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나코시 운하를 통해 배가 넘어갔다
우리의 숙소는 오후나코시(大船越) 바닷가에 있는 유메(夢) 민숙(民宿)이다. 우리말로 하면 꿈의 민박집이 된다. 그래선지 2층 방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이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다. 항구에는 오징어잡이 배들이 정박해 있다. 바다 가까이 가 보니 물도 맑아 고기들이 노는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고기 잡는 낚시꾼도 보인다. 그래도 큰 돔 한 마리를 잡았다.
마을 끝으로 오후나코시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 아래로 운하가 있는데, 그것이 오후나코시 운하다. 오후나코시는 한자로 풀이하면 큰 배들이 넘는 곳이 된다. 배가 넘으려면 물길이 있어야 하고, 그 물길이 이곳에 뚫린 것이다. 대마도는 원래 남북으로 길게 연결된 섬이었다. 그중 폭이 좁은 곳을 뚫으면, 동쪽에서 쉽게 서쪽으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1671년 대마도주 소우 요시자네(宗義眞)가 운하를 뚫고 다리를 놓았다. 그때부터 대마도는 상대마와 하대마 둘로 나눠졌다.
우리는 대마도에 삼일동안 묵으면서 오후나코시 다리를 수차례 넘나들었다.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이즈하라를 중심으로 한 남섬에 많기 때문이다. 오후나코시 다리 건너 서북쪽으로는 쓰시마 공항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만제키(万關) 다리가 있다. 대마 공항에서는 하루 4회씩 후쿠오카와 나가사키로 가는 비행기가 뜬다. 만제키 다리 아래로는 1900년 만제키 운하가 뚫렸다. 만제키 운하가 생기면서 오후나코시는 섬이 되었다.
가미자카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아소만오후나코시 다리를 건너 처음 찾아간 곳은 가미자카(上見坂) 전망대다. 해발 358m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오르는 길이 한없이 구불거린다. 또 산에 우거진 나무들이 길가에 어둠을 드리운다. 길이 좁아 저쪽에서 차가 오면 피하기가 쉽지 않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갑자기 소나기가 온다. 지대가 높은 곳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바다를 지나며 수증기를 머금은 공기가 산록에 부딪치면서 비가 되어 내리기 때문이다.
가미자카 전망대는 이즈하라마치와 미쓰시마마치를 나누는 경계선에 있어 시라다케(白嶽: 519m)로부터 아소만을 거쳐 오후나코시까지 사방 270도를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벽에 주변에 보이는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보는 곳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가장 왼쪽으로는 미쓰시마마치에서 가장 높은 백악이 보인다. 백악은 정상에 두 개의 흰색 바위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과거 불교수행자들이 이곳에 올라 참선을 하면서 수행했다고 한다.
전망대 앞으로는 아소만 풍경이 펼쳐진다. 그런데 바다보다는 섬과 만 등 육지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그리고 가까이 육지로 쓰시마 공항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우리가 묵고 있는 오후나코시가 눈에 들어온다. 가미자카 전망대는 전망도 좋지만 역사적인 전설과 흔적이 있어 더 유명하다. 하나는 대마도주 자리 교체가 이곳에서의 전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1902년 이곳에 포대를 설치했다는 사실이다.
1246년 치쿠첸(筑前)에서 온 고레무네 시게나오 군대가 당시 대마도를 통치했던 아비루 군대를 이곳 가미자카에서 물리치고 실권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소우(宗)씨가 대마도주가 되었고, 그들의 통치는 180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아비루 가에서 소우 가로 통치권이 넘어갔다는 것은 대마도에 대한 지배권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전망대 앞에는 소우 가문의 후손으로 덕혜옹주와 결혼했던 소우 다케유키(宗武志)가 1964년 쓴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을 보고 가미자카의 자연을 느끼기 위해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아무래도 숲이 무성하고 비가 자주 와서 그런지 나무줄기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다, 그런데 숲길이 포대를 따라 나 있다. 포좌적(砲座跡)이라고 쓰인 표지판이 나타나고, 콘크리트로 만든 진지가 보인다. 이들을 지나자 병사들의 숙소였던 내무반도 보인다. 이곳에는 위험하니 출입하지 말라는 안내판이 있다.
이 진지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05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에 대비해서 만들었고,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에는 그 필요성이 없어져 철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 대마도에는 한반도 등 대륙을 겨냥해 만든 시설물이 여럿 있다. 만제키 다리가 그렇고, 한국전망대 앞 우니지마(海栗島)에 있는 항공자위대도 그렇다. 내무반 옆으로는 참호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100년 전부터 일본은 군국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고모다하마 신사가미자카 전망대를 내려와 찾아간 곳은 고모다하마(小茂田浜)다. 원나라 오랑캐들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일본 땅에 처음 닻을 내린 곳이다. 이곳에는 그때 나라를 지키려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신사가 세워져 있다. 역사는 1274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점령한 원나라 군은 이제 일본 정벌 길에 오른다. 10월 3일 합포(마산)를 떠난 3만의 여몽연합군은 이틀 후인 5일 오후 4시 사스우라(佐須浦)에 도착한다.
사스우라가 지금의 고모다하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우 스게쿠니(宗助國)였다. 그는 이즈하라에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사스우라에 도착 주민과 함께 원나라 군대에 저항했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소우는 원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계속 밀렸는지 그의 묘는 사스우라에서 사스가와(佐須川)를 따라 상류에 있는 카시네(樫根)에서 발견된다. 그 무덤 이름은 어동총(御胴塚)이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를 세웠고, 그것이 지금의 고모다하마 신사다. 신사 입구에는 원나라 침입 650년을 맞아 세운 도리이가 있다. 이것을 지나면 1906년(명치 39년)에 세운 두 번째 도리가 있다. 도리를 지나면 배례전이 보이고 그 앞 좌우에는 원구 침입 700년을 맞아 세운 청동조각물과 비석이 있다. 청동조각물에는 원구칠백년평화지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 반대편에 있는 비석에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내용을 살펴보니, '세계제패의 야욕에 불타는'으로 시작한다. 중간에 문영(文永) 11년(1274년)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대마번주 종조국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또 중과부적으로 모두 옥쇄했다는 내용도 보인다. 옥쇄라는 표현은 구슬처럼 자신의 몸을 깨뜨린다는 뜻으로 최후까지 몸바쳐 싸울 때 사용한다. 지금도 군대에서는 그런 용어를 쓴다.
배례전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신사는 규모가 크지 않아 관리인이 없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원나라 군과의 전투장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투장면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사이에는 히로히토 일본천왕 부부의 사진도 보인다. 그 외 내부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지방의 조그만 신사라 그런지 찾는 사람도 한국관광객들 뿐이다.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시야네의 돌지붕 창고
고모다하마 신사에서 24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 내륙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논이 조금 펼쳐진다. 대마도에는 좁은 협곡 사이로 내가 흐르기 때문에 들과 논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렇지만 시이네(椎根)에는 논이 좀 있고, 그 주변에 이시야네(石屋根)로 불리는 창고가 한두 채 보인다. 논에는 파란 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하천을 따라 농가와 창고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창고가 있다는 것은 이곳의 곡물 생산량이 많다는 뜻이다.
차에서 내려 창고로 가까이 가보니 나무와 돌로 만든 고상식(高床式) 가옥이다. 고상식이란 상처럼 건물에 다리가 있는 것을 말한다. 건물바닥이 기초와 떨어져 있어 건물 아래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할 경우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할 수 있고, 공기가 잘 통해 곡식 등 물건의 저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지붕이다. 대개 지붕은 짚이나 기와를 얹지만 이곳에는 돌을 얹었다. 그것은 바람으로 인해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대마도의 돌 문화를 대표하는 이시야네는 섬과 바람이라는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이시야네는 이곳에 대여섯 채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독채로 지어진 창고를 고야(小屋)라 하는데, 이시야네도 고야의 일종이다. 이시야네 옆에 돌기둥이 하나 세워져 있어 보니, 건물을 지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대목수와 석공 그리고 기공자가 힘을 합쳐 1926년(대정 15년)에 건축했다. 그러므로 아직 100년이 되지 못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현재는 친환경적으로 계약재배한 쌀이 좀 남아있고, 벽에는 대나무와 왕골로 만든 바구니가 걸려 있다. 바깥벽에는 양파 같은 구근식물이 걸려 있다. 또 곡식을 말릴 때 사용하는 노 비슷한 판형 장대도 보인다. 이시야네 옆의 창고 한두 개는 지붕에 돌 대신 기와를 얹었다. 아마 후대에 수리하며, 돌을 얹는 기술이 없어 기와를 얹은 것 같다.
함께 간 우리 회원들이 우리나라 고구려 시대 창고인 부경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부경이 일본에 와서 이렇게 변한 게 틀림없다. 다만 부경의 바닥이 지면에서 훨씬 높게 올라가 있는 게 다르다. 그러므로 부경은 2층 느낌이 나고, 이시야네는 1층 느낌이 난다. 내륙에서는 바람이 훨씬 덜 불기 때문에, 건물을 높이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시야네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창고의 한 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