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수묵화라는 동양화 매체로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화백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한류문화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다. 수덕산 초입 마당의 큰 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그린 화백, '군상'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그다.
세계적인 화백에게도 아픔이 있기 마련. 1960년 군사정권 시절의 '동백림 사건'이 그것이고, 1970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사건'에 연루되어, 살아생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프랑스 파리에 묻힌 게 그것이다.
수류산방에서 펴낸<이응노의 집, 이야기>는 그의 생가 기념관 개관식 때 엮은 사진집 겸 책자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의 홍천마을에 있는 그의 기념관, 일명 '이응노의 집'이 그곳. 이 책은 그 집에 얽힌 회고록이자, 그의 집에 전시돼 있는 그림들에 대한 해설서다.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73쪽)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암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았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면서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나뭇조각이 눈에 띄면 그걸 깎아 조각을 했고, 데생도 연필이나 붓이 없으면 젓가락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런 유년시절의 익숙함이 옥중생활에도 자연스레 이어졌던 것이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 고암은 유럽을 무대로 3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화실을 개방하여 유럽인들에게 수묵화를 가르쳤고, 한국의 전통 예술 정신과 형식을 고수했습니다. 특히 한국인이 왜 불어를 배우냐며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같은 의식 아래, '율동과 기백의 한국 민족성'을 바탕으로 당대 서구의 회화 사조를 소화하고 자기 젓으로 만들어갔습니다."(95쪽)이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생가 기념관은 빛과 어둠이 조화를 이루고, 우주의 기운이 솟아나도록 설계돼 있다. 건축가 조성룡이 주안점을 둔 게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그는 생가 기념관 앞쪽으로 너른 마당과 연못의 연꽃이 드러나게 했고, 뒤쪽으로는 고암이 즐겨했던 대나무 숲을 자연스레 잇고 있다. 기념관내 네 개의 전시실에는 그의 작품 300여 점이 있다고 한다.
"'이응노의 집'에서 건축물이 작게는 앞의 마당, 연밭과 들판, 멀리는 더 큰 스케일의 자연,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은, 전통적인 건축 사상과 우주관을 잘 반영한 것이며 오브제 중심의 건축보다 경관적이고 다분히 생태를 고려하고 있는 건축이라고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161쪽)그 밖에도 이 책에는 고암의 작품뿐만 아니라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화구들와 유품들이 담겨 있고, 김학량·이태호·유홍준 등 '이응노의 집 개관준비위원'이 쓴 작가론과 건축론도 담겨 있다. 더욱이 1904년부터 1989년까지 그가 걸어온 궤적도 눈여겨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