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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사는 고향은 순천. 나로도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다가 주말만 되면 물 만난 고기마냥 집으로 향한다. 알을 낳으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귀소본능처럼. 집으로 가는 금요일은 본능적으로 즐겁다. 하지만 즐거움은 한때. 주말은 금방 가고 나도 가야 하는 시간.

버스터미널로 갔다. 나로도 직행은 하루에 6대. 지나간 주말에 대한 아쉬움을 바닥에 뱉어내며 버스를 기다린다.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저기요. 저~"

순간 세 가지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쳤다.

'어, 뭐지? 혹시 여자한테 헌팅? 아니. 아닐거야.. 그럴리가 없어.'
'그럼 지갑이나 표를 떨어뜨렸나. 내가 아까 표 사고 주머니에 잘 넣었는데.'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말한건가?'

어쨌든 고개나 돌려보자. 중고생 같아보이는 여자얘였다. 낯을 많이 가릴 듯 했다. 앳되보이는 외모와 꾸미지 않은 얼굴. 꾸미지 않았다기 보다는 초췌했다. 가출한 아이로 보였다.

"무슨 일이죠?"
"저기, 저. 제가 진주를 가야 되는데. 지갑도 없고 해서... 그래서..."

항상 같은 패턴이다. 집에 가야 한다. 그런데 하필 그때만 지갑이 없다. 돈도 없다. 낯선 타지라 아는 사람도 없다.

"돈이 없어요? 여기는 왜 왔는데?"

약간 쌀쌀맞게 대답한다. 거짓말 할 거면 그냥 가시라는 눈빛도 담았다.

"저, 친구 집에 왔거든요. 이제 집에 가야 되는데…."

친구 집에 올 때는 돈이 있었는데, 갈 때는 돈이 없단다. 친구가 다 뺏어갔나? 그렇다면 친구가 아니라 웬수지.

"친구한테 한번 전화해봐요. 확인 좀 해보게."

핸드폰을 살짝 만지작거리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다시 내려놓는 여자아이. 그리고 힘없고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한의학적으로 따지면 성음저미(聲音低微), 즉 목소리가 낮고 미약하다. 원인은 비기허(脾氣虛), 소화기의 기운이 없다는 것이다. 아침도 제대로 안 먹고 나왔을 것이다.

"안되겠어요. 이런 얘기 못하겠어요."

"이렇게 자꾸 확인해서 미안한데, 워낙에 이런 사람들이 많아서. 알죠? 그럼 진주 사는지 확인 좀 할께요. 부모님한테 전화 해봐요."

이번엔 핸드폰을 만지는 시늉도 없다.

"안돼요. 부모님 아시면 안 돼요."
"왜 안 되는데?"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어봤다.

"혹시 가출?"
"다른 데 가는 거 되게 싫어해요. 말하면 아무 데도 못 가요. 이번에도 말 안 하고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가출이지. 하룻밤 친구집에서 잔 건 어떻게 둘러댈 건데?'

이번엔 학교를 물어보았다.

"중학교 어디 나왔어요?"
"경희여중이요."
"진주에 경희여중이 있어요?"
"네."

점점 의심이 든다. 서울에 있는 경희여중을 대놓고 베끼다니.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이 나오는 게 뻔뻔하기까지 하다.

"초등학교는?"
"만경초등학교요."
'만경강 따라서 지은건가? 만경강이 진주 쪽에 있던가? 전라북도에 있는 거잖아'

이번에도 바로 대답이 나왔지만 의심은 깊어갔다. 어떻게 할까? 아예 안 도와줄려면 처음부터 말을 끊었어야 하는데. 수렁 속에 빠진 느낌이다. 여자아이의 기억 속에 돈 뜯어내기 힘든 철면피 남자로 남아볼까? 그래. 돈으로 주지 말고 표로 주자.

"진주 한 장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표를 줘도 크게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 괜히 후회가 된다. '너가 내성적인 성격이어도 이럴 때는 좋아해봐라.' 무엇을 하든 자신감은 중요하다. 설령 이 친구가 거짓말을 한 거라도 이럴 때는 좋아하는 표정을 지어주길 바랐다. 모든 게 어설펐다. 하다못해 도둑질을 하더라도 어리버리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짜증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영화 <엔트랩먼트>(Entrapment)에서 '진 베이커' 역할을 맡은 캐서린 제타존스가 우아하게 레이저빔을 피하면서 목표물을 훔치는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표를 주고 나서 버스를 탔다. 저 친구는 진주 가는 버스를 탈까? 아니면 다시 매표소로 가서 환불을 할까? 표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터미널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허생전>의 변부자 생각이 났다. 허생에게 선뜻 만냥을 준 변부자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아니 ,이제 하루 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이신가요?"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하겠느냐."

그랬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육천원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하겠는가.

P.S :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니, 진주에 망경초등학교와 경해여자중학교가 있었다.


#진주#공중보건의#나로도#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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