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 신문' <조선일보>가 이승만 전 대통령 '띄우기'에 혈안이 돼 있습니다. 살아서 권좌에 있을 때는 '찬양'에 앞장서더니 이제는 죽은 이승만 '살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적어도 <조선일보>가 공기(公器)를 표방한다면 최고 권력자는 감시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물론 그런 적이 전혀 없진 않았죠.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는 재임시절이나 사후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칼날을 들이대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박정희도 포함)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찬양 보도로 일관하면서 이승만 홍보 매체를 자임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조선일보>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 사례 몇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의 눈물겨운 이승만 띄우기앞서 '중' 편에서 이승만의 '80회 탄신'(1955. 3. 26) 때 각종 기발한 탄신 경축행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날 <조선일보>는 이를 어찌 보도했을지가 궁금해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당일자 마이크로필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였습니다.
제호 옆에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나란히 선 대형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에 '제80회 탄신일을 맞은 이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더군요. 그리고 사진 옆에는 미국 뉴욕에서 많은 외교관들이 이 대통령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하모임을 가졌다고 큼지막하게 보도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저는 문득 일제 말 <조선일보>의 지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옆에는 용(龍) 한 마리와 일황 부부의 사진을 실은 바로 그 장면 말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민족지'라고 떠들어대는 신문이 민족 전체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런 작태를 보였습니다. 이 지면 하나로 <조선일보>의 정체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시대만 바뀌었을 뿐이지 최고 권력자에 대한 아부와 찬사로 일관하는 편집 방침은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3월 26일 당일자만 그랬을까요? 서울운동장에서 국경일에 버금갈 만한 이승만 '80회 탄신' 경축행사가 있은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거의 '광란'에 가까운 지면을 꾸렸습니다. 사회면도 아닌, 1면에 서울운동장 행사 장면을 찍은 항공사진을 싣고는 제호 옆에 '이 대통령의 제80회 탄신일을 경축'이라는 대형 제목을 달았습니다. 관련 사설은요? 당연히 있죠. 이날 <조선일보>는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축하함'이라는 사설에서 이승만을 한껏 치켜세웠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이하여 노(老) 대통령에게 경하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 80이면 고희에 10년이 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이 대통령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능하다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 왜그러냐 하면 우리의 전도(前途)에는 해결해야 할 중대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에게 더욱 신의 가호가 있어서 통일대업을 완수하고 국가 기초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더 한층 노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굳이 설명을 보탤 필요가 있을까도 싶습니다만 사족을 그린다면,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을 맞아 '우리 자신의 환희와 감격을 느끼게 된다'고 한 대목이 우선 눈에 거슬립니다. 이승만은 민주공화국 체제하에서 선거로 뽑은 선출직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를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시각은 군신(君臣), 혹은 주종(主從) 관계와 같은 봉건적인 자세로 일각에서 그를 '국부(國父)'로 칭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이미 80세인 이승만을 향해 '백천(百千)세가 거듭 되었으면 한다'고 한 것 역시 과거 왕조시대에 '천세(千歲)', '만세(萬歲)' 하던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은 '왕'이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백성'이라는 셈이지요.
서울시, '우남시'가 될 수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요즘도 어린이용 <소년조선일보>를 간행하고 있는데요, 이 신문은 일제 때도 있었고 이승만 시절에도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 <소년조선일보>는 이승만의 '80회 탄신'을 그냥 지나쳤을까요? 그럴리가요, 당연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습니다. 3월 27일자 1면 제호 아래 '리 대통령 각하 제80회 탄신 경축식장' 행사 사진을 싣고는 그 아래 '여든 돌 맞이하신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어린 시절의 우리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나란히 실었습니다. 얼핏 보면 북한 <노동신문>의 지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앞에서 이승만의 호가 '우남(雩南)'이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아첨꾼들이 그의 호를 따서 우남로, 우남공원, 우남정, 우남회관, 우남도서관 등등을 명명했다는 얘기도 소개했구요). 그런데 이승만의 호 '우남'을 갖고 장난질을 한 최대 사기극이 뭔 줄 아십니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명칭을 '우남'으로 바꾸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만약 그때 이 일이 성사됐더라면 '서울시'는 잠시나마 '우남시'라는 명칭을 갖게 됐을 것입니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일제 당시의 수도 명칭인 '경성(京城)'을 폐기하고 '서울'을 새 수도의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미군정이 수도의 새 명칭으로 '서울'을 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앞서 한성, 한양 등의 명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를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것은 얘기가 다릅니다. '우남시'로의 명칭 변경 논의는 1955년 이승만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승만은 '서울'이 지명이 아니라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서울' 대신 다른 명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습니다.(<대통령이승만박사 담화집(제2집)>, 1956년)
대통령이 한 마디 하자 다들 알아서 기기 시작했습니다. 실체도 불분명한 소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조직이 꾸려지고 명분 축적을 위해 여론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여론조사라고 해야 요즘 같은 전문 여론조사기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편접수뿐이었는데 그게 얼마나 믿을 만하겠습니까? 묘하게도 위원회가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여론조사 결과 1위는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시'로 나왔습니다. 접수된 편지 3천여 통 가운데 절반가량이 '서울시' 대신 '우남시'를 선택했다는 얘긴데요, 이 편지들은 대체 누가 보낸 것일까요? (* 구체적인 통계는 우남(雩南)-1,423명, 한양(漢陽)-1,117명, 한경(韓京)-631명, 한성(漢城)-331명임)
그럼에도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꾸지 못한 데는 정치권과 언론 등 여론의 반대가 컸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야당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민주당 소속 소장파 김영삼 의원(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이 대통령의 행동(우남시 변경/필자)은 알젠틴의 후안 페론의 자찬(自讚)과 같은 것으로 이 대통령은 점점 독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경향신문> 1956. 8. 25)고 비판했습니다. 이밖에 언론의 반대 목소리도 컸습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우남시'로의 변경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조선일보>는 '수도명칭조사위원회'라는 실체도 불분명한 위원회의 조사결과('우남시'가 1위)를 1956년 1월 7일자에 보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거의 똑같은 내용을 19일자에 다시 반복해서 실었습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사설이나 기사를 통해 적극적인 찬성을 밝힌 바는 없지만 그렇다고 <동아>나 <경향>처럼 반대 기사를 실은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남시(雩南市)가 1위"라는 제목의 기사를 두 차례나 게재하면서 부제를 달리한 걸 보면 이는 편집상의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간접적인 '찬성'으로 보면 무리일까요?
이승만 동상 건립이 <조선>의 책무인가 <조선일보>의 '이승만 띄우기'는 이로부터 40년 뒤인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다시 부활했습니다. 자사 지면을 통해서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사업부서에서는 대대적인 특별전을 진행하였습니다. 전시회 명칭은 '이승만과 나라세우기'인데, 얼핏 보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혼자서 세웠다는 식으로 착각이 들게 합니다(이는 경제개발을 박정희가 혼자서 다 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 해 2월 5일 서울 양재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우남시' 명칭 개정을 반대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참석했었습니다.
전시회 개막 2일 전 <조선일보>는 사고(社告)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전시회 기획의도를 밝힌 바 있습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은 불굴의 항일투사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선견의 정치가로, 세계열강들 가운데서 탁월한 국제감각으로 평생을 나라를 재건하고 수호하는 데 헌신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대통령, 4·19를 유발한 독재자로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말년의 과오만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1875~1965)가 한국의 근대사였고 역사를 개척한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과 나라세우기 전은 바로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자리로 재평가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고'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두고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광복, 건국, 6·25전쟁, 전후 복구, 4·19의거, 하야, 망명지 하와이에서의 별세, 유해환국, 국립묘지 안장 등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바탕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더군요.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이승만의 생애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시기는 그가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4·19로 하야할 때까지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이 시기에 발생한 각종 실정(失政)은 소홀히 다룬 채 일제하 행적이나 한국전쟁 관련 부분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조선>이 특별전을 마친 후 펴낸 <이승만과 나라세우기>라는 화보집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목차] 임정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 이승만 90년 / 방상훈 = 4 이승만론 / 김학준 = 20 언론인 이승만 / 정진석 = 28 망명·독립운동·임시정부 / 윤병석 = 42 미 군정에서 대한민국 건국 / 진덕규 = 88 공산침략과 자유수호 / 안병만 = 116 전후복구와 권위주의 통치 / 김호진 = 164 거인의 생애 90년 / 이택휘 = 194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 이한우 = 204 우남의 한시와 서예 / 이병주 = 208 거인의 황혼, 하와이 망명생활 / 이인수 = 212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 로버트 올리버 = 216 이승만의 유품들 = 218 이승만 연보 = 226 얼핏 봐도 이승만의 생애 가운데 부정적인 것은 외면했다는 인상이 드는군요. 각종 '권위주의 통치'는 전후복구 항목 속에 포함돼 있고, 4·19혁명을 유발케 한 '독재' 관련 부분은 2쪽에 불과합니다. 반면 부인 프란체스카와의 만남, 그가 남긴 한시와 서예, 심지어 하와이 망명생활 등을 각각 4쪽이나 할애했으며, 유품도 8쪽에 걸쳐 다뤘습니다. 이래놓고도 과연 '사고'에서 밝힌 대로 "이승만을 있는 그대로 보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조선>이 말하는 "재평가의 출발점"이 아니라 "미화의 출발점"인 게지요. 그러니 그 귀착점은 안 봐도 뻔할 뻔잡니다. 최근 다시 불을 붙이고 있는 '이승만 동상 건립'이 바로 그것이지요.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는 지난 4월 21일자 "간악한 黑心이라 해도 좋다"는 제하의 칼럼에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명박 대통령에게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라며 MB정부에 이승만 동상 건립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어찌 보면 새로울 것 하나도 없는 주장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조선일보>는 이 같은 주장을 해왔으니까요.
2000년대 들어서도 <조선>은 사내 필진은 물론 교수들의 기고를 통해 틈만 나면 이승만 동상 건립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들이 펼쳐온 주장의 요지는 '건국 대통령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홀하다'는 것인데요, 그들의 눈에는 '독재자 이승만'의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특정인이나 특정 매체가 특정 역사인물에 대해 호불호(好不好)를 가질 수는 있습니다. 필자가 백범 김구 선생이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듯이 <조선일보>나 그 부류(조갑제 등)들이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대상인물을 균형 있게 그려내고 또 그의 단점이나 어두운 구석에 대해서도 눈감아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공기(公器)인 언론매체라면 더욱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로 외눈박이라는 얘깁니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이승만을 계속해서 일방적으로 찬양·미화한다면 이는 <조선일보>가 공기(公器)가 아니라 흉기(凶器)임를 자처하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