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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철거된 세죽마을의 집터)에서 바라본 처용암 물 위에 작게 떠 있는 바위섬이 처용암이다. 이름 끝이 '섬'이나 '도(島)'가 아닌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처용암은 기대보다도 훨씬 작아 대부분의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 해변(철거된 세죽마을의 집터)에서 바라본 처용암 물 위에 작게 떠 있는 바위섬이 처용암이다. 이름 끝이 '섬'이나 '도(島)'가 아닌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처용암은 기대보다도 훨씬 작아 대부분의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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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慶州]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집에 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또 뉘 것인가.
본디 내 것인데 빼앗겼으니 어쩔 것인가.

위의 4행시는, 전공자마다 달리 해석하는 신라 향가 <처용가>를 현대어로 대략 읽어본 것이다. 밤이 새도록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방 안에 다리가 넷이 있는데, 둘은 아내의 것인 줄 알겠지만 나머지 둘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마지막 행의 "어쩔 것인가"가 특히 분분하게 해석되는 구절이다. '혼내주겠다'는 위협으로 해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또는 더 나아가 '관용'으로 읽는 국문학자도 있다.

심지어 민간에서는 "아내의 부정을 눈앞에 두고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처용이 어찌 인간인가, 질병이나 악귀를 내쫓는 신이다!" 하고 섬기면서 부적을 만들어 출입문 위에 붙이거나 품 안에 넣고 다니기도 한다. 물론 그 같은 민간신앙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낯선 두 다리'의 주인공 역신(疫神)이 처용에게 "앞으로 당신의 초상만 보아도 도망치겠나이다"하고 맹세한 데서 연유한다.

처용암 안의 제단 마치 바둑판처럼 생긴 제단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누군가가 처용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 처용암 안의 제단 마치 바둑판처럼 생긴 제단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누군가가 처용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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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은 아라비아 사람이었다?

처용의 신분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대표적인 해석은 그를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이다. 지방 호족의 아들인 처용에게 벼슬과 미녀를 주어 서울에서 살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의 내용을 보면 꼭 그렇게 당당한 왕권의 행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신라 49대 임금인 헌강왕이 이곳에 행차했다가 구름과 안개에 갇혀 길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일관(日官)이 "대낮에 이처럼 구름과 안개가 짙은 것을 보면 동해 용왕이 조화를 부린 것"이라면서 "용을 위해 절을 지어주겠노라 언약하면 날씨가 맑아질 것"이라고 아뢰었다. 헌강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날은 곧장 쾌청해졌고, 이어서 동해 용왕이 출현하였다. 그렇게 구름[雲]이 열리고[開] 해가 나타났다고 해서 이곳은 개운포라 불리게 되었다.

처용의 초상 경주 괘릉에 세워져 있는 석인(石人)의 모습이다. 처용을 아라비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따르면 아마도 그의 얼굴은 이 석인처럼 생겼을 것이다.
▲ 처용의 초상 경주 괘릉에 세워져 있는 석인(石人)의 모습이다. 처용을 아라비아 사람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따르면 아마도 그의 얼굴은 이 석인처럼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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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용왕은 헌강왕 앞에 출현할 때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는데, 그중 한 왕자가 바로 처용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동해 용왕으로 표현되는 처용의 아버지는 단순한 지방 호족이 아니다. 용(龍)과 왕(王)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고, 국왕의 행차를 중단시킬 정도의 힘을 지닌 그가 그저 그런 호족에 불과할 리가 없다. 처용 설화는 이미 왕권이 힘을 잃고 지방 호족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렇지 않다면 벼슬과 미녀까지 주어가며 지방 호족의 아들을 서울에 체류시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처용은 지방 호족의 아들이 아니라 국제 무대에도 통하는 '첨단 능력'을 가진 '신지식인'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처용이 아라비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미 그 당시의 신라는 중국과 일본만이 아니라 아라비아와도 교역을 하고 있었으므로, 대단한 능력을 지닌 어떤 상인이 신라에 왔다가 정착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실제로 경주 괘릉에 가보면 결코 한국인의 얼굴이라고 볼 수 없는, 단연 아랍인의 모습을 한 석인(石人)이 서 있으니, 이런 곳에까지 그들의 형상이 서 있을 정도이면 처용 같은 인물의 정착도 그리 드문 사건은 아니었을 듯하다.

처용암에서 바라본 세죽마을 방향 예전에는 횟집이 즐비했으나 지금은 아주 공단지대로 변했다.
▲ 처용암에서 바라본 세죽마을 방향 예전에는 횟집이 즐비했으나 지금은 아주 공단지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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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나무 가득한 섬, 처용암


그나저나 뜻밖의 행운을 만난 덕분에, 울산 황성동에 있는 처용암 안을 밟아볼 수 있게 되었다. 보통의 관광객은 세죽마을이나 처용마을에서 처용암을 멀찍이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인데, 동해 용왕이 헌강왕에게 길을 터준 것처럼 문득 친절한 어부 한 분이 길손을 처용암에 데려다주겠노라 하신 덕분이다. 조금 전 주막에서 이런저런 대화 끝에 필자가 직접 쓴 소설책 한 권을 선물로 드렸는데, 그에 감복하였다면서 선의를 자청하신 것이다. 

감격에 겨운 심정으로 처용암 안에 발을 딛고 보니, 섬 한복판에 커다란 바둑판 같은 제단이 놓여 있는 것부터 눈에 띄었다. 아직도 지역 어민들은 처용을 위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정월 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침 가져간 소주라도 한 병 있으면 필자도 제단 위에 그것이나마 올려놓고 재배라도 할 일이다 싶었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준비된 제물이 전혀 없었으므로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의 답사는 책만으로 알던 처용암과 실제의 처용암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소득 있는' 체험이었다. 어떤 유명한 답사 안내 서적은 처용암을 두고 '바다에 떠 있기에 섬이라고는 하지만, 변변한 나무 한 그루는 물론 풀 한 포기도 보기 힘든 자그마한 바위'에 불과하다고 썼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처용암이 바위섬인 것은 분명했지만, 풀 한포기도 보기 힘든 그런 돌덩어리가 아니라 섬 중심부를 가운데로 하여 전체의 절반 이상이 둥그렇게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는 초록빛 섬이었다. 바위로 뒤덮인 부분은 바닷물에 접한 물가 일대뿐이었다. 처용암은, 동백꽃이 피는 철에 다시 한번 이곳에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절로 그런 기대에 부풀도록 해주는 낭만의 소도(小島)였다.

처용암 일부 바다 너머로 공단이 보인다.
▲ 처용암 일부 바다 너머로 공단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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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서울에 안 가본 사람이 거기 사는 사람보다 더 지리를 아는 체한다고 했다. 같은 뜻에서, 직접 현장을 발로 밟아보는 여행이라야 '진짜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멀리서 보고 돌아서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일종의 독서에 불과하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거늘, "저게 처용암이란다" 하는 주위의 소리만 듣고 어찌 발길을 돌릴단 말인가. 처용암은 여행의 참뜻을 내게 재삼 깨우쳐주었다. 개운포, 정말 구름이 걷히는 포구였다.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개운포 바다


하지만 처용암 답사를 통해 얻은 더욱 소중한 소득은, 처용암이 풀 한 포기 없는 바위가 아니라 동백나무와 그 외 목초들로 가득한 초록빛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설화의 처용은 구름을 물리치고 햇살을 불러올 정도의 초능력을 지닌 존재이지만, 지금의 처용암은 그리로 가는 길목인 세죽마을이 철거되고 집터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채 나뒹굴고 있는 지경이다. 게다가 개운포 바다 자체가 온통 시커멓게 죽은 채 속속들이 썩어들어가고 있다. 구름을 이긴 처용이 공해 앞에서 처연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1970년대 후반만 해도 이곳 사람들은 처용암을 지키고 바다를 살리기 위해 싸웠다. 처용 이래 1300년을 이어온 개운포 바다의 청정을 무지막지한 공해가 압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은 '나랏님'과도 겁 없이 싸웠다. 그러나 끝내 세죽마을은 철거되었고, 보상금을 받아든 주민들은 정든 땅을 떠나 낯선 어딘서엔가 모두들 이방인이 되었다.

이제 처용은 죽어가고 있다. 시커먼 공해에 찌들어 바닥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개운포 바다에 둘러싸인 처용암은, <처용가>를 공부하는 국문학도나 환상에 젖은 채 찾아왔다가 실망하고 돌아서는 처참한 몰골이 되고 말았다.

뭍의 왕과 바닷속 용왕까지 불러 놀던 처용암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이 아니라 실즉허(實卽虛)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김춘수가 <처용단장>에서 '바다가 온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고 노래한 것처럼 개운포 앞바다는 반쯤, 아니 거의 반죽음처럼 눈을 감고 있다.

그래도 나는 살아 생전 두 번 다시 발을 디딜 수 있을까 의심되는 처용암 안에 선 채, 돈이 자연을 죽이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 삭막한 황금만능시대의 한복판을 살면서, 처용이 다시 개운포에 돌아올 그날을 꿈꾸었다. 그래야 처용암을 직접 답사한 데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탁하게 오염된 처용암 둘레의 바닷물 신라왕과 동해 용왕이 노닐던 정도로 맑았던 개운포 바다. 그러나 지금은 공해에 찌들어 세죽마을은 이미 철거되고 없고, 바닷물은 바닥이 전혀 안 보일 만큼 탁하다.
▲ 탁하게 오염된 처용암 둘레의 바닷물 신라왕과 동해 용왕이 노닐던 정도로 맑았던 개운포 바다. 그러나 지금은 공해에 찌들어 세죽마을은 이미 철거되고 없고, 바닷물은 바닥이 전혀 안 보일 만큼 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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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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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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