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에 다짐하였던 희곡 쓰기가 무려 40년 동안을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하였다.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내가 보고 다닌 연극은 대개가 내용이 피상적이었고, 진보적인 시류 탓인지 연극의 외양도 소극장 중심의 실험극으로 고착되어가는 듯하였다. 또 사극은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코스튬 플레이(옛날 옷을 입혀 상영하는 극)가 되어가고 있었고, 더러는 국적불명의 연극형태를 보이고 있는 인상이었다. - 11쪽, 작가의 말 '무거운 등짐을 내리는 심정으로' 몇 토막
1980년대 8년 동안 MBC TV를 통해 방영된 대하사극 <조선왕조 500년>을 비롯해 <왕조의 세월> <한명회> 등 숱한 히트작을 발표하며 우리 역사드라마를 지켜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극작가 신봉승.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등 여러 장르에서 뜨거운 혼을 내뿜고 있는 작가 신봉승이 희곡집 <노망과 광기>(선)를 펴냈다.
이 책에는 공민왕 때 숨겨진 역사를 파헤친 <파몽기>(2001)와 면암 최익현 선생 삶을 꼼꼼하게 다룬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2011), 사도세자가 겪었던 슬픈 삶을 다룬 <노망과 광기>(2007), 우리 근대사 횃불로 타올랐던 이동인 선사 짧은 삶을 다룬 <이동인의 나라>(2011), 우리 얼룩진 현대사를 다룬 <달빛과 피아노>(2009) 등 모두 5편이 실려 있다.
작가 신봉승은 머리글 '내 문학의 피리어드를 찍더라도'에서 희곡을 쓰게 된 까닭에 대해 지금은 고인이 된 극작가 이근삼이 강릉 바닷가 횟집에서 함께 소주를 마시며 평안도 사투리로 툭 던진 말을 떠올린다.
"야, 희곡 한 편 쓰라. 네가 쓰는 시나리오라는 거이 어디 오래 남기나 하네. 보라 야, 그래도 희곡이 남는다, 알간?"
그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언처럼 이근삼 선배의 채근에 따라 희곡을 한 편 쓰게 되었다"고 되짚는다. 그는 "이번에 펴낸 <노망과 광기>에 실려 있는 '파몽기'가 내 첫 희곡"이라며 "잡다하게 밀려드는 다른 일거리에 시달리면서도 희곡문학에 대한 열정은 꿈틀꿈틀 살아 있었다. 이 작품집으로 내 문학에 피리어드가 찍힌다 해도 내게는 무척이나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천하동생(天下同生) 천하동사(天下同死)
E. 맴맴맴…, 매미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한다./ 매미소리는 점차 수십 수백 마리로 늘어나면서, 객석을 어지럽게 울린다. '대감!' 하고 급하게 부르는 소리와 함께 매미소리가 뚝 끊어지면서 무대가 밝아진다./ 면암 최익현의 포천 사저의 사랑채 마당이다./ 정시해(20)가 급히 달려 나오면서 소리친다./ 시해 : 대감마님, 대감마님…! - 101쪽,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제1경 포천 면암 최익현의 사저(1903년 7월 12일)' 몇 토막
면암 최익현 선생 삶을 다룬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는 작가 신봉승이 경술국치 100년이 되었던 지난해 쓴 희곡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73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선다. 선생은 곧바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조선관군과는 싸울 수 없다 하여 스스로 무장해제했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힌다.
일본군은 선생을 대마도로 강제 압송했고, 선생은 대마도에서 '일본의 것이라면 물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다'는 삶을 실천하다가 결국 순국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말할 때 그와 함께 살았기에 천하동생(天下同生), 그와 함께 죽었다는 뜻으로 천하동사(天下同死)라 이야기했다.
신봉승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에 대해 "새로운 세기로 일컬어지는 21세기로 들어섰으면서도 아직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역사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나라사랑이 무엇인지, 참지식인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성찰해 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쓰게 되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체험한 20세기 1백년은 참으로 뼈아픈 통한의 세월이었다. 20세기로 들어선 지 5년째 되던 을사(1905)년에 나라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경술(1910년)년에 일제에 강제 병합되었다"라며 "경술국치 100년, 그 뼈아픈 세월을 뒤돌아보는 시점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를 살피는 것은 역사인식과 삶의 지혜를 동시에 얻는 일과도 같다"고 못 박았다.
사도세자가 손에 몽둥이를 든 까닭은?
희미한 빛줄기가 영조의 침상에 비친다. 하얀 침의 차림의 영조가 잠이 든 듯 누워 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저항하려는 듯 몸이 꿈틀거린다. 허공에 손을 젓기도 한다./ 무대 한 가운데 안쪽에서 상복을 입은 세자가 나타난다. 굴건제복 차림인 데 반은 입고, 반은 벗은 형국이라 악귀와도 같다. 세자의 손에는 몽둥이를 들었다. - <노망과 광기> '제1장 꿈자리 사납다' 몇 토막
영조가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큰 참변을 역사는 '임오화변'이라 적고 있다. 이 참변은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형조에 고변서를 올리면서 시작되었지만 그때 복잡하고도 미묘한 왕실 사정과 고질적인 정쟁으로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간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이나 혜경국 홍씨(사도세자 부인)가 쓴 <한중록>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신봉승은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을 "노망과 광기"로 붙인 것은 영조 변덕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그 예로 "영조 임금은 비천한 신분(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선왕(경종)을 독살했다는 풍설, 극도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극심한 콤플렉스에 시달여야 했던 사실 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되짚는다. 그는 이 "희곡을 읽으며 영조시대의 정사와 행간을 동시에 짚어볼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덧붙였다.
신봉승 희곡집 <노망과 광기>는 인기 있는 방송작가가 나이 들어 우리들에게 베푸는 희곡 뒤풀이가 아니다. 이 책은 작가가 우리 역사를 곱씹은 기록이자 한 개인이 닿을 수 있는 우리나라 으뜸 역사탐방이다. 이 책은 그 누구보다도 드라마를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우리 현실에 던지는 숱한 물음표이자 반성이 들어 있는 느낌표다.
문학평론가 박덕규(단국대 교수)는 "'정사의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켜켜이 쌓인 옛 책더미를 온몸으로 뒤져내 찾아낸 문제적 인간들!"이라 말머리를 열며 "신돈(<파몽기>), 면암 최익현(<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영조(<노망과 광기>), 이동인(<이동인의 나라>) 등 펄펄 뛰는 이야기로 역사학자들의 개입을 압도해 버리는 이 벅찬 희곡들은 역사문학의 새로운 교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작가 신봉승은? |
1933년 강릉에서 태어나 <현대문학>에서 시, 문학평론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펴낸 책으로는 역사장편소설 <대하소설 조선왕조 5백년>(전 48권), <소설 한명회>(7권), <왕건>(3권), <조선의 정쟁>(5권), <난세의 칼>(전 5권), <이동인의 나라>(전 3권), <소설 1905>(전 2권) 등이 있다.
역사에세이로는 <양식과 오만>, <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 <역사 그리고 도전>(전 3권), <직언>,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 <일본을 답하다>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초당동 소나무 떼>, <초당동 아라리>, 극작가를 위한 이론서 <TV드라마 시나리오창작의 길라잡이>, <국가란 무엇인가>, <청사초롱 불 밝히고>등 여러 권이 있다.
대종상, 청룡상 심사위원장, 공연윤리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강원국제관광EXPO 총감독 등을 맡았으며, 한국방송대상, 대종상, 청룡상, 아시아영화제 각본상, 한국펜문학상, 서울시문화상, 위암 장지연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지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추계영상문예대학원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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