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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열내복 딸애가 사 주었습니다
발열내복딸애가 사 주었습니다 ⓒ 김관숙

노란 은행잎들이 한창 바람에 날릴 때 김장을 해 넣고나서 옷장 깊숙이 두었던 면내복들을 꺼내어 다시 한번 빨아서 보송하게 챙겨 두었습니다. 내 딴에는 겨우살이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그 무렵 미사 끝에 만난 친구가 자기는 사위가 발열내복을 사다줬는데 어찌나 얇고 가벼운지 시험삼아 입고 한강둔치 걷기운동을 해봤는데 땀이 막 나더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영상을 웃도는 따듯한 날씨라서 내복을 입기에는 이른 때입니다. 이런 날씨에는 일반 면내복을 입고 걷기운동을 해도 등에서 땀이 막 흐른다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친구의 기분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좋겠네, 사위덕 보고…."
"발열내복 시대야, 한 벌 사입으라구."

그때 난 속으로 멀쩡한 면내복을 두 벌씩이나 두고 왜 또 그런 걸 사입어 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냥 웃기만 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추위가 오자 예쁘게 개켜 둔 보송한 면내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포근하고 따듯합니다. 그런데 십이월 초 쯤인 어느날 성당 로비에서 만난 그 친구가 또 발열내복 사 입었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발열내복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도 못했다고 하자 친구는 겉옷 소매를 훌쩍 걷더니 속에 입은 빨강 내복의 소매끝을 당겨서 보여 줍니다. 얇고 조금 윤기도 돌았고, 만져보니까 부드럽고 신축성도 있습니다. 요즘 발열내복 광고가 한창입니다. 최첨단 소재이고 보온성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그 기능이 몸에 입었을 때  나타날지는 몰라도 만져만봐서는 모르겠습니다. 면내복에 포근함이 하나도 느껴지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따듯한지 몰라."
"난 작년에 입던 면내복들이 새것처럼 멀쩡하거든. 이 삼년은 더 입어도 될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빨강 발열내복이 입고 싶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빨강내복이 그리워진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도 어머니도 빨강내복을 입었습니다. 나는 빨강내복이 촌스럽다고 투덜대고는 했지만 어머니에게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탓일까 빨강 발열내복을 보자 그 옛날에 빨강내복이 그리워지고 입고 싶어졌습니다.

그날 저녁에 택배 하나가 왔습니다. 받는 사람이 딸애입니다. 퇴근해 돌아온 딸애가 '발열내복 왔네' 하면서 택배상자를 풀었는데 빨강 발열내복 두 벌입니다. 딸애는 '엄마 아빠 입으세요' 하면서 요즘 발열내복 안입은 사람이 없다고 따듯하게 입으라고 합니다. 감촉이 아까 그 친구가 입은 것과 똑같았습니다.

신묘년 새해가 왔습니다. 자식들에 세배를 받고 신정 떡국을 먹은 다음 날인 일요일 미사 끝에 또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서로 새해 복 많이 받고 건강하라는 덕담을 나누었습니다. 나는 속에 입은 빨강 발열내복을 의식했습니다. 친구가 또 발열내복 사입었냐고 물으면 그때 친구가 하던대로 겉옷 소매를 걷고 속에 입은 빨강 발열내복의 소매끝을 당겨서 보여줄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는 며느리 자랑을 했습니다. 그것도 무슨 비밀이나 되는 것처럼 '너만 알라구' 하는 눈으로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우리 며느리가 지난 크리스마스 때말야 좋은 일을 했다구."
"무슨 좋은 일을 했는데"

나도 덩달아 작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무슨 이야긴지는 몰라도 그래야만이 될 것 같았습니다. 

"내복들을 모아서, 모두 새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두 세탁을 해서는 거기 가져갔다구. 지난 해에는 배추 파동도 있었구 다들 좀 어려웠잖아. 그래서 열다섯 벌 밖에 준비 못했대. 그래두 그게 어디야, 이 혹한에. 이젠 돌아오는 십이 월에나 또 무얼 모은다나봐."  

그제야 나는 작년 가을부터 친구가 나를 볼 때마다 왜 발열내복을 사입으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친구의 며느리는 몇 년째 아주 조용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일년에 딱 한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어려운 이들과 나눌 무언가를 친한 지인들에게서만 모으고는 한다는데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내복이었나 봅니다.

친구가 작은 소리로 말을 했던 것은 티를 전혀 안내고 조용히 봉사활동을 하는 며느리가 기특해서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을 했네.' 

친구의 말로는 새 내복은 기부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 내복을 기부받으면 부담도 되지만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누어 입는 것이 조금 더 의의가 있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친구와 그런 이야기를 하며 마주 서있는 내내 부끄럽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올해는 내 입장만을 생각지 말고 속 깊은 그 친구의 눈빛은 물론, 내 가족들의 눈빛도 제대로 읽어내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그런, 부끄럽고 마음이 불편한 일은 별로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발열내복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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