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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참깨!"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는 이야기에서 도둑들이 보물을 감추어둔 굴의 문을 열도록 하는 주문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셀 수도 없이 알리바바와 같은 행운의 기회를 잡는 꿈을 꾸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모르게 "열려라 참깨!"를 외친 적은 수없이 많았다. 요행을 바라는 당당하지 못한 내 모습을 들킬까봐 계면쩍은 표정으로 복권을 사서 지갑에 감추면서도 그랬고, 심지어는 주유소에서 경품추첨을 할 때는 경품으로 걸린 새차를 보면서 "열려라 참깨!"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기에 차마 드러내놓고 외치지는 못했지만 "열려라 참깨!"는 나에게 속절없는 '로망'이었다.

지난 6월, 마늘을 뽑아낸 자리에 참깨를 심었다. 마땅히 심을 것이 없어 망설이는데 아내가 마을 노인에게 얻었다는 종자를 들어보이며 앞장을 섰다. 그러면서 빈 박카스병을 들고와 그 두껑에 못으로 구멍 하나만 내달라고 했다. 참깨를 심는데 박카스병이라니? 그 의문에 설명을 듣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아내는 얻어온 참깨 종자를 병에 담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두어번 흔든 병을 거꾸로 세워 손바닥에 털어보더니 됐다는 표정으로 병을 들고 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노인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참깨를 차 숟가락으로 몇 알씩 떠서 땅에 심는 것을 보았지만 아내는 예전의 노인들이 알을 세듯 차 숟가락으로 심던 방식에서 훨씬 진화된 방법을 찾은 것이다. 물론 종자를 나누어준 노인에게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병을 한번 흔들어 털면 못으로 뚫은 구멍에서 거의 일정한 양으로 배출되는 참깨를 보면서 나는 감탄하고 있었다.

7월 중순의 참깨꽃이 필 무렵 7월 준순의 참깨밭
7월 중순의 참깨꽃이 필 무렵7월 준순의 참깨밭 ⓒ 홍광석

참깨 심기는 아내의 놀이였다. 마늘을 심은 비닐 멀칭을 걷어내지 않았기에 간격을 맞추는 수고는 안 해도 되었다. 그렇지만 쭈그리고 앉아 흙에 구멍을 내고 깊지도 얕지도 않게 깊이를 조절해가며 수 백 번 반복하여 병을 흔들어 깨알을 넣는 일이 지루할 것 같은데 아내는 싫다는 기색 없이 오히려 재미있다고 했다. 아마 처음 시도하는 일이고 과연 우리도 참깨를 수확할 수 있을까, 수확한다면 얼마나 가능할까, 하는 기대가 아내를 견디게 했을 것이다.

"열려라 참깨!"

아내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물 창고에 다가서고 있었다.

참깨는 잘 자라주었다. 가장 작은 것을 표현할 때 우리는 "깨알만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는 짓이 좀상스러운 사람을 빗대어 쓰는 말도 "깨알"이다. 그 작은 씨앗이 자라 싹이 트는 모습은 다른 작물과 다르다. 작은 녹두도 잎이 무성하고 작은 그늘을 만들 정도로 옆으로 퍼지지만 참깨는 키만 멀쑥하게 자란다. 그런데 대부분의 식물 줄기가 원형이라면 특이하게도 참깨 줄기는 네모지고 그 줄기에 잎은 작은 편이다. 아마 잎이 작은 이유는 곧게 선 줄기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지 모른다. 하얀 꽃은 잎 사이로 나오고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 두 개씩 다닥다닥 붙어 줄기의 맨 위까지 계단을 이룬다.

참깨 말리기 참깨 다발을 말리는 모습
참깨 말리기참깨 다발을 말리는 모습 ⓒ 홍광석

김매기는 어렵지 않았다. 마늘을 뽑아낸 자리에 이어서 심은 참깨는 마늘을 심을 때 해둔 멀칭의 덕분으로 풀과의 싸움이 덜하기 때문에 여러 번 김매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깨는 다른 작물에 비해 생육기간이 짧다. 대개 70내지 80일이면 수확을 하게 된다. 수확시기는 줄기의 아래 부분에 달린 열매가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베어내면 된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그렇게 따랐다. 베어낸 시기에 따라 수확량에도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깨 털기 말린 참깨 털기
참깨 털기말린 참깨 털기 ⓒ 홍광석

참깨를 벨 때는 익은 참깨의 유실을 막기 위해 조치를 해야 한다. 우리는 수레바닥의 흙을 닦아내고 신문지를 깐 다음 베어낸 참깨를 실어 옮겼는데 떨어지는 소리는 제법 들리는가 싶었는데 그 양은 아내가 심은 종자정도밖에 아니었다.

참깨 털기. 참깨는 푸른 줄기가 잿빛이 될 때까지 잘 말려야 한다. 마르면서 익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이 심는 집은 온 마당에 깨끗한 비닐을 깔고 묶은 참깨 다발을 피라밋처럼 세워 말린다. 줄지어선 참깨 다발을 건드리기만 해도 하얀 깨알이 쏟아지는데 험상궂게 생긴 사람의 입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신기한 일이다. 고작 여나무 다발밖에 안 되는 참개를 비닐하우스 한 벽에 세워 말렸다. 비가 온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아서 좋았다.

참깨 고르기  채로 쳐서참깨만 골라낸다.
참깨 고르기 채로 쳐서참깨만 골라낸다. ⓒ 홍광석

마른 참깨 다발은 세 번쯤 턴다. 줄기 아래쪽에서 꽃이 피어 올라가 듯 익을 때도 아래쪽에 달린 열매가 먼저 익기 때문이다. 말라서 벌어진 열매 속에 줄지어 박힌 하얀 참깨를 보고 있으면 작은 동굴 속의 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은 참깨 알이 모조리 금이라고 해도 알리바바가 열고 들어간 보물의 창고와 비교할 수 없으리라.

오늘 아내는 참깨를 처음 털었다. 아내는 자신의 힘으로 "열려라 참깨!"의 감동을 맛본 것이다. 채로 거르고 키로 검불을 날리고 남은 참깨를 집에 가져와 저울에 올렸더니 1.9kg이다. 전라도 지방의 참깨 1되는 1.2kg이라니 1되 반이 넘는 셈이다. 아내는 1년 동안 깨소금용으로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럼 됐다. 요행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흘린 정직한 땀의 결정체요, 즐거운 놀이를 통해 고소한 양념을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흐뭇한 일이기 때문이다.

참깨 수확량  저울에 달았더니 1.9kg이었다.
참깨 수확량 저울에 달았더니 1.9kg이었다. ⓒ 홍광석

참깨 1되에 4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인가. 비현실 세계를 향한 기다림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작은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열려라 참깨!"

이제 더 이상 동화나라에서 입으로 외우는 주문이 아니다. 결코 요행을 바라는 기원도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자에게는 작은, 그러나 아주 특별한 평화와 기쁨의 세계로 가는 약속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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