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버린 동네 서점. 하지만 아직도 당당히 마을의 '문화적 샘터'로 남아 있는 동네 서점들이 있습니다. '마을 책방을 가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추억의 공간, 배움의 공간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마을 책방'을 찾아가, 문화와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획시리즈입니다. [편집자말]
 서울 서교동에 있는 마을책방 '땡스북스'
서울 서교동에 있는 마을책방 '땡스북스' ⓒ 김경훈

올해 3월, '젊음의 거리' 홍대 앞에 조그마한 동네서점이 하나 생겼다. 이름은 '땡스북스(THANKS BOOKS, 서울 마포구 서교동)'. 젊음의 거리라고 하지만, 이미 상업지구와 유흥가가 돼버린 홍대 거리와 동네서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에 밀려 동네서점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는 현실에서 과감하게 동네서점을 시작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래서 호기심이 동했다. 과연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대세를 거스르고 동네서점을 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졌다. 11월 3일, 나는 홍대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사랑방' 동네서점과 '디자인'이 만났다

 땡스북스 내부.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땡스북스 내부.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 땡스북스

"기다림은 시간을 윤기나게 한다"고 했던가. 누구를 기다리지 않아도 땡스북스의 시간에는 윤기가 흐른다. 서점을 들어선 순간,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은은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북카페를 겸하고 있어, 한쪽에서는 연인들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다른 한편에서는 길을 가던 행인들이 잠깐 서점에 들러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둘러본다. 번잡한 일은 잠시 잊고 오랫동안 누리지 못한 여유를 즐긴다.

서점이 아니라 누군가의 서재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땡스북스에는 이기섭 대표 이하 직원들의 취향이 곳곳에 배어 있다. 서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직원들이 매주 선정하는 금주의 책, 한쪽에 진열된 음악 CD부터 유난히 많은 디자인 서적까지 모든 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인위적인 세련됨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듯한 정감 있는 공간. 땡스북스가 추구하는 공간이다.

땡스북스의 이기섭 대표가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웅변하듯 서점 한편을 가득 메운 디자인 코너를 기웃거리다 나의 미술적 감성이 바닥이라는 슬픈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만화책 코너로 발길을 돌린다. 아쉽게도 내가 찾던 <시빌 워>는 없지만,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과 앨런 무어의 <배트맨 : 킬링 조크>가 눈길을 끈다.

바로 책을 집어들까 하다가 조금 더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카페모카를 주문한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주변의 판매대를 둘러보다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을 발견한다. 나치즘을 피해 미국으로 왔다가 매카시즘의 광풍에 휩쓸려 또다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 나치즘과 2차 대전의 실상을 고발한 그의 사진집을 뒤적이며 커피를 마신다. 내가 집어든 책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음악은 잔잔하고 커피 향은 은은하다.

커피와 함께 한가로움을 즐기는 동안에도 여러 명이 서점에 들어와 책을 둘러본다.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들고 서점 곳곳을 카메라에 담는 여성분, 디자인 코너에 한참 머물러 있는 외국인,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점을 둘러보는 연인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이토록 윤기 나는 시간을 즐기는 순간이 즐겁다. 땡스북스라는 공간에 함께 하는 이 순간만큼은 일종의 '서점 공동체'에 속한 셈이다.

'읽는 재미'에서 '보는 재미'로

 땡스북스에는 유난히 디자인 관련 서적이 많다. 서점 한쪽벽을 가득 채운 디자인 서적.
땡스북스에는 유난히 디자인 관련 서적이 많다. 서점 한쪽벽을 가득 채운 디자인 서적. ⓒ 김경훈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곳을 온 목적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땡스북스의 최혜영 매니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선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동네서점이 하나둘 문을 닫는 현실에서 어떻게 땡스북스를 시작하게 된 걸까.

"대표님과 실장님 두 분 다 디자이너신데, 함께 디자인 작업을 하시다가 뭔가 문화적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두 분 다 굉장히 책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상업적인 것이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홍대는 아직 문화적인 것들이 남아 있는 공간이잖아요. 또 홍대 근처에 출판사가 굉장히 많은데, 그런 점을 살려서 동네서점이 점차 사라지는 현실에서 새로운 동네서점의 롤모델을 제시하고 싶어서 땡스북스를 시작하게 됐어요."

새로운 동네서점의 롤모델?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런 땡스북스가 롤모델로 삼은 서점이 있는지 물어봤다.

"땡스북스의 모델은 일본 교토의 작은 마을에 있는 케이분샤 서점이에요. 갖가지 책과 잡화가 같이 있는 곳인데, 저희가 처음에 본보기로 삼은 곳도 그런 곳이에요. 동네 주민과 주변의 교토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편하게 들를 수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죠. 케이분샤처럼 손님들이 와서 책을 구매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이 되자는 게 저희 목표에요."

조금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문을 연 지 1년도 안 되는 동네서점이 과연 장사가 잘 될지 궁금했다. 케이분샤 서점처럼 땡스북스도 동네 주민이 자주 찾고 있을까?

"다행히 손님은 많이 찾아오세요. 주위 분들이 많이 오시는데, 동네서점이 살아났다는 것에 굉장히 신기해하세요. 매거진을 보고 찾아오시는 분도 계시지만, 저희는 단골분이 많아요. 주위에 회사가 많은데, 거기서 일하시는 회사원이나 홍대 학생, 디자인하는 분들이 주로 찾아오시죠."

땡스북스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네 주민들의 참여를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출판사와 함께 저자 강연회, 출판 기념회를 하고 있고, 세미나나 워크숍도 함께 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출판사와 함께 하는 전시회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한 전시를 하고 싶어요. 저희가 지금 한 달에 한 번 출판사와 함께 전시를 하는데,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런 전시회가 브랜드를 알리거나 책을 파는 데 굉장히 좋은 기회거든요. 5월 20일부터 6월 16일까지 요네하라 마리 특별전을 했는데요, 마음산책이라는 출판사에서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많이 번역해서 냈는데, 저희는 그 책의 일본어 원서를 같이 진열했어요. 일본의 출판형태와 우리의 출판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보는 재미가 있잖아요. 단순히 책만 파는 것보다 조금 확장된 형태를 하고 싶어요."

"동네서점에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어요"

 땡스북스에서 판매하고 있는 음반. 땡스북스에서는 책과 함께 관련 있는 음반을 같이 진열해두고 판매한다.
땡스북스에서 판매하고 있는 음반. 땡스북스에서는 책과 함께 관련 있는 음반을 같이 진열해두고 판매한다. ⓒ 김경훈

책만 파는 것을 넘어 보다 확장된 것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책뿐만 아니라 책과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을 저희는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CD나 노트, 잡화류를 같이 두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가령 그냥 여행서를 두는 것보다 여행서와 함께 지도 같은 다이어리나 사진 앨범 같은 것을 같이 두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거든요. 그냥 단순히 책보다는 뭔가 더 확장된 것을 하고 싶어요."

땡스북스의 또 다른 특징은 출판사와 직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홍대에 있는 출판사는 물론이고, 멀리서 찾아와 거래를 하는 출판사도 있다. 이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앞서 말한 전시회도 그 일환이다.

"저희가 거래하는 출판사가 70개 정도 돼요. 이곳들을 하나하나 관리해야 하니까 일이 많아서 어렵죠. 하지만 물건을 한번 받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일이 많아서 힘들지만, 좋은 점이 더 많아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죠. 출판사와 같이 전시회를 기획한다거나 함께 뭔가를 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껴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땡스북스는 아직 문을 연 지 1년도 안 되는 서점이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면서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이고, 앞으로 땡스북스가 어떤 공간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땡스북스의 지향점이 '동네'서점이라는 것이다. 땡스북스가 꿈꾸는 공간은 동네 주민이 언제든지 찾아와 책을 뒤적이고,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동네'서점을 만드는 것은 결국 동네 주민이다. 아무리 서점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면 동네 사랑방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최혜영 매니저는 사람들이 땡스북스를 비롯한 동네서점에 더 많은 관심을 두기를 바란다.

"물론 저희 서점에 들러서 책을 사시면 좋겠지만, 책을 사시지 않더라도 많은 분들이 이런 공간에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동네서점에는 옛날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남아 있어요. 저희도 물론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더 만들어가야겠죠."

동네서점의 가치는 '작고 소소함'

 땡스북스에 진열된 책들. 서점 밖에서 책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해두었다.
땡스북스에 진열된 책들. 서점 밖에서 책 표지가 보이도록 진열해두었다. ⓒ 김경훈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서점을 나서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서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동네서점이 밤하늘의 별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처럼 눈부시게 강렬한 빛을 내뿜지도 않고, 달처럼 홀로 고고히 밤의 어둠을 밝히지도 않지만, 작고 미약하게나마 제각각의 빛을 발하는 별.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그 별을 바라보며 옛 추억에 빠지기도 하고 작은 위안을 얻기도 한다. 밤하늘에 홀로 뜬 달은 아름답지만, 왠지 허전해 보인다. 수많은 별이 나름의 빛을 발할 때, 비로소 밤하늘은 꽉 차 보인다.

문득 작고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크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들에 밀려 주변부로 밀려나고 어느새 사라져가는 작은 것들의 가치를 떠올린다.

동네서점의 가치는 바로 그 작고 소소함에 있다. 대형서점처럼 모든 종류의 책을 빠짐없이 갖추지도 않고, 인터넷 서점처럼 다양한 마일리지와 할인쿠폰도 없지만, 길을 지나다가도 언제든지 들어가 마음에 드는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 타인의 서재를 은밀히 엿보는 즐거움을 느끼며, 정신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잠시 잊고 윤기나는 시간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곳. 아마 그런 곳이 동네서점이리라.

가끔은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우리 주변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동네서점을 찾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아 그 빛이 닿지 않을 뿐,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주는 법이다.


#땡스북스#동네서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