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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8.15 해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는 독립투사들.
8.15 해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는 독립투사들. ⓒ 독립기념관

"여운형과 안재홍은 친일경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물인데 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지 않는 거냐?" 뉴라이트 계열의 인터넷신문 <뉴데일리>와 보수신문 <조선일보> 등 보수세력들이 제기한 질문이었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대회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1945년 해방이 된 후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화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그 방법과 오차범위는 따져서 뭘 하랴. 이승만, 김구, 여운형 세 사람을 놓고 세 가지 설문을 했다.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33%가 여운형을 1위로 꼽았다. 최고의 혁명가로도 여운형이 1위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적합한 인물로는 이승만이 1위를 차지했다.

해방 1년 전 서울에서 여운형은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일본의 패망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한 건 1942년.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듣고 나서였다. 그해 4월 18일 동경을 강타하는 미군 폭격기들을 목격했다. 조선에 돌아온 다음 가까운 친구에게 넌지시 일본의 패망을 귀띔했다.

해방이 되던 날 여운형은 총독부 정무총감으로부터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 받았다. 하지만 해방정국을 강타한 것은 남북 분단. 그걸 막으려고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다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저격을 받아 운명했다. 8월 3일 그의 장례는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조객 60만 명이 몰려들었다. 당시 서울 인구가 90만이었으니 서울 시내 전체가 추모 인파로 덮인 셈이다. 

 여운형(1886-1947)
여운형(1886-1947) ⓒ 독립기념관

파리강화회담에 김규식의 파견을 주선한 것도 여운형이었다. 김규식이 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이었고 그 다음이 박용만이었으니 그는 박용만에 대해 알고도 남았을 게다. 여운형이 중국 유학길에 오른 건 1914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가 된 게 1918년. 다음해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 차장에 선출됐다.

박용만은 임시정부가 세워진 1년 후 상해를 처음 찾았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찬에 초대해 "저는 군사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외무총장 직의 면직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물론 여운형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을까. 또한 박용만이 1921년 4월 북경의 '군사통일주비회'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했을 때 상해에서 여운형은 안창호와 함께 맞장구를 치고 준비에 나섰으니 그 과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접촉이 많았을 터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그해 11월 일본정부는 여운형을 국빈자격으로 초청했다. 외무 차장이었고 임정 중심 세력인 그를 회유해 임정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여운형은 개인 자격으로 초청에 응했다.

여운형의 도쿄행에 대해 찬반 논란이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 1호'를 발표해 '개인의 이탈해위'로 반대했다. 한편 내무총장 안창호는 "괜티않아. 나라 팔아먹는다구 야단들이디만 팔아먹을 나라가 이시야 팔아먹디?"하면서 여비까지 마련해줬다.

일본에서 여운형은 국방대신, 내무대신, 체신성대신, 척식국장관 등을 면담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여운형이 방문했을 당시의 동경 중심가 마루노우치 풍경.
여운형이 방문했을 당시의 동경 중심가 마루노우치 풍경. ⓒ 미상(저작권해제)

"조선은 독립을 논하기 전에 우선 국부(國富)와 민부(民富), 체강(體强)과 지강(知强)을 길러 실력을 쌓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한 회사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 있는 다른 회사에 합병하는 것이 쌍방의 이익이듯 일한합병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고하염조 척식국장관의 말이었다.

"장관은 지금 한일합방을 회사합병에 비유하나 이는 절대로 옳지 않소. 회사는 모리(謀利)를 위해 성립한 것이지만, 국가는 사회의 실체요 역사의 장성(長城)이며 도덕의 존재요 사법의 실체이니 개인은 죽음이 있지만 국가는 영속하는 것인즉 국가를 개량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내 조상과 자손에 대한 의무로 돼 있지 않소이까? 그러므로 애국이란 의(의)가 있는 것이니 이익을 논하기 전에 먼저 국가를 위해서 이익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 아니오이까? 이런 의미에서 한일합방은 벌써 크게 부정한 것이라 하겠오. 동양의 단결과 평화를 생각한다면 조선독립을 가장 긴요한 문제로 다루어야 할 것이요."

여운형의 거침없는 반론이었다.

척식국장관은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얼을 빼앗긴 것이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가 떠날 때 "여운형 선생 만세!"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여운형을 초대한 내각은 후폭풍에 휩쓸렸다. "불령선인(不逞鮮人) 1호 인물을 일본땅에 불러들여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지라"는 여론 때문이었다.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하라 내각은 '여운형 내각'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해산되고 말았다.

1920년 1월 17일자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여운형의 활약은 '독립운동사에 있어 유례없는 성과'라고 평가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국무총리 포고2호'를 발표해 여운형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1929년 7월 그는 상해에서 야구 구경 중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약 3년 간의 옥고를 치른 다음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3년 후 신문이 정간되고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기 때문이다.

 1935년 9월말 조선중앙일보사 전용 경비행기로 백두산 탐방에 나선 여운형(맨 오른쪽)
1935년 9월말 조선중앙일보사 전용 경비행기로 백두산 탐방에 나선 여운형(맨 오른쪽) ⓒ 조선중앙일보(저작권해제)

1937년 봄서부터 여운형은 자주 일본을 방문했다.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일본 고위층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유학생들을 만나면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1941년 중국에서 국공합작으로 일본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여운형을 초청해 휴전협상이 이뤄지도록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일본정부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다섯 번 여운형을 동경에 초청했다. 그는 화평협상에 협조할 듯 말 듯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됐다.

해방 이후 그가 일제에 협력했다는 게 문제가 됐다.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후 경성요양원에 입원 중 전향서를 썼다는 것도 지적됐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그의 이름으로 '학도병권유문'이 몇 차례 실린 것도 문제됐다.

1942년 12월 여운형은 '유언비어죄'로 투옥된 적이 있다.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다음 해 7월 출옥했으나 경성요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담당검사가 사상전향서를 들고 와 날인할 것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의 악화된 건강을 염려한 가족에 의해 대신 도장이 찍혀졌다.

이어서 <경성일보> 일본인 기자가 와서 여운형을 면담했다. 당시 같은 사회부 기자였던 조선인 기자는 1946년 2월 13일자 <민주중보> 신문에 여운형이 학병권유를 했다는 <경성일보>의 기사는 조작됐음을 밝혔다.

1942년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듣고서 여운형은 이미 일본의 패망에 대한 감을 잡지 않았던가. 동경에 퍼붓는 미군기의 폭격을 보고 굳게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 확신 때문에 후일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내오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출옥 후 <경성일보>에 학병권유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는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동맹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친일행위자가 아님"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보수 우익은 이에 항의했다. "반일 후 친일은 기록하지만 친일 후 반일은 다른 문제다"라는 게 '친일진상규명위원회'의 설명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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