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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 중일 때의 호남의병장들. 이분들은 모두 순국했다.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 중일 때의 호남의병장들. 이분들은 모두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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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우리 역사의 책장을 넘기노라면 곧 분통을 터드리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은 백성들을 섬김의 대상으로 받드는 데 있지 않고, 수탈의 대상으로 여기며 국리민복보다 자기들의 왕권이나 지위를 지키는 데만 급급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다가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결사항전의 투지보다 외세를 끌어들여 막고자 하거나 자신들은 죽창 하나 들지 않고 도망 다니느라 정신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일 만에 수도인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되고 곧이어 평양까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몽진 중인(피란 중인) 선조 임금은 제 한 목숨 구하고자 의주까지 도망간 뒤 명나라에 망명하고자 압록강을 건너려는데 충신 유성룡이 막았다.

"전하께서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이며, 후일 백성들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남아 있고, 머지않아 호남지방에 충의의 선비들이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가십니까?"

그 충간에 압록강을 건너려던 몽진 행렬은 멈췄지만 전란에 죽어가는 백성들의 안위보다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못난 임금이었다. 그야말로 바람 앞에 등불처럼 가물거리는 나라를 구한 것은 전국에서 일어난 이름없는 의병이요, 승병들이었다.

역사는 다시 흘러 구한말에도 그랬다. 왕실을 비롯한 세도가들은 백성들의 복리보다 매관매직에 탐닉하다가 마침내 왕비까지 시해되는 국권 유린을 당했다. 이어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긴 뒤 나라마저 영구히 일본에게 강탈되는, 유사 이래 가장 처참한 망국의 비극을 당했다.

그런데도 왕족을 비롯한 대신들은 대부분 일제가 내린 은사금과 작위에 자족했다. 이런 가운데 죽창이나 화승총을 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나라를 찾겠다고 일제 총칼을 맞선 이들은 관군이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난 무지렁이 의병들이었다.

 구한말 의병들, 이들 대부분은 농사군, 포수, 유생, 머슴 등이었다.
 구한말 의병들, 이들 대부분은 농사군, 포수, 유생, 머슴 등이었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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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은 우리 민족정신의 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병들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신의 꽃이요, 국수(國粹)요, 고갱이다. 나는 이분들의 나라사랑에 감동받아 최근 10여 년간 그 선열의 발자취를 좇으며 답사기를 썼다. 이런 발길에 길안내를 받느라, 이야기를 듣느라, 여러 의병 후손들을 만났다.

한 달 전쯤 의병 후손으로부터 피맺힌 하소연을 들었다. 그 내용인즉, 올해 정부에서 '의병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식을 하는데, 첫 번째로 그 장소가 경남 의령으로 정한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의병의 노래' 작사가가 하필이면 골수 친일파 서정주시인의 콧김을 받은 아무개씨로 결정이 되어 피가 거꾸로 흐른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분은 의병의 날 제1회 개최 장소는 원년이라는 의미와 상징성으로, 특정지역이 아닌 수도권(서울)이 마땅하고, 의병의 노래 작사자도 친일에 한 점 흠이 없는 분이 작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분의 분노에 공감하면서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점은 의병 후손도 아니거니와, 개최 장소는 대승적인 관점에서 보면 제2회는 호남, 제3회는 충청, 제4회는 강원, 제5회는 경기 등에서 개최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의병의 노래' 작사 문제도 이미 행안부에서 예총에 의뢰해 결정하였다고 하니, 제삼자가 나서서 왈가왈부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이 문제는 전후 과정을 잘 아는 의병 후손들이 행안부 관계자와 만나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말로 답했다. 그런 뒤 어디 의병들이 앞뒤를 가리고, 목숨을 두려워하며 일제에 항거했느냐, 그 어른들은 '의(義)'라는 명분에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렸으니, 그런 의병정신으로 투쟁하면 의병의 노래 문제 해결 못하겠느냐, 정히 안 되면 행안부 앞에서 할복을 하는 심정으로 투쟁하라고 조언을 해드렸다.

글이란, 노래란 글쓴이의 영혼이다

간밤에 또 다른 의병 후손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1회 의병의 날인 2011년 6월 1일은 다가오는데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았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분은 장소는 백번 양보한다 해도 의병의 노래는 작사자도 마음에 들지 않을 뿐더러 가사 내용도 의병 정신과는 동떨어졌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행사를 강행하는 행안부 측 졸속 처사에도 분개했다. 그래서 일부 의병 후손들은 행안부가 주관하는 의령에서 열리는 의병의 날 행사에는 참석치 않고, 대신 서울 망우리 13도창의군탑에서 분향 헌화키로 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간밤 잠을 설쳤다. 도대체 이 나라 젊은이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우리 근현대사를 보면 해방 후 3.1 기념식도 서울운동장에서, 남산에서 따로 열렸고, 지금도 무슨 무슨 추모사업이나 기념사업회도 따로 따로 하는 게 비일비재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기념식 하나 제대로 매끄럽게 치르지 못하나? 백성이 주인인 민주국가에서 이런 기념식 하나 제대로 집행치 못하고 행안부 공무원들은 무슨 낯으로 국록을 먹고 있는가.

눈을 감고 누웠는데 그동안 내가 만나 뵌 안중근 의사가 떠오르고, 고광순, 백낙구, 기산도, 안규홍, 김태원, 김율, 오성술, 양진여, 양상기, 심남일, 김용구, 김기봉, 기삼연, 조경환, 김원국, 김원범, 양희열, 이석용, 임병찬, 전해산 … 등의 의병장 영정이 눈앞에 삼삼했다.

 기산도 의사
 기산도 의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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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놈아. 글이란, 노래란 글쓴이의 영혼인 것이여. 우리들은 영혼이 깨끗지 못한 후손이 내 이야기를 쓰거나 노래를 지어 바치는 것 원하지 않아. 뭐 네 놈이 제삼자라고? 네 놈 몸에는 배달겨레의 피가 흐르느냐? 아니면 왜놈의 피가 흐르느냐? 너라도 나서 그런 깨끗지 못한 자가 지은 노래를 못 부르게 막아 줘."

특히 장님으로 의병을 지휘하신 백낙구 의병장의 감으신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듯하여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글을 쓰고 있다.

"만일 그 따위 의병의 노래를 부른다면, 우리 의병 귀신들은 모두 등을 돌릴 거야."

을사오적 가운데 군부대신 이근택을 거의 회쳐 놓다시피 온몸을 예리한 칼로 쑤셔 일제의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신 기산도 의사가 혀 짧은 소리로 꾸짖는 듯했다. 그분은 동지를 불지 않으려고 혀까지 스스로 자른 분이시다.

'의병의 노래'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다. 정히 지을 만한 사람이 없다면 차라리 '의병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게 낫다. 그게 선열들을 욕되게 하지 않는 일이다.


#의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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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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