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의 이훤(김수현 분)은 사극에서 보기 드문 로맨틱 군주다. 애인을 기다려주는 사람은 많아도, 죽은 애인까지 기다려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드라마 속 이훤은 그렇게까지 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죽었을 것으로 착각한 애인을 기다려준 것이다. 그렇지만, 애인이 살아 있는 사실을 모르고도 그렇게까지 기다려주었으니, 그는 이제껏 나온 사극 인물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로맨틱 군주가 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조선 전기에 실제로 있었다. 연산군을 내쫓고 제11대 주상(왕의 정식명칭)에 등극한 중종 임금도 <해품달> 이훤을 닮을 기회가 있었다. 물론 상황은 좀 다르지만.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왕후·후궁과의 공식 관계를 제외하고, 조선의 군주들은 원칙상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왕실에서는 권력보다는 사랑을 택하는 로맨틱 가이가 출현하기 힘들었다. 그럼, 중종은 자기에게 다가온 '이훤을 닮을 기회' 앞에서 어떻게 대처했을까?
궁에서 내쫓긴 신씨, 그를 그리워한 중종조선에서 반정(성공한 쿠데타)으로 왕이 바뀐 것은 두 번이다. 중종 때와 인조(제16대) 때다. 이방원(태종)과 수양대군(세조)도 쿠데타를 했지만, 이들은 쿠데타 이후의 '합법성 세탁 과정'을 거쳐 몇 년 뒤에 왕이 되었다. 그에 비해 중중과 인조는 쿠데타에 의해 '곧바로' 왕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여타의 경우와 구별된다.
똑같이 쿠데타 방식으로 왕이 되기는 했지만, 중종과 인조는 입장이 확연히 달랐다. 중종은 쿠데타에 수동적으로 참여했지만, 인조는 이를 능동적으로 주도했다. 그래서 쿠데타 이후에 두 사람의 처지는 판이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가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데 반해, 중종은 오랫동안 쿠데타 주역들에게 끌려다녀야 했다.
중종의 처량한 신세를 반영하는 사건이 중종반정 직후에 발생했다. 연산군을 실각시킨 중종반정은 연산군 12년 9월 2일(1506년 9월 18일) 발생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 9일(양력 9월 25일) 중종은 부인 신씨를 출궁시켜야 했다. 신씨가 연산군 시대의 실세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쿠데타 주역들이 이혼을 요구했던 것이다.
궁에서 쫓겨난 신씨는 경복궁 서북쪽 인왕산의 큰 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널어놓았다.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남편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다. 중종도 내막을 알고는 그 바위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곤 했다고 한다. 그 바위는 치마바위로 불렸다고 한다.
처음엔 쿠데타 주역들의 눈치를 보던 중종. 집권 10년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서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재위 10년째인 1515년, 쿠데타 주역들을 비판하는 청년 조광조를 전격 발탁해서 국정 전반을 일임한 사실에서 그런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그럼, 중종은 이런 기회를 활용해서 신씨와의 재결합을 추진했을까?
쿠데타 주역들의 전횡과 타락을 비판하는 젊은 선비들은 중종에게 신씨와의 재결합을 촉구했다. 그런 방식으로 쿠데타 주역들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끝내 신씨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쿠데타 주역들의 파워가 아직은 무시할 수 없었기에,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신씨를 사랑했지만, 권력을 잃으면서까지 그렇게 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드라마 속 이훤 같았으면 연우(한가인 분)의 손목을 붙잡고 무조건 대궐로 끌고 왔겠지만, 중종은 신씨의 손목 대신 권력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이훤은 '죽은 애인'도 살려냈지만, 중종은 '산 애인'도 살리지 못했다. 중종은 조선왕조 최고의 로맨틱 군주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포기했다.
이훤같은 로맨틱 군주, 조선시대에도 있었다그렇다면, 이훤 같은 로맨틱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왕실과 조정에서 "임금은 여자한테 신경을 쓰면 안 된다"고 수없이 세뇌시켰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군주들은 그런 충고를 잘 따랐지만, 집요한 세뇌작업에도 '사랑 본능'이 씻기지 않은 군주가 있었다. 제24대 헌종(정조의 증손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시대에 왕비나 세자빈을 선발한 것은 주로 왕실 여성들이었다. 임금 본인 혹은 세자 본인은 심사장(간택 자리)에 나갈 수도 없었고 배우자를 직접 고를 수도 없었다. 헌종의 첫 번째 결혼 때까지만 해도 이 원칙은 잘 지켜졌다.
그런데 첫번째 왕후인 효현왕후 김씨를 잃은 지 1년 뒤인 1844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두 번째 왕후를 맞이할 때, 헌종은 자기 눈으로 직접 신붓감을 보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신랑이 참석한 가운데 신붓감 심사가 진행되었다.
처음엔 "참석만 할게요"라고 고집을 피우던 헌종은 최종 심사장에서 "제가 직접 고를게요"라며 또다시 고집을 부렸다.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종 후보 중 하나인 네 살 연하의 김씨 소녀가 헌종의 눈을 확 끌어당겼다고 한다.
하지만, 헌종은 김씨 대신 홍씨 소녀와 결혼해야 했다. 이 여인이 효정왕후 홍씨다. 홍씨가 선택된 것은 헌종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홍씨 가문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헌종과 홍씨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이들은 첫날밤부터 각방을 썼다. 헌종이 김씨 소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헌종은 김씨와의 짧은 마주침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을 지우지 못했던 것이다.
3년 뒤인 1847년, 스무 살이 된 헌종은 <해품달> 이훤처럼 행동을 개시했다. 김씨를 왕후로 들일 수 없다면 후궁으로라도 들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는 홍씨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핑계로 후궁 간택을 추진했고, 결국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여인이 김경빈(경빈 김씨)이다.
헌종은 왕실의 반대에도 끝끝내 고집을 피워 '재수' 끝에 사랑을 성취했다. 이훤처럼 죽은 애인을 기다려주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헌종도 로맨틱 군주에 낄 수 있을 것이다. 정조 이후의 순조·헌종·철종 시대에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군주가 출현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로맨스 분야에서는 헌종이 강력한 군주의 면모를 과시했다.
조선왕조의 대표적 로맨스 중 하나인 헌종과 김경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창덕궁 낙선재가 바로 그곳이다. 낙선재는 헌종이 김경빈에게 선사한 건물이다.
헌종이 낙선재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가는, 이곳의 장식 무늬가 어느 것 하나도 똑같은 게 없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무늬 하나하나에 지극정성을 쏟아 부은 것이다. 임금의 열의가 없었다면, 후궁의 처소에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처럼 쉼 없이 이어지는 낙선재의 꽃담을 보노라면, 애인과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손 모아 기도한 헌종의 소망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의 사랑은 헌종의 요절로 605일 만에 끝났지만, 그래서 대망의 1000일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사랑이 남긴 흔적만큼은 낙선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 시내에 나갔다가 시간이 난다면 낙선재 마루에 걸터앉아, 저 태양을 바라보며 <해품달> 이훤처럼 사랑에 목숨을 건 헌종의 로맨스를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뒤, 창덕궁 정문에서 나와 서쪽의 경복궁과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대부분의 임금들이 중종처럼 사랑보다는 권력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애환을 헤아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