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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바스'가 이곳 지명에서 유래

오늘 우리 가족은 런던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차를 달렸다. 런던 서쪽 173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바스(Bath). 바쓰에는 기원 전에 로마인들이 영국 땅에 지은 신전과 공중목욕탕 유적이 남아 있다.

"신영아! 오늘 우리가 갈 여행지는 바스야. 바스"

"바쓰? 도시 이름이 바스예요? 바스는 목욕탕인데‥‥"

"영어에서 목욕탕이라는 뜻의 '바스(Bath)'가 이곳의 지명에서 나온 거야. 이름이 웃겨?"

바스로 가는 길은 영국에서 가장 예쁜 길을 고른 듯 했다. 시골길이 굽이굽이 이어지고 길 사이사이에 작고 예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내는 마치 여행 출발 전에 본 영국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의 시골길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차창 밖에는 가끔 비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 비가 내리고 안개가 쌓이는 경관은 나를 몽환적인 영국의 분위기 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가장 예쁜 길이다.
▲ 로만 바쓰 가는 길. 영국에서도 가장 예쁜 길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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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평지가 이어지던 길에 높은 언덕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언덕은 완만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조금씩 바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차를 잠시 멈추고 언덕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모습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멋진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높은 언덕이 둘러싼 분지, 바스를 향해 언덕을 서서히 내려왔다. 흐린 하늘 아래  베이지 색 석회암의 빛나는 석조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사가 오랜 석회암 건물일수록 세월의 때가 끼면서 짙은 갈색으로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멋진 석조 건물들로 둘러싸인 바스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언지 모를 이 편안함과 산뜻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매력에 이끌려 로마 사람들도 이곳에 도시를 건설했을 것이다.

런던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건축물들의 향연을 보고 있으려니 차의 왼편으로 에이본 강(Avon River)의 강변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스의 구시가는 에이본 강의 강둑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바스는 영국 대표 유적도시로서의 멋을 뽐내고 있었다.

로만 바스는 가장 유명한 여행지라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 로만 바스 이정표 로만 바스는 가장 유명한 여행지라 길 찾기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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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린 후 나의 가족은 북쪽으로 요크 거리(York St.)가 나올 때까지 주변 가게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걸었다. 신영이가 무인 가판대에 1파운드 동전을 넣고 바스 지도를 샀다. 바스의 구시가 건축물들이 입체그림으로 그려진 예쁜 지도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을 샐리 런즈(Sally Lunn's)의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로마시대 유적지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 로만 바스 외관 로마시대 유적지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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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는 걸어서 구시가를 쉽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첨탑이 높게 솟은 바스 성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당 바로 앞에 넓은 광장이 있고 그 광장 오른편에 오늘의 목적지, 로만 바스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 있었다. 광장의 한쪽 면은 로만 바스의 담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담장의 2층 난간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로만 바스를 보호하듯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2천년 전 상류층의 사교장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 로만 바스 입구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곳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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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에서 둘러보는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는 로만 바스. 나는 바스에서 로만 바스를 가장 먼저 구경하고 천천히 둘러보기로 하였다. 사람들이 입장하는 로만 바스 입구는 길 옆에 있지만 로만 바스 내에서는 입구가 2층처럼 느껴졌다. 이 2층에서 내려다 보니 1층처럼 보이는 대형 목욕탕은 땅을 파서 만든 지하 1층에 신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 여행을 직접 와서 구경하는 것은 사진으로 여행지를 간접 구경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Minerva)를 기리는 신전이 있었으나 지금은 로만 바스 전시실 내의 유물로만 남아 있다. 미네르바 신전이 무너진 자리 위에는 1∼4세기에 영국을 점령하고 통치했던 로마인들이 만든 목욕탕, 로만 바스(Roman Baths)가 자리 잡았다. 로마인들이 영국에서 유일하게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이곳을 발견하고 공중 목욕탕을 만든 것이다.

우리는 후대에 복원하면서 만들어진 관람 동선을 따라 목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로마의 전성기 당시에 만들어진 목욕탕 안에는 대규모의 냉탕, 온탕, 탈의실 외에도 예배당, 도서관, 체육관과 정원, 산책로까지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몸을 닦는 곳이 아니라 2천 년 전 상류층 사람들이 피로를 풀고 사람을 만나는 사교의 장이었던 것이다.

이 오랜 목욕 유적은 로마에서 보았던 카라칼라 목욕탕(Terme di Caracalla)보다도 더 원형을 잘 갖추고 있다. 욕탕 벽면의 조각상은 정말이지 로마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정교하다. 또한 이 로만 바스가 다른 로마 목욕탕 유적보다 더 목욕탕 같이 보이는 것은 다른 목욕탕 유적과 달리 대형 목욕탕 안에 지금도 온천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레이트 바스(Great bath) 주변과 터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지붕까지 있어서 규모가 엄청나게 컸을 것 같다. 영국의 대표적인 고대 유적인 로만 바스가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존되어 왔던 것은 아니었다. 로만 바스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발굴되고 복원되었다.

로만 바스를 처음 발굴했을 당시에는 유적이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로만 바스를 묘사한 그림들과 과거의 서적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사실적이고도 과학적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 현재도 온천물이 올라올 뿐만 아니라 물이 빠지는 시설까지 복원되어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로만 바스의 목욕탕 시설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미로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 좌우에 잘 만들어진 전시실이 이어진다. 전시실에는 로만 바스의 발굴 과정과 역사가 상세하게 재현되어 있다. 신전 유물들이 전시된 전시실을 지나자 목욕시설이 나왔다. 비싼 입장료만큼 동영상 등 볼거리도 많지만 관광객이 너무 긴 줄을 서서 발걸음을 앞으로 쉽게 내딛을 수가 없다.

온천수, 몸만 담그지 않고 마시기까지

로만 바스 펌프룸에서는 온천수가 솟아올라 목욕탕 안으로 흘러든다.
▲ 펌프룸 로만 바스 펌프룸에서는 온천수가 솟아올라 목욕탕 안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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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바스(Great bath)의 대형 목욕탕 안을 채우고 있는 온천수는 이끼 같은 초록빛을 띠고 있는데 이는 석회와 미네랄이 풍부하게 섞여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 그레이트 바스의 온천수가 조금 탁해 보이지만 로마시대에는 온천에서 사용된 물이 자연스럽게 에이본 강(Avon River)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물이 넘치지 않으면서 새 물로 교환되었다고 한다.

무려 2천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보존 상태는 놀랍다. '목욕탕'이라고 하면 서민적인 느낌이 들지만 이 로만 바스 '목욕탕'은 상당히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 로만 바스 내부를 돌아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시대의 석재 바닥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신화 같은 역사의 유적을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을 입장시키고 자유롭게 돌아보게 한 것이다. 같은 영국 내의 스톤 헨지(Stone Henge)만 해도 20m 밖에서만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로만 바스는 자유롭게 유적을 밟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에 복원한 유적이기 때문일까? 우리나라의 경우로 치자면 석굴암 내부를 외국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며 둘러볼 수 있게 한 것이니 놀랍기만 하다.

바스 시민이 즐겨 찾는 큰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 펌프룸 식당 바스 시민이 즐겨 찾는 큰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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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온천의 한 가운데에서 온천수를 뿜어 올리는 수원지, 펌프 룸(pump room)으로 갔다. 땅 속에서 뿜어져 나온 따뜻한 온천수가 펌프룸을 지나 목욕탕의 거대한 욕조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펌프룸 일부는 많은 바스 시민이 이용하는 식당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펌프룸에서 온천수를 마셔 볼 기회를 얻었다. 생각해 보니 온천은 여러 번 가 보았지만 온천수를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유리컵에 담긴 온천수를 마셔볼 수 있다.
▲ 로만 바스 온천수 유리컵에 담긴 온천수를 마셔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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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온천수를 유리컵에 받아 먹고 있으니 온천수를 마셔도 탈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로마시대부터 유명했다는 바스의 미네랄 온천수를 마셔볼 기회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관광객들 사이에 줄을 서서 한 잔씩 나눠주는 온천수를 받아 들었다. 신영이는 냄새가 이상하다며 굳이 먹지 않겠다고 했지만 계속 설득하여 한 입 마셔보게 하였다.

나는 조금씩 온천수를 들이켰다. 이 온천수의 물맛은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맛이었다. 묘한 느낌이 입 안을 맴돌았다.

  "대장암 검사 때 장을 비우게 위해 마시는 관장약을 미지근하게 데운 것 같은 느낌이야. 아니, 마치 계란 썩은 물을 마신 듯한 미지근한 느낌이야."

아내도 온천수를 살짝 들이마셨다.
"마치 혀를 깨물었을 때 느끼는 저리고 비릿한 피 맛이 나는 것 같아."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마셔보니 정말 혀에서 나오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신영이는 역시 얼굴을 찡그렸다.

"왜 이런 온천수를 마시는지 모르겠어!"

로마인처럼 온천욕을 하고 싶었건만

마치 혀를 깨문 것 같은 비릿한 맛이 난다.
▲ 온천수 마시기 마치 혀를 깨문 것 같은 비릿한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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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영이에게 여행을 나오면 현지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국내에 들어가서 생각하면 안 해 봐서 후회되는 일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해 본 것과 경험하지 않고 들어서 아는 사실은 천지 차이기 때문이다.

로만 바스 내부 전경을 둘러볼 수 있다.
▲ 로만 바스 테라스 로만 바스 내부 전경을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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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로만 바스 2층에 위치한 테라스에 올라가 보았다. 테라스 바로 아래의 1층에 직사각형 모양의 노천 온천탕, 그레이트 바스(Great Bath)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연한 초록 빛깔의 온천에서는 지금도 약 46℃의 뜨끈한 진짜 온천수가 로마시대와 다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로마시대 이후 지금까지 온천수가 끊임없이 이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온천수가 가득 담긴 로마의 목욕 유적이다.
▲ 그레이트 바스 온천수가 가득 담긴 로마의 목욕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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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목욕탕, 그레이트 바스에는 약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로마의 목욕시설을 보면서 로마 사람 같이 이곳에서 온천욕을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왔다.

2천년의 세월은 내 앞에서 멈춘 듯 했다. 주변에 관광객은 많지만 나는 조용히 온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라스 밖으로 얼굴을 드니 바스 성당의 첨탑이 장엄하게 다가왔다. 바스는 영국의 다른 곳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곳이었다.

덧붙이는 글 | - 이 여행기는 2011년 7.17일~7.27일의 영국 여행 기록입니다.
-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80편이 있습니다.



태그:#영국, #바쓰, #로만 바쓰, #그레이트 바쓰, #펌프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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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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