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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좋은 날 아파트앞마당에 고추들 ..
햇볕 좋은 날 아파트앞마당에 고추들.. ⓒ 정현순

"이 집 고추 좀 봐라. 고추농사 참 잘 지었네."
"그러게요. 농사는 잘 됐는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모두 망쳤어요."
"아닌 게 아니라 나도 한 근(600g)에 15000원씩 샀어."
"그 가격이면 싸게 사신 거예요. 23000원, 25000원까지 간다는 소리가 있던데요?"

오랫만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23일) 아파트 앞마당에 고추를 널면서 노인 몇 분들과 나눈 이야기이다.

올해, 남편이 주말농장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고추농사였다. 해마다 고추를 평균 30근씩은 사는 것을 본 남편의 배려였다. 주말농장을 하면서 그동안 남편이 무심했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깨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올해는 예상치 못한 날씨 탓에 채소가격이 많이 올라 주말농장 덕을 톡톡히 본 여름이 되기도 했다. 비가 지나치게 오는 날이 많아  남편의 특별한 이벤트가 서서히 깨진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썩고, 병들고, 절로 떨어지고. 그런 고추들을 보면서 남편이 "올해 제대로 잘 되었다면 50근 정도 예상을 했는데" 하며 씁쓸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평일에도 퇴근하는 길에 늘 주말농장에서 가서 고것들과 눈을 맞추고 오고 주말이 되면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남편의 즐거움 중에 한 가지가 주말에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자장면을 시켜먹는 것이 된 것도 고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들 때문이라고 했다.

주말 아침이 되면 주말농장으로 향하는 남편에게 난 막걸리와 얼린 물,간식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농장에 갔다 오는 날이면 남편의 손에는 떨어진 빨간 고추를 들고 오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고추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도 한계를 넘어서고 있던 지난주였다.

썩고, 무르고, 병든고추들 ..
썩고, 무르고, 병든고추들.. ⓒ 정현순

며칠 사이, 600g에 5000원이나 오르다니

전원생활을 즐기며 자기네 먹을 것을 직접 농사지어 먹는 언니와 통화를 했다. 고추 이야기가 나왔다.

"너 얼른 고추 사라. 일찍 산 사람들은 14000원 정도에 샀다는데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른다고 해. 여기 고추농사 짓는 사람들 얘기가 시중에 내놓을 고추가 얼마나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 우리도 건조기(일반 가정용)에 10시간 정도 걸려서 한 근 정도 말렸어. 너도 그거 하나 사든지."
"뭘 사. 마트나 한번 가봐야겠다."

우선 인터넷쇼핑몰에 들어가 봤다. 한마디로 놀라웠다. 한 근에 15000원 미만은 없었다. 어떤 쇼핑몰에는 "건고추 일시품절"이란 안내문구가 떠 있기도 했다. 인터넷을 끄고 대형마트로 가봤다.

대형마트 고추 앞에서 몇몇 주부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머, 이것 좀 봐.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올랐어?"
"얼마나 올랐는데?"
"지난주인가 우리 친정엄마가 여기서(대형마트) 2.4Kg에 46800원인가 주고 샀다는데 오늘은 66800원이네."

그 주부의 말이 맞다. 일시품절이란 안내문구가 바로 그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한 근에 11800원 했던 고추가 5000원이나 오른 16800원이나 했다.

그렇게 두 명의 주부가 건 고추 앞에서 며칠 사이에 훌쩍 올라버린 고추를 사야 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 망설이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은 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들어서였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그때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아마 추석이 지나면 더 오를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중국산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했다. 경험이 많으신 분의 이야기이니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 두 주부들도 그런 생각에서인지 "그럼 이거라도 사가야겠다" 하면서 건 고추 1봉지에 2.4kg짜리 3~4봉지를 주섬주섬 카트에 담는다. 난 인터넷쇼핑몰에서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고추가 한 근에 15700원. 그래도 그곳이 조금 더 싸고 지난해에도 그 집에서 샀는데 괜찮았다. 하여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20근을 주문했다. 적어도 30근은 있어야 하는데. 10근은 주말농장에서 농사지은 것을 잘 말려서 해볼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정성을 그대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해서이다.

병든부분은 잘라내고 믹서에 갈다 ...
병든부분은 잘라내고 믹서에 갈다... ⓒ 정현순


냉동실에 보관 ...
냉동실에 보관... ⓒ 정현순

그리고 부분적으로 병든 고추라고 그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병든 부분은 가위로 오려내고 믹서에 갈았다. 갈아 놓으니 빨간 빛깔이 정말 곱다. 잘 갈아 봉지에 밀봉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병든 부분을 잘라내면서 남편이 무척 속상해짐이 전해지는듯 했다. 남편이 돌아오자 마자 믹서에 간 고추를 보여주었다.

"그걸 냉동실에 보관해도 괜찮은가? 좋은 방법이네."
"그럼 괜찮고 말고."

남편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주 들어서면서 날씨가 좋다. 햇볕이 좋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 고추 말리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베란다에 널어놓은 고추 중에 썩고 물러버린 것은 골라서 버리고 아파트 앞마당에 이틀째 널었다. 제법 잘 말라가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제발이지 비가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날씨가 좋아 고추가 잘 말라가는 것을 보고 냉장고에 있던 고추도 마저 꺼내어 반을 갈라 마당에 함께 널었다. 반으로 갈라서 말리면 훨씬 잘 마르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 걷어온 고추를 베란다에 널어놓고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옛말에 석 달 가뭄은 살아도 석 달 장마는 못 산다고 하더니 햇볕의 소중함과 감사함이 새삼 느껴졌다.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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