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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정기 예금 가입하면 이자율이 낮아 손해를 봅니다. 금리가 물가상승률만도 못해요."

예금을 맡기러 은행에 갔더니 직원이 이런 이야기를 던진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흔들리는 표정을 짓는 고객을 향해 그 직원은 한마디 더 덧붙인다.

"최근 출시된 상품이 있는데요. 이 상품은 저금리 시대에 그나마 몇 안되는 고금리 상품입니다. 모집하는 기간이나 금액도 한정돼 있어서 빨리 가입하셔야 하는데요. 고객님 운이 좋으시네요. 후순위채권이라는 상품인데 고정 금리 8% 짜리입니다."

일반적금 상품은 손해, 그에 비해 한정된 양만 판매하는 예금 상품이라는 말에 마음까지 조급해지는 것이 인지 상정. 물론 평생 어렵게 모아온 돈을 맡기는데 무턱대고 가입할 수 만은 없다.

"그 상품 안전한 겁니까?"
"당연하죠. 확정금리라니까요. 우리 ○○은행이 망하면 모를까. 그런데 설마 ○○은행이 망하겠어요?"

은행을 찾는 고객들은 '은행'이라는 이름만으로 안전하겠다는 생각을 해버린다. 설령 그것이 저축은행일지라도. 게다가 직원의 '설마'라는 전제는 상품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앝잡아 보는 데 생각보다 큰 위력을 발휘한다. 금융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일반 소비자에게 직원의 '안전하다'는 설명은 상품 선택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주변에는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자신이 가입한 금융상품이 어떤 종류의 상품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하물며 시장에서 평생 장사를 하느라 삶이 고단한 사람들, 직장생활에 매여있는 다수의 소비자들이 금융상품에 대한 전문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주의 깊게 상품을 따져보고 선택할 수 없다. 혹은 주의를 기울여 가입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그 어려운 금융용어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복잡한 금융상품, 투자상품들은 이렇게 소비자들의 판단 능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팔리고 있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후순위채권 가입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저축은행이 도산하면서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된 가입자는 2만7천여 명에 이르게 됐다.

금융에서만 여전한 신자유주의 이념

 지난해 9월 19일 오전 경기 성남시 수정구 신흥3동 주민센터에서 예금보험공사 관계자가 전날 영업정지가 내려진 토마토저축은행 예금자들에게 가지급금 지급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9일 오전 경기 성남시 수정구 신흥3동 주민센터에서 예금보험공사 관계자가 전날 영업정지가 내려진 토마토저축은행 예금자들에게 가지급금 지급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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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후순위채권 피해자 보상 법안이 처리되자 연일 언론에서는 금융포퓰리즘이라고 비판을 쏟아낸다. 비판의 주요내용은 '저축은행 후순위 채권 가입자는 좀 더 높은 금리를 챙기려는 욕심이 있었고 그 욕심의 대가는 위험성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는 지난해 사설(2011년 8월 9일 치)을 통해 후순위채권 피해자 보상이 금융시장의 질서를 깨는 위험한 조치라고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정당성이 약한 저축은행 피해자' '도덕적 해이'라는 표현을 통해 상대적으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해 왔던 기존의 논조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물론 <한겨레>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전체 예금자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예금보험 기금이 원칙없이 지급됨으로 인해 예금자 보호법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다. 그 지적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저축은행 피해자를 둘러싼 문제의 본질은 예금자 보호법의 근간이 깨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2차적인 문제다.

그보다는 불완전 판매 과정과 금융감독 당국의 감독 소홀을 지적해야 한다. 피해자들이 예금자 보호범위를 벗어난 투자를 결정하게 된 배경에 바로 불완전 판매가 전제돼 있었고, 불완전 판매가 가능한 것은 바로 금융감독 당국의 감독이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불완전 판매는 단지 판매를 한 해당 은행원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완전판매가 불가능한 구조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제평가해야 한다. 특히 후순위 채권과 같이 채권을 발행하는 금융사의 재무 건전성을 판단할 능력을 요구하는 투자 상품을 완전판매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시장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판매 당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상품들이 소비자에게 일반 예·적금 상품과 같은 수준으로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다. 발행에도 별다른 규제가 없다. 자본시장법 제 119조에 따르면 증권신고서를 금융위원회에 제출하고 같은 법 125조에 의해 증권신고서나 투자설명서에 중요사항이 거짓 기재돼 있거나, 기재가 누락돼 증권 취득자가 손해를 입은 경우에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규정밖에 없다. 즉 발행 과정에서 회계법인이나 금융감독 당국이 재무제표 감사 등에 소홀히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 대책이고 이러한 사후 대책 이전에 판매 자체에 대한 세부적 규제를 살펴봐야 하는데, 현재 이는 전무한 상황. 발행과 판매가 이처럼 초간단 구조로 돼 있다보니 소비자들은 대단한 금융전문가가 되지 않는 한 불완전 판매에 항상 노출돼 있는 셈이다.

지금의 저축은행 사태는 사실상 후순위채권 발행과정에서 회계법인과 금융감독 당국의 재무제표 감사와 감독이 부실하면서 시작됐다. 당연히 소비자들은 거짓 재무제표를 근거로 투자를 결정했고, 심지어 원금보호에 대한 주요 내용도 잘못 이해하고 가입했다.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었고, 나아가 여론이 그 모든 책임이 투자자에게 있다고 말해 상처를 입고 있다.

앞서 은행에서 실제 벌어지는 판매 과정을 다시 살펴보자. 우리 중 그 누가 은행원의 권유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10명 중 9명이 불완전 판매 위험에 노출돼 있음에도 이러한 문제의 본질은 뒤로 사라지고, 예금보험 기금에 대한 것만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제한된 금융정보를 가지고 금융상품을 선택해야 하는 소비자들은 알고보면 금융기관과의 관계에서 사회적 약자다.

무지한 투자, 이자 몇 푼에 위험인지도 모르고 덜컥 상품에 가입하는 나약한 소비자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겨레> 사설의 '정당성이 약한 저축은행 피해자'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대단히 시장주의적이다. '피해 결과는 안타까우나 그것은 모두 시장 작동의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즉 애초에 네가 잘했어야 해'라는 과도한 시장주의적 발상 그 자체다. 미국 발 금융위기를 겪으며 과도한 시장주의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임에도 여전히 금융시장에 대해서는 불공평한 시장주의가 견고히 버티고 서 있다.

본질은 금융감독 당국에 대한 손해배상책임

 통합진보당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통합진보당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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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금자 보호법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현재 국회에서 추진하는 특별법은 손해배상 책임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다른 예금자의 돈으로 해결하려는 데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렇다고 금융 포퓰리즘이라는 비난과 함께 피해자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최근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대표의 제안은 법적 정당성 면이나 피해자 구제를 위한 실효성 있는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통합진보당은 정부가 감독 책임,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으니 예금 피해자들에게 배상책임을 지고 전액 피해구제를 하라고 주장한다. 우선 피해자들은 살려놓고 그만큼 구상권을 획득한 후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을 제외하고 공직자와 저축은행 대주주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법률가들은 대체로 타당한 안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공적 업무에 대한 배상책임을 금감원이 인정할 것인가'라는 논란이 남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적어도 문제를 그렇게 제기해야 금융감독 당국의 감독 실패와 부패에 대해 사회적으로 제대로 따져 물을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여론은 금융감독 당국의 배상 책임쪽으로 기울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감독 당국의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대란을 몰고 왔을 당시 카드사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도 감독의 문제고, 멀쩡한 중소기업들을 도산시킨 키코 사태도 감독의 실패에서 비롯됐다. 감독의 실패만이 아니고 감독 당국이 문제를 일으킨 금융사에 감사 등으로 취임하는 등 사적 이익으로 감독권을 오용하고 있음도 드러나 있다. 이처럼 감독 당국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니 금융사의 불완전 판매가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 배상책임이 선례로 남게 되면 차후 금융감독 당국의 도덕적 해이는 최소화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투자자들에게 위험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도덕적 잣대에는 엄격하면서 금융감독 당국이나 금융기관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의식하는 것은 금융 포퓰리즘이고 뻔뻔하게 책임회피하는 금융감독 당국과 금융사들의 논리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여긴다. 금융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여전히 힘센 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만 엄격한 불합리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바꿔야 한다.


#저축은행#금융감독 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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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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