지만 해고를 할 필요는 없다. 파트타임은 기본적으로 나쁘게 보지 않지만 우체부를 해고시키는 것은 나쁘다. 그 변화는 긴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금 받을 나이까지 일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협상의 여지가 없어 파업밖에는 방법이 없다"
네덜란드 노총(FNV)에서 일한다는 루드 코넬리사(Ruud Cornelissa, 52)는 "1만1000명의 우체부들이 그만두어야 하고 그중에서 3000명은 꼭 해고한다고 한다"며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가 '3000명 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라고 묻자, 그는 "일부는 파트타임으로 갈 것이고 나머지는 나이가 많아 연금을 일찍 받게 될 것"이라며 "더 일하고 싶지만 더 일찍 퇴사해 연금을 덜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파트타임이 많아져 사람들이 유연성 있게 일하는 것은 좋지만 30~40년 동안 일한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감원 계획을 발표할 당시에만 해도 다수의 직원들이 "고용이 보장된다면 급여 삭감 등 근로조건이 다소 나빠져도 감수하겠다"는 의견을 보여서 감원 규모와 방식 등에서 협상의 여지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노조원들은 노조의 '3000명 감원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사협의기구인 노동재단이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임금을 15% 삭감하자'는 제안도 내놓았지만 이것 역시 노조원들에 의해 거부됐다. 사회적 대화 체제마저 작동하지 않은 셈이다.
엘코 타스마 네덜란드 노총 선임정책위원은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어서 파업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노사 모두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TNT의 '우체부 대량 감원사태'는 민영화된 우정기업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운영할 때와 달리 사기업은 이윤율이 하락하면 '해고'라는 가장 손쉬운 비용절감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
갈등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경제적 위기와 중요한 사회경제정책을 놓고 노사 갈등이 생겼을 때마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갈등을 극복해왔다. 하지만 TNT의 '우체부 대량 감원사태'의 경우 노조의 제안은 물론이고 노동재단의 권고마저 거부당해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멀게는 90년, 짧게는 60여 년의 사회적 대화 체제의 역사를 가진 네덜란드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주목된다. 폴더모델의 핵심인 사회적 대화 체제가 또다시 시험대에 섰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네덜란드편' 특별취재팀 : 구영식 기자(팀장), 조명신 기자, 인수범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