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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산고분군의 조문국 경덕왕릉
 금성산고분군의 조문국 경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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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7호인 탑리5층석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오면 금세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 삼거리에서 도리원 방향 왼쪽 도로를 1km정도만 가면 초전리 고인돌에 닿는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들이다.

그런가 하면, 삼거리 너머에는 철기 시대의 의성 사람들이 남긴 대형 무덤들도 있다. 조문국이 남긴 커다란 옛 무덤들로 여겨지는 '금성산 고분군(金城山 古墳群, 기념물 128호)' 유적이다. 200여 기에 이르는 '금성산 고분군'은 이 일대가 아득한 옛날부터 큰 세력을 가진 집단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200여 기의 고분군, 의성의 청동기 세력 '강력' 증언

삼한 시대의 소국이었던 조문국은 벌휴왕 2년(185)에 신라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이 일대의 넓은 땅을 다스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성산 고분군은 조문국 유적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금성산 고분군의 대표 무덤인 '1호 고분'도 조문국 경덕왕릉으로 추정된다. 둘레 74m, 높이 8m 크기인 경덕왕릉은 전통적인 고분의 형식을 보여주며, 봉분 앞에 화강암 비석과 상석이 있다. 비석의 크기는 가로 42cm, 세로 22cm, 높이 1.6m이다.

이 묘가 조문국 경덕왕릉이라고 알려진 것은 의성현령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 사실을 말해준 덕분이다. 이 전설은 숙종(1661∼1720년 재위) 때 사람인 허미수의 문집에 실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덤 일대는 경덕왕릉으로 여겨지기 이전까지는 농사짓는 외밭이었다고 한다.

문익점 기념비 금성산 고분군 관리사무소 옆에 세워져 있다.
▲ 문익점 기념비 금성산 고분군 관리사무소 옆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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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 입구 문익점 기념비, 면화 재배의 역사 기록

그런가 하면, 고분군 입구에는 색다른 볼거리도 있다. '문익점 면작 기념비'이다. 비석의 앞에 '忠宣公 富民候 江城君 三憂堂 文益漸 先生 棉作 記念'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뒤에는 이 비를 '문익점 선생 면작 기념비 건설회'의 '회장 권중환, 부회장 오국영, 명예고문 김시권, 고문 류시균, 이사 이학귀, 평의원 대표 류상우 이한' 등의 성명을 역시 한자로 밝혀두었다. 명단에는 일본인의 이름도 다섯 명이 들어 있다. 일본인들이 여럿 들어 있는 것은 이 비가 1935년경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에 '삼우당 문익점 선생 면작 기념비'라는, 1935년의 비와 비슷한 이름의 비석이 또 세워져 있어 사람의 마음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 역시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단순한 안내판은 아닌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을 읽어본다.

문익점 기념비를 세운 사람들 비석을 세운 뒤 자신들의 이름을 비석 받침돌 뒷면에 새겨놓았다.
▲ 문익점 기념비를 세운 사람들 비석을 세운 뒤 자신들의 이름을 비석 받침돌 뒷면에 새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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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선생 면작 기념비

고려 공민왕 때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후 귀국할 때 금주성(錦州城)에서 면화 종자를 필관(筆管)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 산청에 시험 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棉作)의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에 면화를 파종(播種)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다. 1909년 처음 파종한 원전(元田)에 주민들이 기념비를 건립했고, 다시 1935년에 금성면 대리리 지금 장소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鉉) 도지사 때에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1991년 12월
義城郡守(의성군수) 申庠徹(신상철)

새로 세워놓은 비석 본래의 문익점기념비 옆에는 문익점의 후손이 의성땅에 목화를 심은 역사를 적어놓은 '안내판' 내용의 돌이 하나 다시 세워졌다.
▲ 새로 세워놓은 비석 본래의 문익점기념비 옆에는 문익점의 후손이 의성땅에 목화를 심은 역사를 적어놓은 '안내판' 내용의 돌이 하나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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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져 있는 내용으로 보면 이것은 비석이기도 하고 안내판이기도 하다. 문익점 선생과 그의 손자가 면화를 심은 일에 대한 기록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세워진 기념비 둘에 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익점 선생의 손자 문승로가 처음 면화를 재배했던 제오리에 주민들이 1909년에 세운 비석이 있고, 1935년에 금성산 고분군 앞인 이 자리에 기념비가 또 세워졌는데, 이곳에 다시 세 번째 비석을 세우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세워진 비석의 내용을 풀어서 읽어본다.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3년 후 돌아올 때 면화 씨앗을 붓대롱에 숨겨서 귀국하였다.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은 경산 산청에서 목화를 시험 재배하여 성공한다. 문익점의 손자 문승로가 의성현감(지금의 군수)로 있으면서 이곳의 기후가 목화를 심고 키우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사실을 파악, 대량 재배에 성공하게 된다. 그후 1909년 주민들은 목화를 처음 재배했던 제오리의 밭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1935년에 다시 고분군 앞에 새 비석이 세워졌다. 그리고 1991년 12월 문익점 선생의 큰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새로운 비석을 세운다.

문익점 선생 덕분에 우리 겨레는 백의(白衣)민족이 되었다. 그러므로 1935년의 기념비에 '富民(부민)' 두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성[民]들의 생활을 '부(富)'하게 만든 분이 바로 문익점 선생이기 때문이다.

총탄 자국 문익점 기념비의 앞면(왼쪽)은 무심히 볼 수 있으나 뒷면은 그렇지 않다. 1950년의 한국전쟁 때의 총알 자국이 곳곳에 선명하다.
▲ 총탄 자국 문익점 기념비의 앞면(왼쪽)은 무심히 볼 수 있으나 뒷면은 그렇지 않다. 1950년의 한국전쟁 때의 총알 자국이 곳곳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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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슬픔이 그대로 남아 있는 비석

그런데 1935년의 기념비를 자세히 보니 목화의 역사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총알 자국이 뚜렷하게 파여 있다. 6·25 때 기념비는 여러 번 죽었던 것이다. 정면으로 총탄에 맞았던 자국이 곳곳에 움푹 파여 있는가 하면, 비스듬히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간 흔적도 많다. 목화를 선물해주신 문익점 선생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고마움에 젖어 한없이 평온하던 마음에 갑자기 시퍼런 파도와도 같은 슬픈 느낌이 젖어온다.

'전쟁의 상처를 벗고 하나 된 조국에서 마음 편하고 위세당당하게 우리 민족이 살아갈 수 있는 그날은 언제 오려나? 모두들 평화를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통일의 '명절'을 기념할 수 있는 '민족사의 기념비'가 될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다시 길을 떠난다. 문익점 선생을 기리는 1909년의 비가 이곳에서 가까이 있다. 제오리의 공룡발자국 바로 옆이다. 제오리 공룡발자국은 세에서 가장 큰 공룡의 발자국이 발견된 곳,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빙하기 유적이다.

문익점 비석 제오리 공룡발자국 바로 옆에 있는 문익점 비석. 제오리는 문익점의 후손이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석은 너무 낡아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
▲ 문익점 비석 제오리 공룡발자국 바로 옆에 있는 문익점 비석. 제오리는 문익점의 후손이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석은 너무 낡아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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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목화가 처음 재배되었다는 공룡발자국 앞에 가보면, 밭[田]만 남긴[遺] 채 목화는 가고 없고 초라한 비석만 외로이 남아 슬픔을 표(表)시하고 있다. 공룡발자국 옆에 글자가 보일 듯 말 듯한 낡은 얼굴로 남아 있는 '忠宣公 三憂堂 文先生 木緜 遺田表(충선공 삼우당 문선생 목면 유전표)' 비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금성산 고분군 앞에서 본 1991년의 기념비에는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쓴다고 했지만, 바람 같은 세월의 무상함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귀신인 모양이다.

'우리 겨레에게 따뜻한 옷을 선물했던 선생의 비석이 눈비에 젖고 폭염에 짓눌려 이제 그만 제빛을 잃었구나…. 목화도 가고 공룡도 사라져버린 이곳에 저 희뿌연 비석과 무거운 발자국만이 상처처럼 남아 인간들의 가벼운 무심(無心)과 자연의 무거운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구나….'

물레, 무명, 문익점 손자들의 이름에서 온 말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물레'라 한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성명 '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래(文來),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런가 하면, 목화를 재배하여 만들어낸 옷감을 '무명'이라 한다. 옷감 짜는 베틀을 만들고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의 성명 '문영'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영(文英), 역시 문익점 선생의 손자이다.

그리고 의성에 목화를 크게 심어 우리 민족 모두가 '백의민족'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게 해준 사람 문승로 또한 문익점의 손자이다.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것으로 옷감을 만드는 방법까지도 연구해낸 정천익은 문익점 선생의 장인어른이다.

정천익과 문익점 선생도 하늘나라로 가고, 선생의 손자들인 문승로, 문래, 문영 또한, 선생을 따라 목화를 심고 가꾸고 사랑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그 뒤를 따라서 갔다. 뿐만 아니다. 목화마저도 이제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그분들을 따라가려는 것인지,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 되었다. 

제오리 공룡발자국 앞에서 바라본 제오리의 들판. 논밭 뒤로 금성산이 보인다.
▲ 제오리 공룡발자국 앞에서 바라본 제오리의 들판. 논밭 뒤로 금성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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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도 '꽃은 목화가 제일'

모든 나무는 꽃을 피운다. 그런데 사람들은 면목(緜木)의 꽃을 '목화(木花)', 즉 '나무의 꽃'이라 부른다. '꽃은 목화가 제일'이라는 속담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이다. 솜도 되는 면목의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실제로도 목화나무 꽃은 정말 예쁘다. 게다가 그 꽃이 나중에는 솜으로 변하여 나무에 매달려 있으니, 식물 재배에서 이만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집에서 목화를 키워보자. 밭에 목화를 심고 키우기는 어렵지만 집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자녀와 함께 목화씨를 심고, 꽃이 피고, 솜을 따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인성교육을 실천하는 일이다.

문익점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世] 살아온[居] 마을[地]이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의 인흥마을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보통 '문씨세거지(文氏世居地)'라 부른다. 언제 그곳엘 한번 가보아야겠다.

 대구 달성군 화원읍의 문씨세거지
 대구 달성군 화원읍의 문씨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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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여행#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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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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