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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털모자에 방한복을 입고 나타나신 무하 이근후 박사님

2월 8일, 최저기온 영하 18도. 오늘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훨씬 밑돌것 같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기러기들은 어김없이 날아왔다. 55년만에 찾아온 강추위의 날씨를 견디며 최전방 오지에 살고 있는 나는 이른 아침 "끼룩끼룩" 날아드는 기러기를 울음소리에 눈을 뜬다.

영하 20도의 한파에 러시아 털모자를 쓰고  방한복을 입고 최전방 오지를 찾아오신 무하 이근후 박사(가운데)님은 마치 전방 GP를 순시하는 노장군처럼 보였다.
 영하 20도의 한파에 러시아 털모자를 쓰고 방한복을 입고 최전방 오지를 찾아오신 무하 이근후 박사(가운데)님은 마치 전방 GP를 순시하는 노장군처럼 보였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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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추운 날씨에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78세의 노(老) 학자이신 무하 이근후 박사님이 위문품(?)까지 들고 이곳 최전방 오지를 방문한 것이다. 훤출한 키에 러시아털모자를 쓴 박사님은 마치 최전방 GP를 순시하는 노장군처럼 보인다. 이곳 우리 집은 비무장지대(DMZ) GP가 지척인 거리에 있다.

이근후 박사 님과는 9·11사태가 발발했던 해인 2001년 네팔에 의료봉사를 함께 다녀 온 인연이 있은 후 지금까지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박사님은 지난 50년 동안 대학병원의 정신과 의사로서 치료와 봉사활동을 수행으로 생각하며 산처럼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아 오신 분이다. 그는 누구나 한번쯤 누려 보았을 사회적인 지위와 보직을 고사하고 정직하고 묵묵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곁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사회에서 소외 받는 사람들과 함께 딩굴며 지내온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회적인 활동도 남들이 잘 맡아서 하기를 꺼려하는 직함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불교상담개발원장(자비의 전화), 광명보육원 이사, 광명보육원 무하사랑방 관장, 사이버종합병원 건강샘 운영자, 청소년성상담운영자, 가족아카데미아 대표, 네팔 이화봉사단당 및 네팔캠프단장, 한국석불문화연구회 회장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음지에서 해오고 있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런 힘든 일들에 대해 "자신은 물 한 컵에 불과 한데, 그 물이 여러가지로 소용되는 이치와 같다"며 같은 일을  단지 이름만 다르게 붙여진 것뿐이라고 대수롭지않게 말한다.

아내의 난치병 치료에 애쓰고 있는 나를 보고 박사님은 끈임없이 희망을 불어 넣어 주셨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을 버려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 박사님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으시는 박사님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에 최전방까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찾아오신 것은 나로서는 예삿일이 아니다. 박사님은 내가 섬진강에서 살고 있을 때에도 우리 집을 꼭 한 번 방문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창원을 다녀오시다가 네비게이션이 말을 듣지않아 운전을 하는 사람이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아 매우 섭섭했다고했다(불가피한 사정으로 예상보다 내가 너무 빨리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는 섬진강 집을 방문할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던 것).

이번에는 결코 기회를 다시는 놓치는 그런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빠른 시일 내(이곳 임진강 집도 세를 살고 있는 집이라 또 다시 언제 이사를 갈지 모르므로)에 방문을 하시겠다며, 박사님이 운영하는 <네팔캠프>카페에 쓴 내 글에 댓글을 달았다. 10대 젊은이처럼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유머를 잃지 않으시는 박사님은 항상 활력이 넘친다.

"ㅋㅋㅋㅋ 해물짬뽕 먹고 다방에서 차 한잔하면 임진년 행운이 절로 올 것 같은 느낌. 보살님도 오신다니 더욱 반갑습니다. 출동 준비 중! 네비게이션 믿고 갑니다. 주소 올려 주세요."

그런데 하필이면 이렇게 추운 날 오시게 되니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 완전무장을 하고 오시라고 했더니 완전히 완전무장을 하고 갈테니 걱정 놓으라고 댓글을 남기셨다.

"완전무장하고 ㅋㅋㅋㅋㅋ 갑니다(추위 대비). 군량미가 필요하나요?"

마침 어제 서울에서 아내의 친구인 보살님 두 분이 와 있었는데, 이 분들은 박사님도 잘 아시는 분들이어서 나는 익살을 부리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글을 남겼다. 

"ㅎㅎㅎ 태풍전망대 PX 보급품이 떨어져 군량이 조달이 어려움,,, 여군 3명, 남군 1명 아사직전에 있음.. 오바~~ 특히 여군들이 보급품을 기대하고 있음 -_-"

군사보호지역이라 네비게이션도 잘 잡히지 않는 우리 집까지 오려면 상당히 고생을 해야 한다. 박사님이 동이리 마을회관에 도착을 했다고 전화가 왔다. 우리 집은 마을회관에서도 2km 정도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마을회관까지 가서 박사님의 차를 에스코트하고 좁은 농로를 따라 집에 도착했다. 댓글에 남긴대로 검정 방한복에 러시아 털모자까지 쓰고 완전무장을 한 박사님이 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네비도 잘 잡히지 않는 먼 길 찾아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지요?"
"네비가 잘 안 잡혀 찾느라 좀 헤매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최전방이 서울에서 이렇게 가깝다니 새삼 다시 한 번 놀랬소이다."

쌀 한 포대와 라면 한 상자를 위문품으로 들고... 

사실 전방 오지하면 마음으로는 멀게 느껴지지만 서울에서 지척인 거리에 있다. 더구나 3.8선을 넘어 군사분계선 가까이에 위치한 우리 집은 방문을 하는 사람들마다 북한 땅이 이렇게 가까운 걸 보고 모두 깜짝 놀란다. 함께 오신 분은 박사님의 동서 부부라고 소개했다. 원래 박사님은 '노 자동차, 노 시계, 노 핸드폰'으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필수품 세가지가 없다. 이른바 <3무> 정신이다.

자가용 대신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시계는 천문으로 짐작하고, 핸드폰은 공해를 유발 하는 개목걸이라며 오랫동안 <3무>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오늘 누구의 차를 타고 이곳 오지를 찾아오실지 매우 궁금했었는데,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동서의 차를 타고 오셨다. 그런데 박사님은 트렁크를 열더니 10kg 들이 연천 쌀 한 포대와 농심라면 한 상자를 들고 오시는 게 아닌가?

무하 박사님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오신 쌀 한 포대와 라면 한 상자. 이식량이면 우리부부가 1달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무하 박사님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오신 쌀 한 포대와 라면 한 상자. 이식량이면 우리부부가 1달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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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 집에 쌀이 떨어진 줄 어떻게 아셨어요?"
"최전방 오지라 군량미가 떨어질만도 하지 않았나? 그래서 위문품으로 연천 쌀을 사왔지. 허허허"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하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쌀과 라면을 받고 아내는 입이 귀에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집에 쌀도 거의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내가 병원에 갈 때에 서울에서 대부분 먹 거리 장을 봐 온다. 이곳 DMZ 부근은 물건을 사려면 전곡읍으로 나가야 하는데, 집에서 거리도 멀고 가격도 서울보다는 상당히 비싸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갈 때에 식량과 필요한 물건을 사온다.

"그런데 집이 너무 좋군. 완전히 별장이네."
"네, 남의 집이지만 인연이 닿아 집사람의 소원을 풀게 되었지요."
"꿈을 계속 꾸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경우든지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며 꿈을 꾸다보면 꿈은 이루어지는 법이거든."
"호호, 그런가 봅니다. 제가 2층 집을 그렇게도 원했는데 여긴 2층 다락방도 있어요. 남의 집이긴 하지만요."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그 집을 사용을 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동안은 그 사람이 임자거든. 나도 한 때는 돈도 없으면서 별장을 지으려고 애를 써 보았는데 여기저기서 자기네 별장을 사용해 달라고 하여 포기하고 말았어요. 대신 별장이 전국에 생기게 되었어. 빈 집에 온기를 불어 넣어주니 별장 주인들도 좋아하며 자꾸만 살아달라고 하는 거야. 허허허."

거실에서 차 한 잔을 하며 잠시 한담을 나누는데 벌써 시간이 1시가 넘었다. 박사님은 귀빈각에서 홍합짬뽕을 한그릇 먹고, 오래된 시골다방인 <화이트 다방>에서 차 한 잔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귀빈각에 전화를 해서 짬뽕 세 그릇에 쟁반짜장 하나를 시켰다. 전화를 끊고 나자 박사님은  짬뽕 값이 한 그릇에 얼마냐고 물었다.

"짬뽕 한 그릇에 6천 원이고요, 쟁반 짜장은 1만 5천 원인데요?"
"그럼 됐다. 내가 용돈으로 거금 5만 원을 타왔는데 오늘 점심은 내가 쏘지."
"호호호. 정말요? 아이고 좋아라. 오늘 점심은 무진장 맛있겠네요."

박사님이 점심까지 쏜다고 하자 세 보살은 환호를 지르며 좋아했다. 우리는 귀빈각으로 차를 몰았다. 바람이 윙윙 불어와 대낮인데도 무척 추웠다. 귀빈각에 도착하니 1시 30분경이 되었는데도 홀에 자리가 없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특색이 있고, 맛있게 잘하면 이런 시골 오지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마침 골방이 비어 있어 우리는 비좁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방에서 얼큰한 홍합짬봉으로 추위를 잊다

일곱 사람이 앉기에는 밥상도 방도 너무나 좁다. 홀에 곧 자리가 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주인이 말했지만 "좁은 방이 더 좋지 않나? 이거야 말로 귀빈실이군. 허허"하시면서 박사님이 개의치 않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신다. 우리 모두 방으로 따라 들어가 붙어 앉았다. 미리 주문을 해 놓은 홍합짬뽕과 쟁반짜장이 곧 나왔다.

우리는 귀빈각의 귀빈실(?)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홍합짬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귀빈각의 귀빈실(?)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홍합짬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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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과 짜장이 좁은 밥상에 오르자 홍합을 까먹느라 모두가 조용해졌다. 왼손엔 비닐장갑을 끼고 홍합을 집어서 젓가락으로 하나씩 빼먹는 맛이 그만이다. 추운 날 좁은 방에서 오손 도손 홍합을 까먹는 맛이 더 기가 막히다. 음식은 이렇게 여럿이 둘러 앉아 먹어야 제맛이 난다.

"와아, 이렇게 홍합이 많이 나오는 건 처음 보내!"
"맛도 싱싱하고 추운 날 먹기에는 딱 이내요."
"호오호오~ 매워, 그런데 맛은 그만이내요."
"선생님께서 쏜 홍합짬뽕이라서 그런지 더 맛있는데요? 호호호."

모두가 매운 홍합을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홍합짬뽕을 먹자 이마에 담이 맺혔다. 맵지만 추위를 잊게해주는 기가막힌 맛이었다. 6천 원 짜리 짬봉이 이렇게 맛이 있다니 모두가 믿어지지가 않는 표정이다. 추운 날씨인데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얼큰한 홍합짬봉을 맛있게 먹다
 얼큰한 홍합짬봉을 맛있게 먹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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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정말 맛있게 먹었는데. 우리 여기서 인증 샷을 한번 해야지. 그래야 잊어버리지 않고 다음에 또 찾아오지."

귀빈각 앞에서 우리는 인증 샷을 한 후 건너편에 있는 화이트 다방으로 갔다. 녹슨 간판, 꾀죄죄한 창문, 그 창문으로 튀어 나온 난로 통… 화이트 다방은 60년대 시골 다방 그대로의 모습이다.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희망을 이야기하다

다방 안으로 들어가자 연탄난로와 노란 주전자,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어지러운 주방, 다 헤진 바닥 타이루, 큼지막한 농협 달력, 그리고 떼가 디룩디룩 낀 벽에는 '도심여옥(道心如玉-도를 닦는 마음은 옥과 같다)'와 요산요수(樂山樂水)란 오래된 액자가 빛이 노랗게 발한 채 걸려있다.

그리고 다방  한 가운데 테이블에는 동네 할아버지 몇 분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이가 꽤 듬직한 마담이 차를 주문 받으로 왔다. 다방 분위기에 너이 든 마담을 보자 시계바늘이 저절로 추억의 60년대로 돌아가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모닝커피를 한 잔 먹고 싶은 데 되나요?"
"모닝커피요? 네 되고 말고요."

박사님은 대뜸 모닝커피를 주문했다. 우리는 뜬금없이 모닝커피를 주문하는 박사님의 익살스런 모습을 보고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뜬다. 모닝커피는 뜨거운 커피에 날달걀을 풀어 넣은 아침에만 먹는 5~60년 대에 유행했던 커피다. 그 시절에는 전날 과음을 하고나면 아침에 다방에 가서 모닝커피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다.

한국전쟁때 <화이트다리>를  건설한 화이트 소령의 이름을 딴 60년대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화이트다방>
 한국전쟁때 <화이트다리>를 건설한 화이트 소령의 이름을 딴 60년대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화이트다방>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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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박사님 웬 모닝커피를 주문하시나요?"
"허허, 옛날 추억이 떠올라서 모닝커피가 먹고 싶네."
"호호호, 박사님 모닝커피에 뭐, 로맨스 같은 섬씽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있지. 내가 총각 때 아내 될 사람과 장인 모르게 사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다방에 갔더니 그분께서 모닝커피를 시켜먹고 있더라고. 나도 먹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시켜 먹지 못했는데, 장인 될 분은 언제나 모닝커피만 시켜 먹었거든."
"호호호, 그럼 장인 되실분 모닝커피 값도 지불 하셨겠네요?'
"사실 몰래 지불을 해 드리고 싶었지만 돈이 있어야지. 그래서 몰래 커피만 마셨지. 나는 장인 어른 얼굴을 알지만, 장인 어르신은 나를 몰라보았거든. 아직 소개전이라서. 허허."
"하하하, 재미있는데요. 그래서 그 때 마시지 못했던 추억의 모닝커피를 시키셨군요."
"여기 옛날 분위기 나는 다방에 오니 그 때 못 먹은 모닝커피가 문득 먹고 싶어진 거지. 모닝커피를 사드리지 못했던 장인어른 생각도 나고. 허허허."

그 때 마담이 하얀 잔에 커피를 내왔다. 커피 잔 만큼은 <화이트 다방>이란 이름에 걸맞게 하얗고 깨끗했다. 모닝커피를 마시며 박사님은 옛날 연애하던 이야기, 사위 감으로 점수 미달이었는데, 장모님을 설득하여 결혼에 골인을 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셨다.

60년대 다방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화이트다방 내부
 60년대 다방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화이트다방 내부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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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사위감으로 부정적인 측면을 5가지나 들었는데 이를 모두 설득하여 긍정적인 마인드로 돌려놓으셨다고 한다. 박사님은 항상 세상을 긍정적인 자세로 바라보며 희망을 이야기 하신다.

"부정적인 이야기는 나중에도 오래도록 옆구리에 남아 있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항상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거든. 특히 결혼을 압둔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입장으로 보면 서로가 잘 맞지않는 면이 있더라도 어차피 해야할 결혼이니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해요.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던가요? 어차피 이루어질 결혼인데 이왕이면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훨씬 좋지요."

박사님은 또 학창시절 포장마차에서 꼬챙이를 먹던 이야기를 했다. 돈이 없던 의과대학 시절 배가 고프면 학교앞 포장마차에서 오뎅꼬챙이를 먹었는데, 꼬챙이를 먹으면서 빈 꼬챙이 다섯개는 몰래 탁자 아래로 떨어뜨려 숨기고, 다섯개만 탁상 위에 놓아 두면 포장 마차 주인은 다섯개 값만 받았다고 했다. 주인이 속아 넘어가는 것이 재미있어 늘 그 수법을 썼는데 그 때마다 주인은 속아 넘어가며 다섯개 값만 받더라는 것.

하얀 잔에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던 고소한 시간들
 하얀 잔에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던 고소한 시간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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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친구들과 함께 그 포장마차집을 찾아가 학창시절 추억을 상기하며 다섯개는 탁상 밑으로 숨기고, 다섯개는 탁상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포장마차 주인은 이번에는 10개 값을 다 받더라는 것. 포장마차 주인은 알면서도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 다섯개 값만 받았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영하 20도의 날씨를 녹여주는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

박사님과 친구들은 알면서도 눈을 감아준 포장마차 주인의 휴매니티에 감동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영혼이 따뜻했던 포장마차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이 손에 집힐듯 그려졌다. 그후 박사님과 의사가 된 친구들은 수시로 추억의 포장마차집을 찾아가 학창시절 속여서 먹었던은 꼬챙이까지 값을 곱배기로 토해냈다고 했다.

"호호호, 너무 재미있고 가슴이 찡한 이야기네요."
"그 포장마치 집 주인이 보통은 넘는데요?"
"영혼이 따뜻한 분이었지. 그러니 자식들에게도 적당히 속아주는 것이 좋아요. 나는 학창시절 용돈이 궁하면 이발을 하곤 했는데 다른 돈은 잘 주지않으시던 어머님이 이발값만은 잘 주셨거든. 그래서 툭하면 이발을 하겠다고 손을 벌렸는데 그 때마다 어머님은 이발값을 주시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은 용돈이 궁하면 이발을 한다는 내 속 사정을 뻔히 다 아시면서도 속아주신거거든. 물론 단정하게 이발을 한 내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하셨겠지만. 허허허."
"호호호, 박사님도 어머님을 속이는 선수였군요."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무하 이근후 박사님. 옆에는 오래된 연탄난로가 옛날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추억의 <모닝커피>를 마시며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무하 이근후 박사님. 옆에는 오래된 연탄난로가 옛날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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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60년대 다방에서 박사님의 구수한 옛날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우리들 옆에는 오래된 연탄 난로가 오래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이까지 영혼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로 채워지는 시간들이었다. 괜히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해졌다.

"이런 다방에 앉아 있으니 옛날이야기를 하기가 딱인 분위기네."
"화이트 다리도 그대로 있었으면 더 좋은 뻔 했지요?"
"그러게 말이요. 역사의 현장을 없애는 것은 심사숙고를 해야 할 일인데…"

화이트 다방은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화이트교(현재 임진교)의 이름을 딴 매우 오래된 다방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할 때 임진강에 다리가 없어 유엔군 공병대대 화이트 소령이 나무다리를 급조해서 만들었는데, 지난 2003년 임진교를 개통하면서 화이트교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53년간 지속된 화이트교는 지금도 왕징면에 화이트 다방, 화이트 펜션, 화이트 부동산 등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이 많다. 화이트교를 그대로 추억의 역사 현장으로 살려 놓을 수는 없었을까?

박사님과 일행은 옛날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앞으로 종종 들리겠다고 하시며 오후 4시쯤 서울로 가셨다. 이렇게 추운 날 노구의 몸을 이끌고 위문품(?)까지 들고 오신 박사님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밖은 여전히 찬바람이 윙윙 불며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내 영혼이 포근하고 따뜻했던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무하 이근후 박사, #연천쌀, #연천군, #귀빈각, #화이트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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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여행, 작은 나눔,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 등 살맛나는 기사를 발굴해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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