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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들어선 날도 오후 늦게 비가 내렸다. 이제 비는 익숙해진 상태다. 병모와 윤의가 옷을 벗고 텐트 살림을 챙기고 있다.
▲ 비 쯤이야 뉴욕에 들어선 날도 오후 늦게 비가 내렸다. 이제 비는 익숙해진 상태다. 병모와 윤의가 옷을 벗고 텐트 살림을 챙기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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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배고프지."
"……"

워싱턴 DC를 구석구석 섭렵하고 돌아온 '아들 셋'을 전철역에서 만나, 시간이 한참 지난 저녁 식사 의중을 타진했다. 그러나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대답이 없었다. '혹시 서로 다투기라도 한 걸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린벨트 전철역 앞의 가로등 불빛이 그리 환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밝은 편인 그들의 표정을 읽는 걸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힘 빠진 걸음걸이며 축 처진 어깨는 극도로 몸이 피곤하다고 무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집, 아니 텐트를 나섰으니까 12시간 이상을 워싱턴 시내에서 보낸 참이었다.

"점심은 먹었냐."
"아뇨."
윤의가 다소 귀찮은 듯 입을 뗐다.

"뭐야, 너희들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얼른 가서 아무 거라도 먹자."

전철역에서 차로 5분쯤 걸리는 우리들의 근거지, 그린벨트 야영장으로 돌아와 상을 막 차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자겠습니다." 병모가 한마디를 던져놓고 텐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선일이도 말없이 그 길로 병모를 따라 텐트 속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식 식사가 아니라, 간단하게 1달러인지 2달러짜리로 길거리에서 요기를 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막상 숙소로 돌아와서는 기진해서 식욕이 살아나지 않았던 거였다.

지출 줄이려고, 보름에 열끼를 안 먹었다

틈만 나면 돈, 돈, 돈, 절약, 절약, 절약을 외쳐온 나로서는 뒷골이 좀 당기는 기분이었다. 원래 밖에서 저희들끼리만 나돌 때는 각자의 용돈을 사용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극도로 '짠돌이'처럼 군 나의 영향 때문인지 '아들 셋'은 그마저도 잘 쓰지 않았다. 사실 '아들 셋'이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온 뒤 나는 지금까지 열 끼 넘게 식사를 걸렀다. 지출을 줄이고 싶은 생각과 음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믿음, 이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보름에 열 끼니까 사흘에 평균 두 끼 이상 굶은 셈이다.

물론 영양실조에 걸릴 위기를 느꼈다면 끼니를 거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한번에 밥을 많이 먹기로 마음 먹으면 하루 분량도 무리 없이 한 자리에서 해치울 수 있다. 헌데 아이들이 그간 매 끼 준비한 음식을 꼭 다 비우는 게 아니어서, 그 때마다 남는 음식이 생겼다. 난 그걸 버릴 수 없어 그때그때 다 먹어 치웠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 끼니를 건너뛰곤 한 것이다.

온종일을 굶다시피 하며 벌인 '아들 셋'의 워싱턴 탐방은 본전 이상을 뽑은 것처럼 보였다. 연방 의회, 스미소니언 박물관, 전쟁기념관, 백악관 등 핵심 명소는 거의 다 눈도장을 찍고 돌아왔다. 워싱턴은 제법 큰 도시지만, 찾아볼 만한 곳들은 대부분 시내 중심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편이다. 더구나 전철도 미국 도시치고는 잘 발달된 편이고, 역들이 요소요소에 닿는 까닭에 밀도 높게 도시를 탐방할 수 있다. 절정기는 지났다고 봐야 하는 미국, 이 나라의 수도에서 아들 셋은 무엇을 봤을까.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부잣집의 안방을 들여다 본 기분이 아니었을까.

'뉴욕'에 도착한 아이들은 신이 났지만...

뉴욕의 세계에서 으뜸가는 다민족 도시이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한 동양인 악사가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미국의 대도시치고 거리의 악사가 없는 곳이 없는데, 대부분 백인 혹은 흑인 일색이다. 동양인은 구경하기 힘들다.
▲ 동양인 거리의 악사 뉴욕의 세계에서 으뜸가는 다민족 도시이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한 동양인 악사가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미국의 대도시치고 거리의 악사가 없는 곳이 없는데, 대부분 백인 혹은 흑인 일색이다. 동양인은 구경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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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을 섭렵하고 다시 뉴욕으로 북상하는 길, 좁은 차 안은 뭔지 모를 기대감 같은 걸로 가득 차 있었다. 8월 둘째 주의 시작을 막 앞둔 시점이었다. 뉴욕은 '아들 셋'이 무척 고대하던 목적지이다. 나는 지난 보름의 중간 기착지들을 떠올렸다. 그랜드캐니언, 로키 산맥, 덴버, 대평원, 드모인, 인디애나, 나이애가라 폭포, 보스턴, 워싱턴… 그러나 '아들 셋'에겐 이들이 뉴욕에 이르기 위한 요식행위, 혹은 통과의례쯤이었는지도 모른다. 뉴욕이 가까워지면서, 95번 주간고속도로의 표지판에는 좀 더 자주 '뉴욕', '조지 워싱턴 브릿지', '퀸스' 등의 단어가 등장했다.

"오~, 뉴욕."

아이들은 일부러 꼬부릴 대로 혀를 꼬부리며 마치 반쯤은 벌써 뉴요커가 된 것 마냥 건방을 떨기도 했다. 그리고선 차장으로 스쳐가는 맨해튼의 마천루 군을 마치 맛있는 음식처럼 눈으로 음미하는 거였다. 그들의 눈에서 '기다려라 뉴욕, 내가 간다'는 식의 접수 의지마저 읽혀졌다. 내 눈에는 그럴수록 지나온 여정이 더 선명하게 파노라마처럼 반복해 펼쳐지곤 했다.

힘겹게 바퀴를 굴려 온 자동차의 차체는 다행히 더 이상 내려 앉지 않은 상태다. 다만 엔진 출력이 좀 떨어진 느낌이 났다. 특히 동부로 넘어온 뒤 언덕지형을 올라 탈 때, 가속 페달을 밟으면 차가 '움찔', '쿨럭', '멈칫'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대평원 지역에서는 경사진 도로를 좀처럼 만나지 못해서인지, 그런 증상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 

'아들 셋'은 그러나 차량 상태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개선장군까지는 아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병사들처럼 나름의 은근한 자신감을 만끽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뉴욕으로 들어올 때쯤 '아들 셋'이 야생으로 전전해야 하는 야영생활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것은 확실하다. 또 뉴욕에서 본격적인 도시 게릴라 스타일의 탐방 활동을 벌이기 위해, 보스턴과 워싱턴에서 예행연습을 제대로 소화해 낸 것도 맞다.      

하지만 뉴욕을 포함해 '아들 셋'이 도시에 보이는 남다른 애착이 나는 내심 조금 실망스럽다. 도시에는 내가 좋아하는 야성이 없다. 오로지 있다면 '생식 야생'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도시는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 야생'을 거세시킨다. 도시의 의식주에서는 허위와 장식, 꾸밈이 주인 노릇을 할 뿐이다. 도대체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의식주 야생과는 동떨어진 생식 야생은 오롯이 그 하나만으로는 생경하고, 천둥벌거숭이 같다. '도시의 성'(性)이 내게 전혀 아름답지 않게 비쳐지는 이유이다.

'지출공황증'인 내게 찾아온 뉴욕의 유료도로들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뱃길에서 잡은 맨해튼의 고층건물군. 뉴욕의 적지 않은 이들에게 꿈의 도시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겐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현장이다.
▲ 맨해튼의 고층빌딩들 자유의 여신상으로 가는 뱃길에서 잡은 맨해튼의 고층건물군. 뉴욕의 적지 않은 이들에게 꿈의 도시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겐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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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온 후 보름 가량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간 강하게 생식 본능이 발동한 적은 없었다. 들짐승들은 시도 때도 없이 벌게 지지 않는다. 우리 '아들 셋'은 그러나 지난 2주일 동안 짐승으로 진화하는 길을 택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그러니 야생이 괴롭고, 도시가 반가운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십중팔구 여자 얘기로 종결됐다. 게임으로 고등학교 동창 미인 선발대회를 고안해 낼 정도로 오로지 수컷 본능에만 충실했다. 생식 본능이 나와 다르게 발산된 것은, 그들은 젊고 나는 나이가 들었다는 한가지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들 셋'이 고대해마지 않던, 뉴욕 게릴라 전의 본거지는 맨해튼에서 북북서쪽으로 60km 가량 떨어진 '비버 폰드'(Beaver Pond) 야영장이었다. 나는 본격적인 뉴욕 공략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뉴욕으로 진입하던 첫 날 뉴욕 스테이크를 메뉴로 준비했다. 이왕 지출의 출혈을 감수하기로 각오했기 때문에 '프라임'급으로 비싼 고기를 골랐다.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 일품인데, 보통 스테이크보다 단위 무게 당 가격이 3배 가량 비싸다. 뉴욕 스테이크는 그러나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위해 차려주는 어머니의 마지막 성찬의 성격도 있었다. 비버 폰드 야영장에 머무는 동안 식사는 질과 양, 다양성 등 여러모로 최악을 피하기 어려울 게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차를 몰고 올라 오면서 그간의 지출경비를 예닐곱 차례나 반복해 암산했다. 암산을 촉발시킨 방아쇠는 뉴욕-워싱턴 구간에 지천으로 깔린, 통행료를 꼬박꼬박 물어야 하는 유료도로들이었다. 그간 대륙횡단을 하면서 거의 물지 않았던 통행요금을, 4달러, 9달러 하는 식으로 구간마다 내야 했는데, 그 때마다 돈이 '지출 공황증' 초기 단계인 내 골을 때리는 거였다.

암산의 결과는 2000달러는 넘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네 명이 먹고 자고 보름에 500달러 이하를 썼다는 뜻이다. 딱 정해진 기준이 있을 리 없지만, 지금까지 지출 성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초저가 여행과 저가 여행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비버 폰드 야영장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텐트를 치라고 말해놓고, 자동차 의자에 앉아 종이에 지출 내역을 써가며 계산을 해보니 1900달러가 조금 넘는 돈이 쓰여졌다. 구체적으로는 직불 카드로 약 660달러, 현금으로 700달러 정도를 썼다. 여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 23박 24일의 야영장 예약에 지출한 돈이 600달러가 조금 못됐다.     

소요 비목 별로는 기름값과 식비가 각각 600달러 안팎이었다. 지금까지 주행거리가 7500km를 넘었는데, 초소형차를 이용한 덕분에 그나마 휘발유 값 지출을 600달러 이하 선에서 막을 수 있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야영장 숙박료가 열흘 분에 이르고, '아들 셋'의 뉴욕 공략 때 자동차 이용을 최소화하고, 식비 지출을 한층 줄인다면 초저가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나왔다.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립니다.



태그:#뉴욕, #횡단, #여행, #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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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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