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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 강에서 고기를 잡는 아이들
▲ 라오스의 아이 메콩 강에서 고기를 잡는 아이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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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게스트하우스의 매니저는 이를 두고 일전에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건기에 하루 종일 내리는 비라니….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한창 푸르스름하게 맑고 투명해야할 메콩 강에 우기 때처럼 누런 흙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강의 색깔마저도 바꾸어놓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곳 훼이싸이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가기로 결정했다. 염치없이 건기에 내리는 비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감기몸살이 심해져서였다. 이는 아이들에겐 이 작은 마을에서 하루 동안 맘껏 어슬렁거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과, 아내는 감기몸살을 다스릴 수 있는 휴식의 시간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가 내리는 아침거리로 나섰다. 길은 메콩 강을 따라 길게 누워 있었고, 마을은 그 길을 따라 한 줄로 걷고 있었다. 마을 중심부는 게스트하우스나 식당과 식료품점 같은 건물들이 띄엄띄엄 마주보고 서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천천히 마을 가게를 뒤지기 시작했다. 중국산 귤이나 사과, 바나나 등 비타민C를 섭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릴 것 없이 조금씩 사 모았다. 레몬은 어느 가게에서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전날 저녁식사를 했던 레스토랑까지 가서 요리용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들을 구해왔다. 설탕에 생 레몬을 듬뿍 짜 넣고 아내에게 따뜻하게 레몬차를 타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과일 봉지를 들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열여덟 살 동갑내기 희경이와 윤미가 반대쪽 길 끝에서 뛰다시피 바삐 걸어오고 있었다. 꽤나 분주한 얼굴들이다.

"일찍 일어났네. 어디 갔다 와?"
"아, 삼촌! 케이크 알아보느라고요. 그리고 있잖아요. 정호는 반팔 티셔츠 사주고요, 상훈 오빠는 라오비어 두 병 사주려고요. 어때 괜찮겠어요?"

라오비어를 들고 좋아하는 상훈
▲ 라오스 강가에서의 깜짝 파티 라오비어를 들고 좋아하는 상훈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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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스무 살 상훈이와 열여섯 살 정호의 생일이다. 그래서 저녁에 깜짝 파티를 열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어제 밤부터 자기들끼리 돈을 걷는다, 어쩐다 해서 조금 보태주기도 했었다. 아마 아이들은 저걸로 오늘 하루 심심치 않게 놀 수 있을 모양이다. 그러고도 희경과 윤미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아, 그리고 새벽에 사원에도 올라갔었어요."
"정말? 좋았어?"

"네! 그런데 비가 와서 강은 안 보였어요. 그리고 시장에도 갔고요, 초등학교에도 갔었어요. 아이들이 진짜 귀여워요. 우리가 가니까 맨발로 막 달려와요."

여행 떠나와 지난 며칠, 윤미와 희경을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아주 통통 튀어 다닌다. 녀석들의 발걸음에는 뭔가 터져버린 자유로움이 배어 있다. 누구보다도 현재의 시간을 맘껏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대하는 모든 낯선 것들에게 어찌나 긍정적이면서도 에너지가 넘치는지 저러다 혹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가 생길 정도다.

저런 에너지를 하루 종일 학교 책상에 앉아 영어단어와 수학문제들과 씨름하며 소비해야만 한다는 걸 떠올리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이들에겐 고3을 앞두고 내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이번 여행이 또 다른 의미로 오래 남게 되길 나로선 바랄 뿐이다.

모든 아이들이 희경과 윤미처럼 부지런히 마을을 탐험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비옷을 입고 그냥 거리를 하릴없이 쏘다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오전 내내 밀린 잠을 자거나 방안에서 뒹굴며 TV를 보며 카드게임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비가 좋아서 이층 테라스 의자에 앉아 키 작은 마을에 내리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는 아이도 있고, 비가 싫어 침대에 웅크리고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는 아이도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이란 것이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것이지만 그 낯선 시간 안에 머무는 것이기도 함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을, 각자의 도시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떠나왔듯이 또 그렇게 제 각각의 눈으로 머물고 있었다.

라오스에는 찐 밥을 하는 방법
▲ 찐 밥 라오스에는 찐 밥을 하는 방법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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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아이들의 방들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남자 애들 여자 애들 할 것 없이 짐들을 온 방 가득 늘어놓은 것이 저렇게 하고도 지금껏 별 잃어버리는 물건 없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길 건너편 상훈이네 모둠의 게스트하우스에 들렀을 때다. 방에서 한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16살 도솔이다. 같은 방을 쓰는 수경이 말이, 오늘 계속 그렇단다.

그리고 도솔이 언니가 밥을 아예 먹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것도 오늘 아침이나 점심만이 아니라 여행 떠나고 6일째인 오늘까지 내내 그렇단다. 밥은 안 먹고 빵이나 과자랑 음료수만 먹는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놀랐다. 그리고 나한테 화가 났다. 아이 하나가 6일째 밥을 제대로 안 먹고 있는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었다니! 저 녀석은 아빠를 닮아 씩씩하고 성격도 무던해서 걱정도 하지 않았는데….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도솔이를 깨워 앉혔다.

"도솔아, 어디 아픈 거니?"
"아니에요, 삼촌. 그냥 잠이 와서요."

나는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어본다.

"그런데 너 밥을 안 먹는다며?"
"……"

"왜 밥을 안 먹어?"
"그냥…, 좀… 이상할 것 같아서…."

"안 먹어봤잖아, 이상한지 아닌지."
"……"

"도솔아, 밥은 눈으로 먹는 게 아니야, 입으로 먹는 거지. 여기 쌀국수나 '카오판'(볶음밥), 우리나라 음식이랑 비슷해."
"냄새가…."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좋아, 이렇게 하자. 오늘부터 당장 밥을 먹어.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일모레 루앙프라방에 도착하면 거기에 공항이 있으니까 삼촌이 비행기 태워서 널 한국으로 바로 보내버릴 거야. 정말이야. 어떻게 할래?"
"……"

"먹을 거지?"
"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여행이 절대 편한 여행이 아니야.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한다고. 삼촌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도솔이가 내 눈을 쳐다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깨알 같은 소리로 '네' 하는데 마음이 짠해진다. 뭔가 소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간 특별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도, 혼을 내는 삼촌의 마음을 이 아이가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녁이 되어 강변 레스토랑에 다 같이 모였다. 짠, 깜짝 생일파티가 시작되었다. 이런 시골마을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생일케이크가 식탁 가운데 턱하니 놓였다.

유진이가 써준 정호 생일 축하 카드
▲ 대형 생일카드 유진이가 써준 정호 생일 축하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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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이는 라오비어 두 병을 받아들고 동생들에게 고마운지 입이 한껏 벌어졌고, 정호는 반팔 티셔츠를 그 자리에서 바로 입어보였다. 유진이는 오전 내내 만든 대형 생일카드를 건넸고, 수경이는 편지를 써주었고, 성호와 승현이는 숙소에서 잡은 도롱뇽 한 마리를 정호에게 선물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정호의 티셔츠를 사느라 정호를 골려먹은 일이다. 윤미와 도솔이와 수경이가 정호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네 옷을 사는 거라며 정호의 취향대로 고르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정호가 자신의 생일 선물인 줄도 모르면서 자신의 티셔츠를 고르게 한 셈이었다.

그때 언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던지 두세 테이블 너머에 있던 군청색의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 다가왔다.

"학생들, 한국에서 왔나봐?"

이곳 라오스에서 6개월째 일하고 있는 한국인 건축 기술자들이었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 건축기술을 전수하고 있는데, 라오스가 여덟 번째 국가라고 했다. 그들은 설비, 전기, 목수 등 자신이 맡은 역할을 소개했다.

강가 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보니, 나와 아내를 발견하지는 못하고, 청소년들끼리 여행을 온 줄로 알고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온 것이라 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여행이 힘들지 않느냐고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고국에 있는 아들딸들이 생각나는지 한참을 눈으로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대뜸 김치를 한 접시 내 놓았다. 열무의 무청을 닮은 채소였다. 그들이 땅에다 직접 채소를 심어 담근 거라고 하는데, 아이들이 좋아하자 그 귀한 김치를 까만 봉지에 가득 담아준다.

족히 3kg이 넘는 양이었다. 우리들은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일 뿐이고 그들은 앞으로도 1년 이상 이곳에서 머물러야할 텐데…. 미안해도 그분들의 마음이 고마워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소중한 것을 나눠주는 마음을 가르쳐준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김치라는 음식 하나로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준 것 같아 더욱 고마웠다. 그날 하루도 우리들은 길 위에서 그렇게 작지만 고마운 배움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케이크에 정호와 상훈이 이름이 적혀 있다.
▲ 어렵게 구한 생일 케이크 케이크에 정호와 상훈이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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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밥을 먹지 않던 도솔이는 그날 처음 라오스 볶음밥 '차오판'을 먹었다. 그 아이의 반응은 기대한 것처럼 평균 이상이었다.

"음~, 생각보다 맛있어요."

<사람은 자연을 닮고 사람과 사는 동물은 사람을 닮겠지> - 김하영(20세)

산 위에 있는 사원을 갔는데 공사 중이라 법당 안에는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강아지를 만났다. Lao people이나 Lao dog나 Lao cat이나 Lao baby나 다들 순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나중에 (게스트하우스의) 3층 응접실에 가서 메콩 강과 반대편 태국 땅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런 환경과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이 생길 수 없을 것 같다.

욕심이 많은 것도, 타인을 경계하는 것도, 타인에게 불친절한 것도 결국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콩 강을 뒤에 두고 스쿠터를 타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두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음, 또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또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보는 여기 사람들은 우리보다, 나보다 두려움이 훨씬 적다.

사원에서 만났던 강아지. 그 강아지도 곧잘 앉아서 눈도 맞추고 손바닥도 핥아주고 하는 게 너무 예뻤다. 사람은 자연을 닮고 사람과 사는 동물은 사람을 닮겠지.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다.



태그:#여행학교, #라오스, #훼이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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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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