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버린 동네 서점. 하지만 아직도 당당히 마을의 '문화적 샘터'로 남아 있는 동네 서점들이 있습니다. '마을 책방을 가다'는 마을 사람들에게 추억의 공간, 배움의 공간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마을 책방'을 찾아가, 문화와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획시리즈입니다. [편집자말]
장날이면 수백 리 떨어진 곳에서 온 장사치들이 도로 한쪽을 점령하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오백원을 실랑이 하는 모습. 군데군데 빈 상가의 외관은 벗겨진 페인트만큼이나 을씨년스럽다. 썰렁하고 음침한 터미널에는 도시의 노령화를 보여주는 듯, 노인들로 가득 차 있다. 버스에 오르기도 힘들 정도로 굽은 허리에 가득 짐을 지고 버스에 오르는 모습.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이 또한 환갑이 훨씬 지났을듯한 노년의 여성이다.

전북 진안군 진안읍. 오지로 소문난 곳에 댐이 들어서고 중심지가 물에 잠기면서 수만 명이 쫓겨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다. 보상받아 남은 사람도 농토를 잃고 친구도 잃고 자식들도 다 대도시로 빼앗긴 채 외롭게 지키는 콘크리트 움막들. 읍 소재지 한쪽에 수많은 장삿집이 간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고 있는 중에도 수십 년을 한 간판으로 문을 열고 있는 기적 같은 곳이 있다.

유행을 좇아 업종을 바꾸고 수익을 위해 겸업을 하는 일도 없었다. 무려 35년간 '책' 하나만을 상품으로 한 가게를 유지하고 있다. 성지서림. 이름처럼 인구 2만의 도시 안에서 책의 '성지(聖地)'가 되고 싶었을까(사실 서점의 이름은 한자로 '成志'다). 지난 17일 성지서림에서 만난 주인장 김창연(72)씨다. 진안군 용담면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니고 전주에서 학교를 나왔다.

통로와 그가 앉은 자리외에는 책이 다 차지하고 있는 서점 풍경.
 통로와 그가 앉은 자리외에는 책이 다 차지하고 있는 서점 풍경.
ⓒ 임준연

관련사진보기


8시만 되면 '유령도시'가 되는 오지 마을

인터넷 서점이 대세인 지금에 도대체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세월을 낚는 것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도서관에서 '문지기'를 하면서 책과 친해졌고 "돈이 없고 능력도 없어" 어떤 다른 사업도 생각하기 힘들었단다. 결정적인 계기는 전주에 있는 홍지서림 사장의 권유였다. "뒤를 봐 줄 테니 서점을 해 보라"는 것.

군대를 제대하고 진안극장이 있던 자리(현재 진안읍교회 자리)에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세 개의 서점이 더 있었는데, 그 뒤로 차례로 문을 닫거나 문구사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동안 자리를 세 차례 옮기는 동안에도 김 대표는 "오로지 책만 팔았다"고 회상한다.

오후 8시가 되면 "유령도시"로 변하는 곳. 24시간 편의점과 한 손에 꼽는 숫자의 술집과 노래방 외에는 간판 불빛마저 꺼진 곳이 된다. 낮에 활동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퇴근시간이 되면 인근 도시인 전주로 발길을 재촉한다. 사람보다 차가 더 많아 보이는 곳.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고 시장에도 장날이나 되어야 겨우 오가는 사람들이 보일 정도다.

그 늙은 도시에 서점이라니. 책은 죽어가고 있다. 인터넷 환경의 발달로 책을 한곳에 모아 전국의 배송차량에 실어 각 가정으로 보내는 시스템이 공고해지는 요즈음, 소도시의 읍 한쪽에 책이 가득 쌓인 공간을 만나는 새로움이라니.

참고서들이 한쪽에 가득하고 산을 이룬 단행본의 더미가 매장으로 겨우 한 사람 다닐 만한 소로를 만들고 있다. 한쪽에 놓인 오래된 철제책상 위에는 티브이와 각 대리점과의 거래를 증명하는 영수증철이 눈에 띄었다. 앞, 뒤, 옆쪽의 책들. 오래된 것과 새 책들의 조화에 둘러싸여 책과 사람의 얼굴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유일하게 세워져 있는 책들. 그 책 주변에는 요즘 제법 팔린다는 책들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누워있다.
 유일하게 세워져 있는 책들. 그 책 주변에는 요즘 제법 팔린다는 책들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누워있다.
ⓒ 임준연

관련사진보기


주인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책방'

"힘들어요. 이거 내 건물이니까 하는 것이지. 다른 좋은 것 있으면 진즉에 때려쳐야 했지요."

한 집 건너 노인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책을 파는' 행위가 쉬울 리가 없다.

"젊은 사람도 책 안 읽어요. 요즘 스마트폰이다 컴퓨터다 해서 거기에 신경 쓰지 누가 책을 읽겠어요."

진안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 읽는 사람들'의 비율이 군 단위에서는 도시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데에 동네서점의 위기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소수의 책 구매자도 대부분 인터넷 서점을 통해 낮은 가격으로 책을 구매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세태도 한몫할 터.

"점점 더 어려워요. 여기 보세요. 그래도 베스트셀러라고 주문해서 사왔는데, 어디 나가야 말이죠."

대부분의 책이 누워서 쌓여 있는 계단 한쪽에 <스티브잡스> <닥치고 정치> <도가니> 등이 전면을 뽐내고 있었다.

"여기 말고 옆방에도 한가득 있고 또 2층에도 이만큼 쌓여 있어요."

팔리지 않는 책을 안고 사는 그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기보다 책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 부러워졌다. 그와 대화하는 1시간여 동안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사진을 찍고 대화를 마치고 떠나려는 나에게 책 한 권을 안겨준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나서였다.

"이게 초판은 아니라서 희소성은 덜하지만 20년이 넘은 책이어요. 2500원. 당시 가격인데 지금 그 돈이면 겨우 노트 한 권이지 책값이냐구. 세 권 가지고 있는데 한 권 줄게요. 이제 두 권 남았네."

"이게 2천5백원. 지금" 책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오래된 서점 주인. 그가 들고 있는 책들의 가격엔 지금 책반권도 사기 힘들게 되었다.
 "이게 2천5백원. 지금" 책과 함께 나이들어가는 오래된 서점 주인. 그가 들고 있는 책들의 가격엔 지금 책반권도 사기 힘들게 되었다.
ⓒ 임준연

관련사진보기


그가 젊은 시절에 도서관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한 장씩 뜯어가는 바람에 책 표지만 남는 것을 봤다는 시집이었다.

그가 전해준 <한하운 시집>. 민일사에서 1987년 발행한 것이다. 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던 한하운의 시집. 한하운의 시 한 편은 마치 지금 그와 서점의 현실과 묘하게 교차되는 듯하다.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 한하운 시 <보리피리> 전문

덧붙이는 글 | 성지서림은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일 문을 엽니다. 때로 점심시간이 길어지기도 퇴근시간이 일러지기도, 또 휴일은 문을 열지 않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책이, 책을 지켜온 사람이 앞으로도 있을 겁니다.



태그:#진안서점, #성지서림, #진안읍서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