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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6일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아내를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혼자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KBS FM에서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방송되는 시간이었으니 저녁 8시가 안되었다. DJ 전기현이 삶의 깊은 내면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약간 잿빛의 허스키한 낮은 목소리로 클래식을 들려주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허전함과 본 방송 진행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청취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흩날리는 눈송이가 불나비처럼 쉼없이 라이트 불빛 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그날 들었던 영화 '사랑의 은하수' 중에서「Theme from Somewhere in Time」과 Bach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알 수 없는 미로를 달리고 있는 것 같은 내 마음과 겹쳐 클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방송이 마무리 될 즈음 DJ가 책 한권을 소개해 주었다. 포리스트 카터가 지은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다. 나는 다음날 서점에 들러 그 책을 구입했다. 1976년에 초판이 간행된 아주 오래된 책이었으며, 우리나라에는 조경숙에 의해 1996년에 처음 소개되었다.

책의 내용은 인디언 소년의 순수한 시선으로 인디언의 세계와 세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영혼이 따뜻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어느날 산속을 걷다가 매가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인디언 소년 어린나무가 슬퍼하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이치란 거야.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흑표범인 파코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또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이런 말도 들려준다.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 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 뺏기기도 하지. 그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뒤록뒤록 살찐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 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고 나면 또 길고 긴 협상이 시작되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그 욕심많은 사람들은 인디언 거주지역에 총으로 무장한 채 말을 타고 나타나 깃발을 꽂고 1838~39년 사이에 1만 3천여 명 정도의 인디언들을 차례로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1300㎞의 행진 중에 추위와 굶주림, 질병 및 사고 등으로 무려 4천여 명 정도의 인디언이 죽었다고 하니 순수한 영혼을 가진 인디언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겪어야 했으며, 사람들은 그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고 불렀단다.

할머니는 어린나무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헤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 상대를 이해하는데 마음을 쓰는 것뿐이다. 게다가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는 걸 그만두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영혼의 마음도 더 커진다.'

인디언 출신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1991년에 제1회 애비상을 수상했는데, 전미 서점상 연합회가 설정한 이 상의 선정기준은 판매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책이라고 했다. 한 번 읽고나면 결코 이전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지금은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다.

나는 책을 구입해서 한달이 넘도록 쥐가 쌀 둑을 파먹듯 조금씩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과 생활의 지혜를 채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도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때는 뭔가 놓친 것 같은 허전한 마음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나이가 드니 성공담이나 생활의 지침서보다는 이렇게 오랫동안 감동의 여운이 남는 책이 좋다. 이 책을 접하도록 소개해준 전기현님 고맙습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2014)


#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책#포리스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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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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