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광주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 상영으로 장애인 성폭력 및 장애인생활시설 문제에 대한 분노가 일고 있다. 그동안 장애인 성폭력 문제는 사회적 이슈로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적극적인 대책이나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그 심각성에 대한 적절한 견해조차 밝히지 않았다.

 

<도가니>를 계기로 국민총리실을 비롯한 5개 정부 부처가 내놓은 '장애인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대책'(2011년 10월 7일 발표)은 장애인 성폭력 관련 정부 차원의 최초 대책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이 대책에서 장애인 성폭력 가해자 처벌 강화, 장애인 피해자 보호 확대 방안 등을 제시했다.  

 

'강간'과 '장애'에 대한 왜곡된 시각

 

성폭력 관련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성폭력 가해자 처벌 강화와 다양화(전자발찌 부착, 화학적 거세 등)는 매번 대책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개별 범죄 행위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만이 아닌, 장애여성을 성범죄에 취약하게 만드는 사회적 현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가해자 처벌이 강화돼도, 장애인 성범죄는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아래의 사례를 한 번 보자.

 

지적장애가 있는 A씨는 장애인작업장에서 일했다. 한 남성 봉사자(가해자)를 작업장 교사로 오인하였다. 가해자의 오랜 성폭력에도 A씨는 그를 교사로 오인했다. 가해자에게 잘못을 하면 작업장에서 더는 일을 못 할까 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일관성이 결여됐고, 피해자인 지적장애 여성이 성폭력특례법 6조의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지적장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우리 사회의 수사·재판 기관은 단지 지적장애인의 진술에서 일관성과 논리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배척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위 사건에서 재판부는 피해자가 작업장을 다닐 수 있는 장애인(장애가 심하지 않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건 당시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라고 봤다.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라는 걸 입증해야 하는 건 비단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강간죄에서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현실적으로 범죄가 성립된다. 피·가해자의 다양한 사회적 권력관계 등을 보지 않고, 단지 폭행이나 협박이 약하여 피해자가 저항할 여지가 있었다면 강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강간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장애인 강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애 자체가 항거불능 상태인데도 '저항할 수 없음'을 또 입증해야만 한다.

 

여러 판례에서 재판부는 피해 지적장애여성이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성교육을 받았고, 임신·출산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피해자의 장애가 '항거불능' 상태라는 걸 부정했다. 그러나 이는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와 상황에 대한 지독한 외면이다.

 

사례의 지적장애 피해 여성의 경우, 가해를 한 비장애 남성 교사(비록 A씨가 오인한 것이었지만)와 작업장 이용 장애여성이란 신분·상황은 일차적 권력관계를 형성한다. 더욱이 피해 장애여성에게 작업장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직장이고, 교사라는 가해자의 위치는 이미 피해자를 '항거불능' 상태에 놓이게 한 셈이다.

 

성폭력 재판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가해자의 '(성적)폭력'이지 피해자의 '항거불능'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 법적용은 피해자의 항거불능 증명을 요구한다. 

 

장애여성 피해자 사정 제대로 살폈나?

 

정부는 이번 종합대책에서 장애인 피해자가 수사·재판과정에서 2차 피해를 경험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제 현장에서 성폭력 피해 장애여성은 고소에서 수사·재판까지 반복되는 진술, 형사절차 과정의 까다로움, 의사소통 등의 문제 때문에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이 사례를 보자. 한 지적장애 여성이 성폭력으로 임신을 해 피해 사실이 드러난 적이 있다. 가해자가 여러 차례 범행을 자백했다. 하지만 지적장애를 가진 피해자가 "(성폭력) 한 번"이라고 진술하자, 재판부는 그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 범행에 대해 증거가 없다(1회 범행은 피해자가 임신한 사실이 증거가 되었다)는 이유로 공소기각을 결정했다.

 

성폭력 범행이 인정되려면 피해자의 증언은 초동수사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번복되지 않아야 하고, 다른 증거와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수사·재판부는 범행 날짜와 시각, 피고인과 피해자의 행동, 주변 상황에 대한 진술이 명확하고 논리에 맞을 것을 요구한다. 제3자 증인이나 다른 증거가 부족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비장애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장애 특성상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지적장애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숫자 개념이나 사건의 선후관계, 인과관계 개념이 약하거나 추상적인 표현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지적장애인은 수사기관이나 법정의 요구에 맞게 피해를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악용해 법정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은 피해자에게 불리한 내용의 질문을 더욱 추상화해 던지기도 한다. 지적장애인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유도된 질문을 구분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답하기 일쑤며, 그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오해 받기도 한다. 

 

이 사례에서처럼, 장애에 대한 수사·재판부의 이해 정도는 유무죄는 물론 범행 사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수사·재판부의 '장애'에 대한 이해를 높일 방안은 쉽게 나오지 않고 있다. 


절차보조인 제도가 필요하다

 

장애인의 수사·재판 절차 및 의사소통을 보조해 줄 보조인 제도가 대안으로 제기될 수 있으나, 현재 현장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상담소는 사법절차보조에서 배제되기 일쑤다. 현행법에 성폭력 피해 장애인 및 아동의 경우 피해자 진술 시 '신뢰관계자'가 동석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만 있다. 게다가 '신뢰관계자'가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다.   

 

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대한 대안은 쉽게 나올 수 없다. 법만이 문제가 아니다. 장애를 어떻게 이해하고 보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더불어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사람으로서 '비장애 중심성'을 극복하는 것도 고민이다.

 

특히 입법을 준비하는 '절차보조인 제도'는 형사절차 참여 및 의사소통에 배제된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의 법적권리 보장 차원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황지성 기자는 장애여성공감 부설 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


#도가니#지적장애#성폭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