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반정부 시위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31일 현재 7일째로 접어든 성난 시민의 시위가 잦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세계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상황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정부의 통행금지령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군은 정치적 계산을 하면서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시위는 수도인 카이로와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주요 대도시로 확산했고 시민의 공격을 받은 경찰은 치안에서 손을 뗐다. 외신에 의하면 지난 29일 현재 사망자 수는 100명을 넘어섰고 부상자들은 병원으로 밀려들고 있다.
분노한 시민 "무바라크와 부패 정치인 떠나라"대규모 시위는 지난 토요일 일련의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시위대의 압력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은 내각을 총사퇴시켰고 81년 자신이 집권한 이래 처음으로 부통령을 임명했다. 이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 가말에게 정권 이양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통령으로 임명된 오마르 술레이만에게 정권을 이양할 계획을 세웠다는 걸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이런 정치적 선택은 심각한 상황을 인식하고 성난 시민을 달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고양하며 대통령으로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뜻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면서, 시위대에게 국민의 바람은 공적, 사적 재산 파괴와 폭력이 아닌 대화와 노력으로 성취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 일간지 <옵저버> 기자가 일요일(한국 기준 30일) 카이로에서 만난 시민들은 "내각 퇴진과 부통령 임명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 거부는 오히려 시민의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라고 분노했다.
택시 운전기사 마흐무드 모하메드 이맘(26)은 "무바라크 말은 공허한 약속과 거짓말이다, 그가 구성한 새 정부는 도둑들로 가득 차 있다"며 "옛 도둑이 나가고 나라를 약탈할 새 도둑이 들어온 꼴이다, 이번 사건은 굶주리고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의 혁명이다"고 말했다.
사회운동가 호삼 하리디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담화는 이집트 국민의 바람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우린 독재자를 제거하길 원한다, 내각 사퇴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다"며 "우린 무바라크가 떠나길 원한다, 또 정부와 의회의 부패한 정치인도 모두 떠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한 거리의 시민은 높은 실업률, 인권 탄압, 부패하고 취약한 민주주의 등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무바라크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부르카를 쓴 아주머니, 찻집에서 만난 노인, 아저씨들 틈에 섞인 청소년, 젊은이와 행진하는 평범한 주부 모두 81년 이래 30년간 집권하면서 독재 정권을 유지해 온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넘치는 시민 열기... 하지만 불안감도 커지네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집트 시민의 시위 모습은 다른 나라 사람이 보기에는 지금까지 많은 곳에서 있었던 대규모 반정부 시위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집트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역사적인 사건이다. 시민은 의미 있는 변화에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기쁨과 자부심에 넘친 모습으로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이들은 영어로 쓴 구호를 흔들면서 세계를 향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세계인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미국은 무바라크 정권 지원을 중단하라!""무바라크는 끝났다!""무바라크, 떠날 비행기가 준비됐다!"
자부심과 자신감에 찬 이집트 국민의 모습을 지켜보는 전 세계 시민과 언론도 무한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발적인 동기가 아니라 튀니지의 시위에 자극받아 촉발된 시민 저항이 과연 30년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아니 최소한 진정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다.
전문가들 역시 이집트 시민 저항이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현재로선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변화를 담보할 사회적 역량이나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지적하면서 간접적으로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시위가 무바라크 대통령의 장기 독재에 분노한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점이지만 정치적 변화 방향을 제시할 지도부가 없다는 것은 조직화하지 않은 시민 저항의 취약점이다.
또한 30년 독재 동안 무바라크 대통령이 정적을 철저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무바라크 정권이 몰락한 후 정치적 공백을 메울만한 역량 있는 지도자나 정치적 집단이 드러나지 않는 것도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둘째,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치안 문제가 큰 문제로 대두하고 그에 따라 시민의 불안이 커가고 있다는 점도 시민의 시위 참여가 더 증가할지 의구심을 들게 한다. 경찰이 주요 도시에서 치안 활동을 중단하고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군대가 시위를 관망만 하면서 약탈이 계속되자 주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몽둥이, 칼, 심지어는 총까지 들고 나왔다.
미국 등 서방 국가가 '무바라크 퇴진' 언급 않는 이유또한 카이로 남부의 감옥에서 1천 명 정도의 죄수가 탈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민의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이집트를 떠나기 원하는 자국민들을 위해 전세기를 보내겠다고 말했고 터키 또한 자국민 수송을 위해 비행기를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셋째, 국제사회는 정치적 공백과 그에 따른 혼란을 우려해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원치 않고 있다. 현지 시각으로 지난 토요일 주요 서방 국가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폭력 진압을 중단하고 정치개혁을 단행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은 이집트에 대한 막대한 지원금 중단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했고 선택은 이집트 국민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동에서 미국의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동맹인 무바라크 정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공동성명을 발표한 영국, 프랑스, 독일 지도자들 역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라고 요청했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퇴진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들 서방 국가들 모두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 후 뒤따를 수 있는 정치적 공백과 그 탓에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고 있으며 중요한 정치적 동맹을 잃는 것도 원치 않고 있다.
이집트 사람에게 이번 대규모 시민 저항은 30년 만에 맛보는 진정한 자유와도 같다. 그러나 시위가 장기화하고 치안 부재로 침묵하고 있는 다수 시민의 불안이 커지면서 시민 저항이 계속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번 사건이 진정한 변화는 가져오지 못한 채 다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의 열망 표출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정치적 변화는 이미 시작됐고 이번 기회로 점진적인 정치적 변화와 성숙한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시민의 역량은 한층 더 축적됐을 것이다.
이번 시민 저항이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으로 이어질지는 현재로선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9월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집트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를 뽑을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