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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서린 베틀바위 베틀바위들이 안개 속에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안개 서린 베틀바위베틀바위들이 안개 속에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정만진

경북 의성읍 치산리의 3층 석탑(문화재자료 30호)을 보러 가면 탑보다도 더욱 눈길을 끄는 기암괴석들을 만나게 된다. 바위들은 선암사라는 작은 사찰 뒤편의 산 중턱에 석탑의 배경처럼 줄을 지어 버티고 있다. 베틀처럼 생겼다고 해서 '베틀바위'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고, 선녀들이 내려온 바위라 하여 선암(仙岩)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바위들은 하나같이 색깔이 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인 의성군 금성산이 화산 폭발 때 생긴 오석(烏石) 또는 흑요석(黑曜石)이라 불리는 검은 화산석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치산리 3층석탑 뒤에서 보는 바위들은 정말 검은 화산석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의성 일대가 화산 폭발지였다는 사실이 이곳에서 실감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베틀바위 중 하나 '베틀바위 전설'의 소재가 된 의성읍 치산리 뒷산(선암산)의 바위들 중 하나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베틀바위 중 하나'베틀바위 전설'의 소재가 된 의성읍 치산리 뒷산(선암산)의 바위들 중 하나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 정만진
그런데 이 베틀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단순히 베틀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온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온 베틀 관련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베틀바위'라고 불러왔다는 말이다. 의성군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베틀바위 전설'을 문장을 가다듬어 가면서 요약해 본다.

사화산 흔적에 깃든 '베틀바위 전설'

옛날 이 마을에 갑숙이라는 착한 처녀가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구하러 갔다가 바삐 돌아오던 어두운 길에서였다. 캄캄한 중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에 '탁' 걸려 갑숙은 넘어질 뻔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어둠 속에서도 불쌍한 냄새가 풀풀 풍겨나는 할머니였다. 갑숙은 할머니를 집으로 업고 와 어머니와 한 방에 눕혔다. 그리고 지성껏 간호를 하였다.

이튿날 갑숙이 일어나 보니 할머니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위중하던 어머니의 병이 하룻밤 사이에 씻은 듯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녀는 '그것 참 신기한 일이야' 하면서 그냥 잊고 넘어갔다.

완쾌된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고 갑숙이는 열심히 베를 짰다. 갑숙이의 베 짜는 솜씨는 나날이 늘어 마침내 온 나라가 알게 되었다. 드디어 임금님께서 직녀(織女)들을 보내어서 갑숙과 그녀들 중 누가 솜씨가 좋은지 겨뤄보라고 했다.

나라에서 온 직녀들은 최고의 베틀을 썼다. 그러나 갑숙의 베틀은 너무나 낡고 한심하여 제대로 돌아가기나 할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구경 온 많은 관중들도 혀를 차며 갑숙이를 안타까워했다.

탑과 베틀바위 문화재자료인 치산리 석탑 오른쪽 뒤로 베틀바위 하나가 보인다.
탑과 베틀바위문화재자료인 치산리 석탑 오른쪽 뒤로 베틀바위 하나가 보인다. ⓒ 정만진
그때 문득, 전에 보살펴주었던 할머니가 남루한 행색으로 나타났다. 할머니는 갑숙의 베틀 앞에 앉아서 큰 지팡이로 휘둘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베틀이 갑자기 열 개로 불어나고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갑숙의 베짜기를 돕는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었다. 갑숙의 베는 열 필이나 되는데다 한결같이 올이 고르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직녀들의 것은 두 필밖에 되지 않았고 군데군데 흠도 있었다. 갑숙의 완전한 승리였다. 갑숙은 임금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마침내 왕비가 되었다.

소문은 더 멀리까지 전해졌다. 선녀들의 베틀을 구경하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모두 헛걸음이었다. 선녀도 베틀도 연기처럼 없어졌고, 베틀 모양의 바위만 우뚝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선암리 뒷산에 있는 10여 개의 베틀 모양 바위들이 바로 그 전설의 바위이다.

'베틀바위 전설'에는 착한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녹아 있다. 그러므로 전설 속의 갑숙이는 아주 심성이 고운 아이이고, 나쁜 마음이나 이기적 의도에서 사람을 대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따라서 베틀바위와 같은 전설을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일은 아주 교육적이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잊혀져야 할 전설들도 많다. 의성읍에 전해져오는 두 가지 대표적 전설 중의 하나인 '정씨 가문의 성쇠(盛衰) 전설'이 바로 그런 종류이다. 인간의 비열한 측면과 운명론적 이기심이 녹아 있어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다.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식으로 말하자면 '15세 이하 읽기 불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의성군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정씨 가문의 성쇠 전설'을 역시 문장을 가다듬어가면서 요약해 본다.

의성마늘 첫 재배지 베틀바위 앞의 선암사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이 마을이 '의성마늘'을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말해주는 빗돌이 나란히 서 있다.
의성마늘 첫 재배지베틀바위 앞의 선암사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와, 이 마을이 '의성마늘'을 처음으로 재배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말해주는 빗돌이 나란히 서 있다. ⓒ 정만진

운명론적 가치관에 젖은 '정씨 가문의 성쇠 전설'

옛날 의성에는 장정구박(藏丁具朴)이라 하여 네 성씨를 손꼽았다. 그런데 구씨와 박씨는 지금도 사람 수도 많고 번성하지만 정씨와 장씨는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특히 정씨의 세가 약해진 것은 천문지리에 밝은 어떤 현령 때문이라고 한다.

봄철도 저문 5월이었다. 현령은 때 늦은 서리가 내릴 것을 예상하였다. 그래서 관리를 불러 백성들이 못자리 논에 물을 담뿍 대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모내기를 앞둔 못자리에 서리가 내리면 농사를 망치게 되므로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관리는 '이미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다. 현령은 '너희가 오뉴월 비상(飛霜)을 짐작할 줄 안단 말이냐?'하고 크게 놀랐다. 관리는 '저희들이 아는 것이 아니옵고, 정씨문중에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 계시는데,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하였다.

의성읍에 있는 정씨 가문의 재실 영모재 왼쪽 사진에 보이는 울타리는 의성도서관의 것이다.
의성읍에 있는 정씨 가문의 재실 영모재왼쪽 사진에 보이는 울타리는 의성도서관의 것이다. ⓒ 정만진
현령은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힘이 약해질 것을 걱정, '정씨 문중을 내려앉혀야겠다'는 '나쁜 마음'을 먹었다. 현령은 의성읍의 땅이 구봉산 아래 남대천과, 상리리 쪽 아사천이 90도로 만나면서 정자(丁字) 모양을 이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씨 문중이 그 때문에 번창하는 것으로 생각한 현령은 아사천 서편에 커다란 못을 파고서 물을 채웠다. 그리하여 의성읍의 땅은 정(丁)자 모양에서 하(下)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의성 읍내의 정씨들은 차차 약해졌다. 풍수지리설을 깊이 믿어 온 우리 조상들은 이를 진실로 알았고, 그 결과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전설로 전해져 왔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 때 현령이 판 못이 메워졌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우일(丁又一)씨가 당선되었다. 정씨는 사람 수도 적었지만 그러한 결과가 나타났다. 1, 2, 3대 민선군수도 정해걸(丁海杰)씨가 당선의 영광을 누렸다. 그 후 정해걸씨는 국회의원에도 뽑혔다. 이를 두고 사람들 중에는, 500년 전에 현령이 판 못을 메우고 난 뒤부터 정씨 문중에 회운(回運)이 온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영모재 뒤의 정씨 가문 묘소들과 비석들 실제로 답사를 해보면 거의 왕릉만한 규모의 묘소도 볼 수 있다.
영모재 뒤의 정씨 가문 묘소들과 비석들실제로 답사를 해보면 거의 왕릉만한 규모의 묘소도 볼 수 있다. ⓒ 정만진

읍내 중심의 '군립 의성도서관' 옆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정씨(丁氏) 가문의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 뒤로는 왕릉처럼 보일 정도로 큰 묘소가 있고, 비석들도 많이 세워져 있다. 이곳이 바로 '정씨 문중 성쇠 전설'의 현장이다. 이 전설은 아직 우리 사회에 풍수지리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왕건의 풍수지리 신봉이 끼친 폐악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우리 역사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친 대표적 인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다. 그는 대를 이어 왕이 될 자신의 후손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라는 지침을 내렸는데, 그 중 하나가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지세(山形地勢)가 배역(背逆)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였다. 지금 말로 하면 '땅 모양이 반역자가 태어나게 생긴 호남의 사람들은 관리로 쓰지 말라'는 뜻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왕건은 본인 스스로가 20년 이상  모셨던 궁예를 배반했다. 개성 토호였던 왕건이 궁예를 주군으로 모시겠다며 투항한 것은 896년이고, 궁예를 죽인 때는 918년이다. 그가 호남 출신인가?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반역으로 권력을 잡았으니 다시 누군가가 그렇게 나오지 않을까 밤낮으로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히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반란이 일어나니 반드시 선정을 베풀도록 하라'고 유언을 해야 할 것 아닌가. 풍수지리라는 탈을 이용하여 대중을 속이려 획책한 것을 보면, 왕건은 결코 진정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국가의 지도자가 자신의 일방적인 가치관을 국정에 반영하려 들면, 그 사회는 세상을 헤매게 된다. 왕건 때문에 10세기의 우리 사회는 원시시대의 정신문화로 빠져드는 퇴보를 했다. 자신의 가치관을 남에게, 특히 국가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패악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왕건이었던 것이다. 21세기 과학시대에도 그런 터무니없는 국가지도자는 없는지, 우리도 잘 살펴보아야 마땅하다.

궁예를 죽이는 왕건 사진은 드라마 <왕건> 촬영장인 용추 계곡의 안내판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다. 개성 출신 왕건은 20년 이상 모신 궁예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뒤 왕이 되었으면서, 본인은 후손들에게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호남 출신들이 배반을 하니 등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궁예를 죽이는 왕건사진은 드라마 <왕건> 촬영장인 용추 계곡의 안내판 사진을 다시 찍은 것이다. 개성 출신 왕건은 20년 이상 모신 궁예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뒤 왕이 되었으면서, 본인은 후손들에게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호남 출신들이 배반을 하니 등용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 드라마 <왕건>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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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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