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어떻게 먹어도 한 끼다. 편의점 모서리에 기대서 컵라면으로 한 끼를 때워도, 혹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각 코스별 요리를 거하게 마쳐도 주린 배를 채워 고픔을 잊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는 같다.
하지만 둘 중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행복하게 먹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우아한 칼질을 해도 원하지 않던 메뉴거나 동석한 이가 불편한 사람이라면, 바쁘게 라면을 들이켰지만 즐겁게 식사를 마친 이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빈속을 채우기 위해 기계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눈과 혀끝으로 전해지는 음식에서 피어오르는 각자의 사연들, 혹은 만드는 이의 정성을 음미할 수 있다면 그 한 끼의 영양은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질 것이다.
날이 추워진다. 몸은 무언가 뜨끈하고 얼큰한 것을 원한다. 바야흐로 '탕'의 계절이다. 기왕이면 넉넉한 양으로, 아련한 추억으로 먹을 수 있다면 더 흐뭇한 한 끼가 될 것이다. 거기에 가격까지 착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
북어집, 촌스럽지만 정직하다
경의선 능곡역 부근, 경의선 일대가 그렇듯 개발 진행 중이다. 복잡한 공사소음 속에서도 골목을 기웃거리면 80년대 교련복의 추억이 묻어나올 듯하다. 그 부근을 기웃거리면 발견하게 되는 가게 이름 <북어집>. 촌스럽지만 정직하다.
몇 개 안되는 탁자와 세월에 그슬린 의자들. 간판에서 느껴졌듯 메뉴는 단 한 가지, '북어탕'이다. 역시 긴 시간을 붙박았을 법한 할머니가 친절하지도, 딱히 쌀쌀하지도 않게 손님을 맞는다. 한 사람이니 묻지도 않는다. 북어탕 1인분이다. 가격은 4천 원을 유지하다가, 1천원이 올랐다고 한다. 그래도 준수한 가격이다.
머쓱하게 가게 안을 둘러 볼 시간도 없다. 곧 밑반찬이 나온다. 콩나물 무침이 짜지 않아 좋고, 마늘종 볶음은 무르지도 질기지도 않게 잘 익었다. 가장 좋은 건 총각김치 볶음이다. 물렁하게 볶아져 베먹는 맛이 있다. 물에 말은 밥에 먹으면 그만 일 것 같다.
밥도 함께 나온다. 많이 넉넉하다. 그런데 밥과 반찬이 담긴 그릇이 추억을 잡아당긴다. 예전 분식집에서 쓰던 추억의 그릇이다. 라면이나 떡볶이 한 접시에 서로 코를 처박던 옛 기억이 물씬하다. 뒤이어 나온 북어탕은 양은 냄비에 담겼다. 역시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온다.
"밥이나 반찬이나 먹고 더 드시라고. 국물도 더 줄 테니까."주인 할머니의 투박한 음성이 정겹다. 국물은 맑은 듯 칼칼하다. 북어 이외에는 건질 것이 없지만 끓기도 전 자꾸 떠마시게 된다. 그리고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북어 한 마리, 두 동강을 내 숟가락으로 살코기를 떠먹는다. 부드럽고 쫄깃하다. 다른 반찬이 생각 안 난다. 정신없이 먹는 일만 남았다.
3천 원에 즐기는 동태탕, 고봉밥은 덤
종로 3가 역 부근 뒷골목에 자리한 <부산집>은 우선 저렴하다. 동태탕이 단돈 3천 원이다. 착하고, 또 고마운 가격이다. 노인들, 몸으로 일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아무리 저렴해도 맛이 있어야 할 터. 멀건 국물만 나올까 싶은 기우도 한편 있었다.
그런데 '턱' 내려놓는 밥상에 그만 '헉' 하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밥이 그야말로 산이다. 국그릇에 담아 내왔다. 머슴밥의 곱절은 되어 보인다. '이걸 어떻게…'하는 생각부터 밀려든다. 그런데도 주인아주머니는 덧붙인다.
"
밥이나 국물이나 모자라면 얘기 하세요."동태는 큼지막한 것으로 세 덩이가 들어있다. 동태머리는 청하면 준다는 이야기가 생각났으나 이것만으로도 족할 듯하다. 국물은 얼얼하면서도 달달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조심스럽게 밥과 함께 먹기 시작한다. 함께 나오는 김치, 깍두기, 깻잎 등도 보통의 맛은 뛰어 넘는다.
그런데 국물이 먹을수록 얼큰하다. '맛있게 매운 맛' 이라는 고추장 선전문구가 절로 생각난다. 그러니 자연히 밥도 비우게 된다. 점점 고개를 숙이는 각도가 깊어진다. 딴 생각 없이 부지런히 수저를 놀릴 뿐이다.
잠시 후 배가 불러옴을 느낀다. 밥그릇에 아직 밥이 남아있다. 잠시 고민을 하지만, 땅에 버리느니 뱃속에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기어이 먹어 치운다. 일반 식당 같으면 밑반찬도 모두 비우겠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넉 다운이다.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넉넉한 밥 인심
북어탕과 동태탕 두 곳의 가게는 많은 면이 닮았다. 우선 현대적인 깔끔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가게 전경이 그렇다. 곳곳에 박힌 세월의 먼지가 누구에게나 반가운 것은 아닐 터. 굳이 논리적 방어를 하고픈 생각은 없다. 하지만 때로 한 끼 밥에는 영양과 칼로리로만 따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변론을 하고 싶다.
그리고 두 곳 모두 밥에 대한 애정이 있다.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추가된 밥값을 치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때로 "밥 더 드세요"란 한 마디가 전해주는 훈훈함은 불 잘 피운 난로처럼 따스하다.
아쉬운 것은 이런 가게들은 흔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지금도 사라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수치화 돼 가는 현실, 계량화 되지 않은 밥과 인심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 두 곳 모두에서 던지던 이야기들이 메아리로 들려온다.
"밥 더 안 드세요? 그럼… 국물이라도 더 드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