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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빨리 지나간다. 푸른 신록도 금세 황량한 겨울로 변한다. 겨울 대청호.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빨리 지나간다. 푸른 신록도 금세 황량한 겨울로 변한다. 겨울 대청호. ⓒ 한나영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에서)

소설가 김연수의 말대로 내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빨리 지나갔다.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벌써 이십 년 가까이 살고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집을 떠나 대학에 간 딸아이는 어쩌다 전화나 이메일로 안부를 물을 때면 내게 '노친' '노모'라는 말을 쓰곤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깔깔거렸고 즐거워했다. 늙은 어미라는 표현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고 서운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의미를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직은 그 표현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노모라는 말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 몸은 이미 '늙은 어미'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흰머리, 잔주름, 노안, 건망증 등.

그런데 내가 느끼는 이런 '노모' 증후군 외에 내 나이를 '늙었다'고 꼭 짚어 말한 사건을 겪고 보니 좀 묘했다. 내가 더 이상 청춘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중년도 아니고 노년이라고 하니 말이다.   

된장 담그는 '늙은' 엄마

지난 학기 이곳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 한류에 관심이 많은 미국인, 중국인과 교포 학생들이 이 과목을 수강했다. 이 가운데 호텔 경영학을 전공하는 교포 여학생 캐서린이 있었다.

캐서린은 졸업 후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호텔리어로 일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지난 여름,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큰 리조트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캐서린은 호텔리어 유니폼을 입은 당당한 모습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많이 올렸다. 캐서린은 요리와 예쁜 그릇, 인테리어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저는요, 동그란 모양보다는 네모난 모양의 그릇이 좋아요."
"이런 레스토랑 인테리어가 멋있어요."

바로 이 캐서린이 강의실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컴퓨터와 연결된 대형화면에는 유튜브에 올라온 '된장찌개 만드는 법' 동영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호박과 버섯이 둥둥 떠 있는 맛깔스러운 된장찌개를 보고 있노라니 금세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 먹고 싶어라. 고향의 맛 된장찌개!

진지하게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고 있는 캐서린에게 물었다.

"웬 된장찌개? 미국사람들에게 된장찌개 끓여주려고?"
"아니요, 이번 주말에 후배들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된장찌개를 끓여주려고요."

캐서린은 난생 처음 된장찌개를 끓이는 거라며 동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애들 중에는 '토종 한국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한국적인 입맛을 가진 아이들이 종종 있다. 아마 캐서린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된장찌개 맛있게 끓이려면 된장이 맛있어야 할 텐데."

요리 잘 하는 전업주부처럼 팁 한마디를 툭 던지니 캐서린이 즉각 대꾸했다.

"우리 엄마가 담근 된장이 있어요. 진짜 맛있어요. 그걸로 된장찌개 끓여주려고요."
"그래? 엄마가 된장도 직접 담그셔?"
"그럼요."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된장찌개 끓인다는 사람 보면 정말 부럽다. 나는 언제 한 번 된장을 담가보려나. 그동안 된장을 담글 기회도, 시간도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솔직히 된장을 담근다는 생각은 아예 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나와는 먼 얘기인 듯 해서.

그나마 어머니가 계시면 된장 담그는 법이라도 배우고 '어머니표' 집된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겠지만 이젠 그런 어머니도 안 계시니 집된장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슬프게도. 그런데 캐서린은 어머니가 직접 된장을 담그고 그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인다고 하지 않는가.

"와, 엄마가 직접 된장도 담그시고 대단하시네."

요즘은 한국에서도 된장을 직접 담그는 가정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먼 타국인 미국에서 직접 된장을 담가 먹는다고 하니 그 엄마의 정성이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 엄마는 늙었거든요. 그래서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그세요."

그렇지, 늙은 엄마라면 된장, 고추장 정도는 어렵지 않게 담그시겠지. 내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캐서린 말대로 나는 캐서린의 엄마가 연세 지긋한 '늙은' 엄마인 줄 알았다. 왜 그런 선입견이 있지 않은가.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근다고 하면 왠지 세월의 훈장 같은 주름이 얼굴 가득하고, 하얗게 서리 내린 흰머리로 쪽을 진 '할머니 같은 어머니'일 것이라는 그릇된 선입견 말이다.

그런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그리면서 나는 캐서린의 엄마도 그럴 거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페이스북에서 본 캐서린의 엄마는 내가 상상했던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 젊으시고만."
"아녜요, 우리 엄마 많이 늙으셨어요. 나이 많아요."
"그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

아, 할 말을 잃었다. 캐서린이 말끝마다 '늙었다'고 말한 엄마는 나와 동갑이었다. 세상에.

그런데 어쩌나. 나는 된장도 담글 줄 모르는데 이렇게 늙어버렸으니. 부끄러워라. 더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된장 담그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나이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캐서린의 늙은 엄마와 동갑인 '노모'는 아직 된장도 담글 줄 모른다. ^^ 작년 폭설이 내렸을 때.
캐서린의 늙은 엄마와 동갑인 '노모'는 아직 된장도 담글 줄 모른다. ^^ 작년 폭설이 내렸을 때. ⓒ 한나영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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