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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辛卯)년 정월 대보름(17일)날 아침에 눈을 뜨니까, 밤새도록 내린 눈으로 세상이 온통 하얗더군요. 그래도 눈이 비로 바뀐다는 두 번째 절기 우수(雨水)를 이틀 앞두고 있어서인지 날씨는 포근했습니다. 눈도 일찍 녹았고요. 

대보름날은 밥을 아홉 번 먹는 날이지요. 그런데 아침도 먹지 못하고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나포 십자뜰 풍물패' 단원들이 오전 10시부터 집집을 방문, 잡귀를 쫓아내고 복을 빌어주는 풍물굿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월 대보름에는 가난한 집도 오곡밥을 해먹었고 부럼 깨기, 더위팔기, 연날리기,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등을 했는데요.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풍물굿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명을 돋궈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잔치였습니다.    

대문을 나서는데 장구·징·북 등이 꽹과리 소리에 맞춰 질서 있게 두드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습니다. '풍물패', '풍장꾼' 듣기만 해도 신 나는 낱말들인데요.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평온을 비는 풍물굿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마을 슈퍼 앞에서 풍물굿을 신 나게 펼치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마을 슈퍼 앞에서 풍물굿을 신 나게 펼치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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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뜰 풍물패는 면사무소를 시작으로 태평양슈퍼, 파출소, 경로당 등지에서 풍물굿을 벌이고 회원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나포 면장님과 기념촬영을 마친 풍물패가 슈퍼 앞에 도착하니까 주인아주머니는 박카스를 내오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평일이고, 오전이어서 길에 사람이 없었는데요. 면사무소에서부터 풍물패를 따라다니는 꼬마가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힘겹게 끌면서 따라다니는 모습이 어렸을 때 저를 보는 것 같았는데요. 풍물굿이 무척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나포 파출소 박종대 소장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풍물패 단원들을 웃음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나포 파출소 박종대 소장이 사무실로 들어가는 풍물패 단원들을 웃음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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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패가 마을 파출소에 도착하니까 슈퍼 앞마당에서부터 "잘한다!"고 추임새를 넣어주던 박종대(60) 소장이 문 앞까지 나와 환영해주더군요. 건강에 좋을 거라며 장구를 배우고 싶다고 얘기하는 걸 보니까 풍물을 무척 좋아하는 분 같았습니다.

파출소 사무실에서 한 판 벌이고 나오면서 "신묘년 새해에도 사건, 사고 하나도 접수되지 않는 파출소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하자 박소장은 "풍물패 발전을 기원합니다!"라는 덕담과 함께 작은 격려봉투도 건네주었습니다.

이웃마을 신성리에 사는 김점이 아주머니는 연습할 때 굿거리가 잘 맞지 않아 걱정되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연습했더니 그런대로 맞아서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풍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풍물은 상쇠의 꽹과리를 시작으로 징, 장구, 북 등이 연주하는데요. '운우풍뢰'에서 뢰(천둥)에 해당하는 꽹과리, 풍(바람)에 해당하는 징, 우(비)에 해당하는 장구, 운(구름)에 해당하는 북의 조화는 조상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노인들이 다니는 경로당과 게이트볼장을 지나 문화마을로 들어섰는데요. 평소에는 공용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추수철인 가을에는 나락도 말리는 공터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한바탕 벌이고 최남식(81) 할아버지 댁으로 갔습니다.

신 나는 굿거리 마당을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꼬마. 여섯 살이라고 하더군요.
 신 나는 굿거리 마당을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꼬마. 여섯 살이라고 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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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식(좌측) 할아버지가 풍물패 회장에게 덕담을 건네시는 모습.
 최남식(좌측) 할아버지가 풍물패 회장에게 덕담을 건네시는 모습.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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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들어선 풍물패가 우질굿으로 시작하는 첫째 마당, 오방진으로 시작하는 둘째 마당, 굿거리로 시작하는 셋째 마당 가락을 적절히 조화시키면서 만수무강을 빌었는데요. 교회 권사인 최 할아버지는 신 나게 펼치는 풍물굿에 만족을 표시했습니다.

방안에 있던 할머니가 최 할아버지를 부르니까 들어가시더니 큰 함지에 쌀을 담아 내오셨고, 저에게는 하얀 봉투를 건네주시더군요. 풍물패 '지게꾼'으로 아셨던 모양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도깨비 가면을 쓴 말뚝이와 수염을 붙인 흉내 낸 양반이 풍물패 앞에 섰고, 거둔 쌀과 보리를 지고 다니는 지게꾼이 따라다녔거든요. 

배고픈 줄 모르고 풍물패를 따라다녔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풍물패는 마당에서 성주님에게 만사형통을 빌었고, 우물가에서는 칠년대한 가뭄에도 물이 솟구치게 해달라고 빌었고, 부엌에서는 조왕신에게 만수복덕을 빌었습니다. 창고와 측간(화장실)도 빼놓지 않았지요.

집에 찾아온 풍물패를 향해 손을 모으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최점순 총무,
 집에 찾아온 풍물패를 향해 손을 모으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최점순 총무,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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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희(65세) 풍물패 단장이 주민이 정성스럽게 내놓은 쌀을 포대에 담고 있습니다.
 한재희(65세) 풍물패 단장이 주민이 정성스럽게 내놓은 쌀을 포대에 담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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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에 만들어진 십자뜰 풍물패는 40대-70대 남녀로 이루어졌는데요. "잡귀야 물럿거라, 풍물패 납신다!"를 외치면서 회원들 집을 찾아 부부애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좋아지라고 기원했고, 집주인은 정결한 소반에 촛불을 밝히고 두 손을 모으고 복을 빌었습니다.

소반에 내놓은 쌀은 포대에 담아갔는데요. 한재희(65) 풍물패 단장은 대보름날 모은 쌀은 훗날 마을 행사가 있을 때 떡이나 밥을 해서 나눠 먹을 거라고 하더군요. 회원들이 내놓는 쌀과 봉투는 밥 열 술이 한 그릇 된다는 '십시일반'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지금이야 쌀이 창고에서 썩을 정도로 흔하지만, 3끼 죽도 먹기 어려웠던 옛날에는 풍물패가 집에 오는 게 두려워 풍장소리가 들리면 집을 비우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내놓을 쌀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 어른들은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농협 앞마당에서도 풍물을 신 나게 울리면서 무사고 점포를 기원했습니다.
 농협 앞마당에서도 풍물을 신 나게 울리면서 무사고 점포를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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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마을 ‘원서포’에 도착 공동우물을 돌면서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이웃마을 ‘원서포’에 도착 공동우물을 돌면서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나포 십자뜰 풍물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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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패는 농협 사무실에 들러 신묘(辛卯)년도 무사고 점포가 되기를 빌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온 풍물패는 앞마당에서도 신명 나게 한판 벌였는데요. 직원들은 상쇠를 따라 달팽이 모양과 태극 모양으로 돌면서 흥을 돋우는 풍물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차를 타고 이웃 마을(서포, 신성리)로 이동해서 공동우물, 당산나무, 공장 창고 등을 돌면서 액을 물리치고 복을 빌었는데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풍물'은 공동체 삶의 체계에서 벌어지는 가장 즐거운 잔치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산업사회 열풍과 다문화 사회로 바뀌면서 민족의 전통 명절 정월 대보름의 개념이 도식적으로 변하고, 세시풍습이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운데요. 설날부터 대보름까지 마을을 울리고 다녔던 신 나는 풍장소리가 그리운 밤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월 대보름, #풍물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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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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