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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오전 '대를 이은 통일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안재구(78, 전 경북대 교수), 안영민(43, <민족21> 편집주간) 부자의 집에 국정원과 경찰청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압수수색했다. 안재구 교수에게는 "친북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적성의 글을 올린" 혐의가, 안영민 편집주간에게는 일본 총련계 인사와 불법 접촉해 지령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안영민 편집주간이 현재의 심경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말]
3대가 한 자리에 안영민 편집주간의 아버지와 아들. 부친 안재구(전 경북대 수학과 교수) 선생은 남민전,구국전위 사건으로 두 차례 무기형을 선고받은 통일운동가다.
▲ 3대가 한 자리에 안영민 편집주간의 아버지와 아들. 부친 안재구(전 경북대 수학과 교수) 선생은 남민전,구국전위 사건으로 두 차례 무기형을 선고받은 통일운동가다.
ⓒ <민족21>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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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6일 오전 9시 30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작은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7~8명의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다급하게 내렸다. '뭔 일이야'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내 앞에 섰다.

"안영민씨 맞죠?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애 유치원부터 보내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좋습니다."

그렇게 3~4명의 남자들이 나를 뒤따르는 가운데 작은아이를 아파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행하는 거냐고 물으니 오늘은 압수수색 나왔다고 한다.

갑자기 나타난 국정원 직원... 내가 북의 지령을 받았다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영장과 신분증을 제시하고 몸수색을 했다. 휴대폰부터 압수한 뒤 이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각종 책자와 자료, USB, 장롱 구석에 있던 구형 필름카메라와 비디오촬영기, 옷장 위에 처박아둔 옛날 노트북까지 압수했다. 심지어 책꽂이의 책들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폈고, 옷장 속의 옷가지까지 샅샅이 뒤졌다. 금속탐지기로 장롱, 냉장고, 옷장, 소파 밑바닥까지 다 훑었다.

이를 담담히 바라보면서 나는 도대체 뭔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제시한 압수수색 영장에 적시된 내용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민족21에서 활동하며 조총련 관계자와 접촉해 수시로 지령을 수수하고, 이에 따라 활동하면서 조직원을 인입해왔다'는 것이 내게 붙여진 혐의였다. 말 그대로 '간첩' 혐의다.

압수수색이 시작된 지 2시간 쯤 지났을 때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났다. 혹시…. 역시나였다. 내게 국정원 수사관이 들이닥칠 무렵 아버지가 사는 아파트(같은 단지에 사신다)에도 경찰청 보안국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순간 아버지 건강부터 염려됐다. 협심증으로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아 약을 상복하시는데다가 고혈압과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 '아, 지긋지긋한 악몽의 세월이 다시 이렇게 시작되는가'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일단 아버지 상황부터 확인해야 했다. 수사관들은 내게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전화 연결은 해주겠단다. "애비냐, 나는 괜찮다. 걱정 말거라." 기운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아버지는 아들 걱정부터 하셨다.

아버지 걱정도 잠시, 수요일이라 4교시를 마치고 1시쯤 돌아올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이가 신경 쓰였다. 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보니 멀리서 친구들하고 까불대며 집으로 오고 있었다. 큰소리로 "집에 손님이 와 계시니 친구 집에서 한참 놀다 오라"고 외쳤더니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2시쯤 큰아이가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친구가 학원 간다고 해서 금방 왔다는 것이다. 평소와 다른 집안 분위기에 눈이 동그래진 아이에게 다시 공터에 나가 놀다 오라고 했다.

집을 나서는 아이를 보면서 불현듯 나는 32년 전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하루 전날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찾으러 수사관들이 우리 집을 덮쳤고,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십년이라는 악몽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동네에서 수군대는 '간첩' 소리를 들으며 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나는 다시 그 악몽의 세월이 내 아이에게까지 이어지는 건 아닌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우리 집 압수수색은 오후 4시쯤 끝이 났다. 수사관들은 7월 11일 출두요구서를 내밀고는 돌아갔다. 하지만 각종 자료와 외장하드가 많았던 아버지 집은 다음날 저녁 7시까지 장장 34시간이나 이어졌다. 아내는 아이들 때문에 내색을 안 하려고 애썼지만 돌발사태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울한 분위기가 내내 집안을 감쌌다.

32년 전의 '남민전 사건', 아직도 악몽을 꿉니다

일단은 내막부터 알아보아야 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부지불식간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혐의대로라면 <민족21> 활동 전반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인데 지난 10년간 합법적으로 방북 취재를 했고, 그 연장선에서 일본을 방문해 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과 조선신보(총련 기관지)를 만나 사업협의를 해온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건다면 지난 10년간 남북 교류사업을 진행해온 수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모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전면적인 공안정국 조성을 염두에 둔다면 모를까 이렇게 마구잡이로 수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버지에게 적용된 혐의 역시 마찬가지다. "종북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적성이 있는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일단 '종북'이란 말부터 우습고, 팔순 고령의 노인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그토록 용인할 수 없는 일인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어쨌든 나에 대한 수사는 이런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왜 총련 관계자를 만났는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또 최근 5, 6월 두 차례 일본을 다녀온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특히 내가 만난 총련 관계자가 북의 해외공작원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주된 수사내용이었다. 나는 적극적인 해명과 항의를 번갈아가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그렇게 1차 수사는 끝났고, 현재 7월 15일 2차 출두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마음이 달랐다. 이참에 자신을 구속시키라는 것이었다. 7월 13일 출두조차 거부하던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해 경찰청 대공분실로 모셔가던 날 아침,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정부가 내게 원하는 게 비루하게 밥이나 축내며 가만히 살라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 그게 국가보안법에 맞선 내가 역사와 민족 앞에 더 떳떳한 일이다."

그 전날 평소와 달리 소고기를 잔뜩 사들고 집에 찾아오신 아버지는 손자들에게 배불리 고기를 먹이셨는데, 이 역시 할아버지의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대공분실에서 차라리 나를 구속시키라며 '농성'하시는 아버지를 변호사와 함께 다시 모셔 나오는데 눈물이 왈칵 나왔다. 1979년 남민전 사건 당시, 그로부터 15년 후인 19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아버지와 함께 구속되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다시 17년이 지난 오늘,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사슬 앞에 우리 두 부자가 고초를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현실이 암담해졌다.

북측 만나면 '회합' 의견 나누면 '지령수수'...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룬 지난 30여 년이었지만 과연 본질적으로 달라진 건 무엇인가.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고, 한 사람의 생각과 견해를 국가보안법의 잣대로 판단하고 벌 주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답답하고 암울하다.

17년 만에 겪어본 수사과정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도 많았다. 과거와 같은 피의자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강압수사나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불법수사 관행은 분명 없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통일을 위한 남북의 만남과 협력을 이적행위로 바라보는 인식의 틀은 여전하다.

북측과의 만남이 '회합통신'이 되고, 그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것이 '지령수수'가 되고, 남측 진보운동의 활동이 북의 정치공작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믿는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주, 반통일적인 공안기관의 인식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런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언제든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방학을 코앞에 둔 큰아들은 아빠와의 공부와 여행계획에 들떠 있다. 우리 가족의 소박한 행복과 일상이 지속될 수 있을지 아직은 물음표다. 수사결과에 따라 언제든 구속될 수 있는 피의자 신분, 나는 오늘도 여전히 30여 년간 지속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안영민#안재구#민족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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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지와 민족21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현재는 (사)평화의길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명진TV를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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