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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展'이 열리는 성곡미술관 제2관 입구와 전시포스터
 '데비 한展'이 열리는 성곡미술관 제2관 입구와 전시포스터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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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독일 뮌헨, 홍콩에서 성황리에 전시를 마친 데비 한(Debbie HAN, 1969~). 같은 해 서울 트렁크갤러리에 전시를 가진 후, 국내에선 처음으로 '존재(Being 1985-2011)'라는 제목으로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을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관장 박문순)에서 3월 18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시기별 작품 60여 점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편리하다.

이번 전시는 데비 한이 미국 LA로 이민 간 이후 UCLA대학을 졸업하기까지인 'LA시기(1985~1997년, 제3전시실)'와 뉴욕 프랫(Pratt)대학원을 다니며 세상으로 눈을 돌린 '뉴욕시기(1998~2000년, 제2전시실)'와 산타모니카대학에서 강의(2001-2003)를 하다 한국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작업시기(2004년~현재, 제1전시실)로 나뉜다.

데비 한 I '깊은 바다(深海)의 미소(Abyssal Smile)' 식(食)과 색(色) 연작 디지털 프린트 2005
 데비 한 I '깊은 바다(深海)의 미소(Abyssal Smile)' 식(食)과 색(色) 연작 디지털 프린트 2005
ⓒ 최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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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은 한국에 와서 우선 하늘로 뻗치는 번개머리 스타일로 사람들 눈길을 끌었고, 2005년에 발표한 '식(食)과 색(色)' 연작으로 또한 사람들 주목을 받는다. 이 연작은 여성의 관능미가 음식처럼 소비되는 광고사진을 패러디한 것으로 가정 '데비 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연작에는 생마늘로 만든 은빛 나는 우아한 목걸이, 에로틱한 고춧가루 립스틱, 참신한 여성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쪽파머리, 얼굴에 화려한 장식을 한 것처럼 보이는 참깨 그리고 미역머리의 자연미인 등 그의 착상은 유쾌하고 또한 그의 구현방식도 발랄하다.

존재를 탐구하는 전방위 시각예술가

데비 한 I '고독(Solitud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61×122cm 1987. 작가의 습작기 회화작품
 데비 한 I '고독(Solitude)'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61×122cm 1987. 작가의 습작기 회화작품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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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은 사진가나 설치작가라기보다는 개념미술로 존재를 탐구하는 전방위 시각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주제가 '존재'이듯 작가는 시류를 쫓기보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실존주의자들처럼 끊임없이 삶의 본질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

그런 태도는 과연 어디서 온 건가. 그의 삶을 추적해보면 알 수 있다. 데비 한은 어려서 LA로 이민 간 재미작가로, 예술가가 되려는 열망을 커서 명문 UCLA에 입학해 작가의 길을 걷는다. 그러던 중 1990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자 큰 충격을 받고 그 슬픔을 도무지 감당 못해 한때 색채화를 그릴 수 없게 된다.

이런 고통의 긴 통로를 빠져나온 그가 "나는 누구이며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 존재에 대한 묻는다면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이런 와중에서 하나의 출구로 참선과 명상에 올인한다. 그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나 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에게 중요한 건 지위가 아니라 존재라고 확고히 밝힌다.

뉴욕시대, 세상과 소통하는 팝아트 풍

데비 한 I '달콤한 세상(Sweet World)' 진흙 모래 톱밥 1999. '콘돔(Hard Condoms)' 금속합성물 가변설치 2001(아래)
 데비 한 I '달콤한 세상(Sweet World)' 진흙 모래 톱밥 1999. '콘돔(Hard Condoms)' 금속합성물 가변설치 2001(아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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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데비 한은 어떤 수행도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98년 뉴욕 대학원 시절부터는 다시 사회와 소통을 시작한다. 달콤한 초콜릿같이 정크푸드가 많은 소비의 제국인 미국에서 작가는 그런 달콤한 것 속에 담긴 쓴맛을 보여주려 했는지 '달콤한 세상' 연작을 내놓는다.

또한 그는 뉴욕거리에 버려진 콘돔을 보고 영감을 받아 '콘돔' 연작을 발표한다. 사랑이 창조적인 나눔이 아니라 하나의 소모품이 되고 찰나적인 쾌락을 주고받는 행위로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인지 하여간 작가는 이에 대해 메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이런 연작은 초콜릿이 똥이 되고 콘돔이 사랑의 대치물이 된다는 극단의 논리를 작품에 도입한 것으로 일종의 문명 비평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데비 한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이슈로 다를 때도 유희정신으로 가볍게 풀어내기에 그 결과물은 재치와 재미로 넘친다.

청자, 백자 비너스로 서양적 미를 희화

데비 한 I '인식의 집적(The Mass of Perception)' 가변설치 백자 비너스 연작 2007-2010. 무려 3년간 백자를 130개를 구워 그 중 10개만 성공, 나머진 실패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사금파리를 재활용한 작품. 작품을 설명하는 데비 한 작가
 데비 한 I '인식의 집적(The Mass of Perception)' 가변설치 백자 비너스 연작 2007-2010. 무려 3년간 백자를 130개를 구워 그 중 10개만 성공, 나머진 실패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사금파리를 재활용한 작품. 작품을 설명하는 데비 한 작가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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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 I '개념의 전쟁(The Battle of Conception)' 나무책상 위에 청자 32개 2010. 작가는 이 작품에서 매부리코, 주먹코, 펑퍼진 이마 등 여러 형태의 미인을 제시한다. 뒷면만 보이는 비너스는 아예 눈, 코. 입도 없이 뭉개져있다
 데비 한 I '개념의 전쟁(The Battle of Conception)' 나무책상 위에 청자 32개 2010. 작가는 이 작품에서 매부리코, 주먹코, 펑퍼진 이마 등 여러 형태의 미인을 제시한다. 뒷면만 보이는 비너스는 아예 눈, 코. 입도 없이 뭉개져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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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은 2003년 말부터 한국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홍대 앞 쌈지 등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거기서 비너스 등 석고 데생을 기초로 학생을 뽑는 한국의 미술대학 전형방식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일본 식민지교육의 잔재로 그림을 기계처럼 똑같이 찍어내야 하는 방식이 과연 학생을 위한 건지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서구의 미인을 닮고자 유행하는 성형열풍에 데비 한은 또 한 번 놀란다. 그래서 그는 비너스를 역이용해 청자와 백자 비너스를 만들고 이를 통해 왜곡된 한국인의 미의식을 추궁한다. 여기서 데비 한은 성공률 10% 내기도 힘든 청자와 백자작업에 무모하게 덤벼들었다가 혼이 나 포기상태까지 갔으나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그 일을 해내고 만다.

사진조각으로 하이브리드 미학 구현

데비 한 I '걸고 있는 세 명의 여신(Walking Three Graces)' 디지털방식 사진조각 2007. 이 여신 연작에서는 3D효과를 내는 첨단 디지털 '사진조각(photographic sculpture)'기법이 사용된다
 데비 한 I '걸고 있는 세 명의 여신(Walking Three Graces)' 디지털방식 사진조각 2007. 이 여신 연작에서는 3D효과를 내는 첨단 디지털 '사진조각(photographic sculpture)'기법이 사용된다
ⓒ 데비 한(Debbi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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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 한은 전하는 메시지에 따라 소재가 달라지는데 7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동서 간에 다른 몸짓언어와 애정표현과 금기사항 등을 파악하고 사진을 통해서 이런 사회문화적 차이를 하이브리드 미학으로 융합한다. 그래서 평범한 한국아줌마의 몸매와 비너스의 두상이 합쳐진 새로운 미인이 탄생한다. 이 작업은 지금도 '인식의 눈' 연작으로 지속된다.

개념미술가로서 데비 한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말할 것 없이 서구적 미가 다가 아님을 뜻하리라. 그러면서 남이 정한 미의 기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 보면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마저 놓쳐버리고 거기에 종속돼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게 된다고 보는 것 같다.

사반세기, 다양한 도전과 실험 시도

데비 한 I '12지신(The Twelve Guardian Animals in the Night)' 나전칠기 가구 2009. '세계의 여신(Goddess of the World)' 나무에 삼베 옻칠 2008(위)
 데비 한 I '12지신(The Twelve Guardian Animals in the Night)' 나전칠기 가구 2009. '세계의 여신(Goddess of the World)' 나무에 삼베 옻칠 2008(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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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대로 데비 한은 이렇게 사반세기(1985-2011)동안 참으로 다양한 도전과 실험을 해왔다. 회화로 시작해 팝아트, 오브제미술, 설치미술, 비너스와 여신 연작 그리고 위에서 보는 12지신과 별자리로 만든 나전칠기 가구와 옻칠 비너스까지 장르가 다차원적이다. 그는 이렇게 동서 문화를 섭렵하고 그 대표적인 문화코드로 혼성예술을 창출하였다.

이 세상에 절대적 미의 기준은 없다

데비 한 I '미의 기준(Terms of Beauty)' 청동 비너스 연작 2010
 데비 한 I '미의 기준(Terms of Beauty)' 청동 비너스 연작 2010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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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다시 '미의 기준' 연작으로 돌아가 보자. 백남준은 "우리가 세계의 역사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꿔야 한다"라고 했지만 이 세상에 절대적 미의 기준이란 없다. 데비 한도 서구적 미를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꿈꿔보라고 그의 다양한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데비 한은 앞서 본 '개념의 전쟁' 작품에 나오는 매부리코, 납작코, 쌍꺼풀 없는 눈을 한 아니 눈, 코, 입조차 없는 비너스나, 위 '미의 기준'에서 보듯 흉측하게 부식된 청동 비너스 등을 통해 편향된 서구적 미의 기준과 가치를 통째로 부정하며 이를 조롱한다. 그는 결국 서구 권력의 미를 전복시키는 일종의 문화전쟁에 끼어든 셈이다.

덧붙이는 글 | 데비 한 홈페이지[작가정보] www.debbiehan.net
성곡미술관 종로구 신문로2가 1-101 02)737-7650 www.sungkokmuseum.com



태그:#데비 한, #개념미술가, #사진조각, #하이브리드미학, #미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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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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