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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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퓨굿맨(A Few Good Men, 소수정예)'은 미 해병대의 모병 슬로건이자, 동명의 브로드웨이 연극을 롭라이너 감독이 1992년에 영화화한 법정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쿠바 관타나모 미해병대 기지에서 발생한 한 병사의 사망 사건과 그것을 둘러싼 진실을 밝혀가는 과정을 다룬 영화로 잭 니콜슨, 톰 크루즈, 데미 무어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죠.
부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던 산티아고 일병이 어느 날 선임병 두 사람에 의해 우리말로 '얼차려'에 해당하는 '코드 레드(Code Red)' 기합을 받던 중 목숨을 잃게 됩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선임병 두 사람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죠.
가해자가 분명한 이 재판에서는 이 살인사건이 '단순한 기합'에 의한 우발적 행위인지, 아니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조직적인 살인행위'인가에 대한 진실공방이 벌어집니다.
이 영화에는 두 종류의 군인이 나오는데, 해병대의 명예를 내세우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부대장 제셉 대령과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젊은 법무관 캐피 중위가 바로 그들이죠.
영화는 숨 막히는 법정공방 끝에 '진실이 밝혀지고 악인이 처벌받는'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를 따라갑니다.
한국 해병대의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결코 해병대를 택하지 않았다'는 구호 역시 미 해병대의 '어퓨굿맨'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원 지원병으로 구성된 해병대의 긍지와 정예 부대로서의 자부심이 잘 드러나고 있죠.
그런데 저는 최근 해병대 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재판을 지켜보면서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이른바 '해병대 성폭행 사건' 재판이 그것입니다.
해병대 고위 장교가 운전병 강제 성폭행 했지만...
지난 7월 23일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소속부대 운전병을 성폭행한 혐의로 해병대 제2사단 참모장 오아무개 대령에 대한 수사를 해군참모총장에게 의뢰하고, 소속 부대장에게는 피해자 이아무개(22) 상병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 등을 요청했습니다.
인권위가 결정문에서 밝힌 당시 성폭행 정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가해자 오 대령은 지난 7월 9일 오후 11시 55분경 군 휴양소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신 뒤 이 상병이 모는 관용 승용차에 타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운전병인 이 상병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뽀뽀해 달라, 안아 달라"라며 신체접촉을 요구했다. 이때 오 대령은 강제로 자신의 혀를 이 상병의 입에 넣어 핥고 입술을 깨물고 빠는 등 키스를 했으며, 이후에도 이 상병을 차량 뒷좌석으로 끌고 가 음경을 위아래로 흔들고 음낭을 조여 잡아 항거불능 상태에서 혁대를 풀어 옷을 벗기고 이 상병의 성기에 자신의 음경을 비비고 만지게 하는 등 모두 4차례에 걸쳐 강제추행을 했다."
사건 직후 정신적 충격과 극심한 수치심을 느낀 이 상병은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 대령은 그 후에도 이런 이 상병을 두 차례나 불러내 어머니에게 관련 사실을 말했는지 물어보고, 군대 내 사망 사고를 언급하며 "너도 죽을래?"하고 위협하는 등 비밀유지를 강요했다는 것이 이 상병의 진술입니다. 위협을 느낀 이 상병은 자신이 속해 있는 수송반 간부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고, 7월 13일 부대 측에 청원휴가를 신청해서 부대를 나와 외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 상병의 어머니가 진정서를 제출해 시작된 인권위 조사과정에서는 오 대령이 이 사건 이전에도 다른 병사를 성희롱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수송소대장 정아무개 중위를 비롯한 다수의 부대 관계자들이 "오 대령이 전임 운전병인 아무개 병장을 공관으로 불러 '안마를 하고, 더우니까 팬티만 입고 해라', '볼에다 뽀뽀하라'고 시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진술한 것이죠. 또 이들은 피해자 이 상병이 "항상 밝고 명랑하였고, 성실하게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였던 운전병으로 고위 장교를 상대로 허위의 진정을 할 병사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인권위에 의해 사건이 공개되자 해병대도 내부 감찰을 실시해 오 대령으로부터 일부 성추행 혐의 진술을 받아냈고, 당시 김태영 국방장관의 구속 수사 지시에 따라 지난 7월 24일 오 대령은 구속·기소 됐습니다.
피해자 이 상병은 지난 5개월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남성과 조금이라도 신체가 닿거나 군용품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발작을 일으켰고, 주치의는 이런 그가 군에 복귀하면 증상악화, 자해 및 자살시도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결국 군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판정을 받은 이 상병은 지난 9월 20일 의병 제대했습니다.
전쟁이나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고통을 느끼며 일상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참전 군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질환이지요. 이씨에게 가해졌던 성폭행의 충격이 그에게 얼마나 끔찍했던 경험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폭행당한 병사는 고통 속에서 보내고... 사건 재판은 불공정하게 진행
하지만 제대 후에도 이씨의 증세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11월 16일 해병대사령부 군사법원에서 열린 3차 공판에서 이씨의 이모부는 "(이씨가) 심부름을 시키거나 하면 길을 못 찾고 사람을 못 알아보고 숫자를 잃어버리는 등 (일상 생활에) 어려움이 크다"고 진술했죠. 이씨의 정신과 주치의는 그가 뇌의 이상이 아닌 정신적 충격 등 심리적인 이유로 나타나는 기억상실증인 '간헐적 해리성 기억장애'를 겪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씨와 가족들을 더 분노케 하는 것은 가해자 오 대령에 대한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정황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오 대령은 '피해자 이씨의 군복무가 불량하였고, 군대 내 왕따여서 군복무 시 물의를 일으켰다'는 등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스럽게 만들려는 시도라는 것이 가족들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또 오 대령은 자신의 변호인을 통해 계속해서 피해자가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피고인을 모함한다는 듯이 주장하고 있으며, 공판정에서 피해자의 이모부와 나눈 대화에서도 피고인의 변호인은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건 직후부터 이씨의 소속 부대는 관련 사실을 은폐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의혹을 샀습니다. 피해 사실을 보고받은 소속 대대장 임아무개 소령은 이씨를 직접 불러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며 사건 은폐를 강요했는가 하면, 부사단장 안아무개 대령은 이씨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오 대령을 지칭)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그 후배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며 "원만한 처리와 합의를 위해 사단장과 헌병대에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해 가족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구속되었던 오 대령은 지난 3일 군사법원의 보석결정으로 석방되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피해자 이씨를 지원하고 있는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피고인 오 대령에게 보석이 허가되면 군대 내 상급자로서의 지위를 이용한 증거인멸, 조작 및 피해자 등에 대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며 재판부의 보석결정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또 군인권센터는 오 대령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법원이 오 대령이 인권위 조사에서 작성한 진술서 및 문답서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판결이 오 대령에게 유리하게 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오 대령은 '인권위 조사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어 사실 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강변하고 있죠.
그런데 오 대령의 이 같은 주장은 선뜻 신뢰를 하기 힘든 진술입니다. 인권위는 형사소추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 수사권이 없는 데다가 오 대령에 대한 조사도 군 관계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이뤄졌다는 점 때문이죠. 또 인권위가 해군 참모총장에게 수사를 요청하는 결정문을 내기 전 오 대령이 인권위 소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조사관이 작성한 혐의 내용을 재차 인정한 것도 실제 성폭행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8일 피해자 이씨의 법률대리인은 피해자가 매우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오 대령에 대한 혐의를 강제추행에서 강제추행치상으로 변경해 줄 것을 해병대사령부 군사법원과 검찰관에게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지난 1999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상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을 감안한다면 재판부와 검찰관의 공소장 변경 요청 거부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 군인권센터 측의 판단입니다.
지난 21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군 검찰관은 오 대령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습니다. 통상 재판부의 선고는 검찰이 구형한 형량보다 가벼워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 대령이 이보다 중한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군 법무관 출신 변호사는 군판사 2명과 법조인 자격이 없는 심판관 1명이 재판부를 구성하는 군사법원의 특성상 심판관이 외압의 통로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실형이나 벌금형을 선고받은 모든 군사재판에서 선고된 형량을 해당 군사법원을 관할하는 관할관(사단장 이상의 지휘관)이 확인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량시킬 수 있게 되어 있는 점도 오 대령이 실제로는 가벼운 처벌만 받게 될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죠.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대한민국 군 현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해병대사령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피해자 이씨와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에 대한 폭언과 협박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씨가 해병대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글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피해자 이씨는 모든 해병대원이 그렇듯 스스로 원해서 해병대의 군복을 입은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성적 우수학생으로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았고, 4년 전액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해병대원이 된 후에 늘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랬던 이씨가 그날 이후 끔찍한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20대 초반의 이씨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그가 겪었던 기억들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까요?
군 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은 "피해자 이씨는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전역을 원치 않았지만, 군 당국이 마치 이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만들어 부대로 복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며 "이씨는 가해자 오 대령에 대한 적개심과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던 군에 대한 배신감으로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영화 <어퓨굿맨>에서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고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서 사건을 저질렀던 두 해병은 살인혐의에서는 벗어나게 되지만 결국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죠.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해병대원들의 뒷모습은 어쩐지 슬퍼 보입니다. 그런 해병들에게 법무관 캐피 중위는 한 마디를 던지죠. 바로 '군복은 벗어도 군인의 명예까지는 버리지 말라'는 충고였습니다.
저는 피해자 이씨를 비난하는 분들께서 한 번쯤 이 영화를 진지하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명예는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용기와 함께 그것을 개선하려는 의지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함께 깨달아주셨으면 하고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오 대령에 대한 선고공판은 오는 30일 오전 10시 30분, 해병대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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