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작가 정정엽 아홉번째 개인전 부제는 Off bean(콩의 외출)이다. 지난 봄, 서울 가회동에서 한남동으로 옮긴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린다. 때 마추어 '출판회사 헥사곤'에서 한국현대미술선집으로 '정정엽 아트북'도 함께 출간되면서 관객들이 보다 쉽고 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갤러리 스케이프(대표: 손경애)에서 정정엽 전을 기획한 것은 2년전에 이어 두번째다. 스케이프에서 기획 전시된 작품들은 미술계 내부에 깊은 울림을 주면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장기적인 전망과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도약을 꾀하고 있는 갤러리다. 신선하고 감성적인 기획, 투명하고 합리적인 팀운영이 작가와 관객의 발길을 당기고 컬렉터들의 마음을 끌고 있다. 며칠 전, 무역센터에서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에 참가중인 갤러리 스케이프 큐레이터 심소미씨를 만났다.
-스케이프는 어떤 갤러리죠?"판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한국에 좋은 작가들의 우수한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특히, 국내에서 인정 받고 있지만 해외에서 모르는 작가들을 적극 프로모션하고 있어요."
-어떤 작가들을 지원하죠?"저마다 내면의 세계를 독특한 감성으로 표현하는 작가들이죠. 현재 국내작가로는 김성수,김정욱, 정수진, 정정엽, 천성명, 이형구 등이며 점차 확대해 나갈 거예요. 그동안 암스텔담, 런던, 도쿄, 홍콩, 상해 등 해외 미술 시장을 통하여 작품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하면서, 실제 해외 컬렉터를 넓혀 나가는 데 나름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요."
-정정엽 작가를 프로모션한 배경은?"회화,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그리고 엑티비한 페미니스트로서 하나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다채롭게 활동하는 분인데요. 그 가운데 '팥' 작품들은 회화적으로나 조형성에 있어서 차별성이 있고 주목할 만한 작업이에요. 2009년 기획전에서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고 해외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작가라 생각해요."
-그 때와 지금, 어떤 변화와 의미가 있죠?"2009년 붉은 팥들은 여성들의 일상과 현실을 배경으로 골목, 계단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징글맞고 억압된 감정이 곡식이라는 '팥' 이미지로 '확' 쏟아져 나온 거죠. 며칠전 선생님 작업장에 갔을 때 긴 시간이 드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많은 작업량과 그 열정에 놀랐어요. 또한 구체적인 배경 대신 추상화 되고 오색콩들이 결합하면서 한층 너그럽고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정엽은 어떤 작가죠?"현대미술의 흐름을 감지하면서 유연하게 풀어 나가는 층이 다양한 작가죠. 마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곡식이 흘러가는 것처럼 본인의 포지션을 만들어 가죠. 팥 한 알, 한 알에 시작하여 무한함을 모아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데, 독단적 시각이 아니라 열린 마음을 가진 페미니스트로서 씨앗들을 통해 삶과 그림을 보듬으려는 작가 같아요."
정정엽 작품 가운데 '콩 그림'만 모아 그동안 그린 씨알들을 얼추 헤아려 보았다. 100만 알은 되겠다. 그냥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노릇인데 한 알, 한 알, 붓으로 100만알을 그렸으니 지난한 시간과 반복된 노동은 상식과 평범을 넘어선다. 그 많은 소재 가운데 왜 하필 '콩'이며, 작가에게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콩만 그리지는 않았다. 인물과 동물, 나무와 나물도 그리고 퍼포먼스도 했다. 그래도 짚어 보면 뛰는 맥박은 같다. 그것은 자연과 생명, 노동과 생산의 차별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웃에 사는 농사꾼이 작가의 그림을 보고 '그림으로 농사를 짓는군요' 라고 친근감을 보이는 것도 다른 현대 작가들이 들을 수 없는 찬사다.
정정엽이 일구어 내는 콩 그림의 매력은 무엇인가? 소위, 현대미술이 대중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별천지가 아니라 우리네 삶과 현실 속에 몸을 비비고 있는 점이다. 비록 억압과 고통 따위가 현기증을 일으키더라도 비틀거리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반란을 일삼고, 축제로 반전시키는데 회화와 조형의 힘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콩그림의 노동증산적 제작방식은 현대미술의 즉물적 사실주의나 몰개성으로 보이는 팝아트의 노동집약적 조형방식과는 단호하게 구별 짓는다.
자연의 위대함, 생명의 아름다움, 씨알의 생산성, 여성과 노동처럼 콩이 상징하는 뜻은 여럿이다. 또한 수많은 씨알을 일일이 화면에 증식시키는 과정이 미치도록 담담하다. 이 느긋하고 느릿한 그리기 과정은 야성을 되살리고 생체에너지를 복권하려는 작가의 일상적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현대사회와 예술이 처한 위기를 풀어내는 하나의 대안적 삶이기도 하다.
현대는 이기와 편리를 위해 과학문명과 기계 상품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자본과 권력, 속도와 경쟁은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 결과 생태는 파괴되고 양극화와 차별은 사그라들 줄 모른다. 정정엽의 콩그림에서 풍성하고 느릿한 제작 방식은 현대사회에 대한 반감이요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기도 하다.
정정엽 작가는 '먹히는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작품에 담아왔다. 곡식, 나물, 여성,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을 사회적 통찰로 보듬러 왔다. 이들을 품는 태도는 가부장적인 인습이나 권위로 부터 자유롭다. 흙처럼 보드랍고, 바람처럼 유연하다. 들과 숲, 산과 바다, 하늘과 별, 자연과 닿아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노작을 곁들여 느릿느릿 성찰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다.
예술을 통한 사회 변혁과 여성주의 작가로서 사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드물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면서 외면할 수 없는 의무감이 있다. 내가 사는 사회 속 구조적 모순을 미술로 살려 내는 일은 지난 하지만 가슴을 뛰게 한다. 그녀가 일상에 박힌 모순을 피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은 길들여 지지 않은 야성과 꿈틀대는 모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들이 하기 좋은 가을 날. 풍성한 오색 콩과 나물 만찬이 펼쳐진다. 눈으로 먹는 잔치집. 입장료도 없으니 흔쾌히 정정엽 그림과 예술혼을 마주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정 정 엽 http://jungjungyeob.com
1962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85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2009 제8회 개인전: 얼굴 풍경, 대안공간 아트포럼 리, 부천 .
제7회 개인전: Red Bean,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2006 제6회 개인전: 지워지다, 아르코미술관, 서울
멸종, 봉화 비나리 산골미술관, 봉화
2002 제5회 개인전, 서호갤러리, 서호미술관, 양평, 서울
2001 제4회 개인전: 낯선 생명, 그 생명의 두께, 신세계갤러리, 인천
2000 제3회 개인전: 봇물, 인사미술공간, 서울
1998 제2회 개인전, 금호미술관, 서울
1995 제1회 개인전: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 이십일세기 화랑, 서울
갤러리스케이프 02-747-4675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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