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무를 먹는 것으로 유명한 흰개미의 소화관에는 원생동물의 편모충류가 서식하고 있다. 둘은 자연계의 대표적인 공생관계로 꼽힌다. 독자적으로는 나무를 소화시킬 능력이 없는 흰개미는 섬유질을 분해해주는 원생동물 덕분에 나무를 먹을 수 있고 원생동물은 흰개미의 소화관이라는 안전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다.

흔히 약육강식으로 설명되는 정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도 최근 공생의 바람이 불고 있다. 197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첫 선을 보인 '사회적기업'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적기업은 이윤의 추구를 지상과제로 삼는 일반 기업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목적을 지향하면서 경제적 수익창출과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기업을 말한다. 미국의 사회적기업 루비콘 프로그램의 릭 오브리 대표는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파는 기업이 사회적기업"이라고 정의했다.

고용난과 양극화를 향해 치닫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꼭 필요한 성격의 기업이지만 아직은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2012년 한국에는 어떤 사회적기업들이 유효할까? 한국에서 '살아남은' 사회적기업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세상고쳐쓰기>(부키 펴냄)는 이러한 물음에 가장 근접한 대답이다. 21명의 사회적기업가들이 사회와 자신이 이루는 공생의 구도, 사회적기업의 생존 노하우에 대해 설명했다.

빵 팔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파는 '사회적기업'

 <세상고쳐쓰기>
<세상고쳐쓰기> ⓒ 부키
자본주의의 원리에 대한 예리한 분석으로 유명한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는 생전에 자본주의의 자본가들에 대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무정한 '현금지불' 외에 다른 어떤 끈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간추리자면 자본주의의 자본가들은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돈 되는 일만 한다'는 얘기다.

<세상고쳐쓰기>는 자본주의와 일반 기업에 따라붙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사회적기업의 정체성과 대비시키는 구도를 통해 사회적기업의 특징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책의 목차 역시 '기업이 사람을 생각하다', '기업이 지구를 생각하다', '기업이 미래를 생각하다'의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이윤 이외에 다른 것을 가장 우선시하는 기업이 사회적기업이라는 얘기다.

<세상고쳐쓰기>에는 다양한 사회적기업의 사례가 등장한다.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보조기기 제조기업도 있고 외국인 노동자를 무료 진료하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친환경 로컬푸드 햄버거 업체, 친환경 세차업체, 음악과 합주를 통해 은둔형 외톨이들의 사회 적응을 돕는 회사 등이다. 하나같이 돈은 안 되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기업들이다.

장애인 및 노인용 피난보조기기 KE-체어를 개발해 보급한 (주)이지무브가 대표적인 예다. 이지무브는 '과학기술을 누릴 권리'를 모두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설립된 사회적기업이다. 장애인, 노인 등 취약자들이 혼자서도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기구를 개발해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하는데, 장애아동용 유모차는 독일산의 반값 수준이고 전동기립 휠체어는 선진국 제품 가격의 3분의 1 수준으로 판매하고 있다.

사회적기업 안착 위해서는 정부와 지역민들의 관심 필요해

<세상고쳐쓰기>의 장점은 두 가지다. 우선 생소한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과 그 영향력에 대해 직관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풍부한 실제 사례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고 두 번째로는 한국 사회가 이러한 사회적기업을 유지하고 늘려가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현재, 한국에서는 인증기업 630개, 예비사회적기업 1200개 등 모두 1800여 개의 사회적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이나 환경보호, 정부의 역할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부족한 사회서비스들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기업들은 공익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런 이유로 정부에서도 지난 2007년부터 관련법을 만들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정부의 사회적기업 육성 정책 골자는 초기 3년간 인건비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3년이 지난 후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문을 닫는 사회적기업들이 늘면서 이런 방식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세상고쳐쓰기>에 등장하는 사회적기업 21개 역시 기업의 가치를 인정받은 인증기업들이고 상대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생존의 압박에서 자유롭지는 않다는 점에서 정책 마련의 시급성이 드러난다.

 지난 4월 17일 오후,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세상고쳐쓰기> 출간 기념회에 참석한 사회적기업가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17일 오후,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세상고쳐쓰기> 출간 기념회에 참석한 사회적기업가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박수미

택배사업을 통해 노숙자들의 자활을 돕는 (주)빛나리퀵택배의 이기표 이사는 책 속에서 사회적기업 인증 후 택배에 쓸 오토바이 다섯 대를 지원받았지만 모두 중고라 네 대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금방 다른 오토바이를 구입해야 했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그는 "정부의 역할은 초기의 직접지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회적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부와 지원을 권장하고 알선하는 역할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의 지원만으로 사회적기업들이 지역에 안착할 수 있을까? 지역인들의 자활을 돕는 경기구리지역자활센터의 이정희 센터장은 "중앙의 정책만으로 지역이 자생할 수는 없고 지역에서 스스로 구체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며 "생산과 소비가 지역 안에서 순환되고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구조가 되어야 지역경제의 자생력이 높아지고 사회에 공동체성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21개의 이야기는 사라진 지역 공동체나 극심한 양극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 모종의 직관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에 실망하고 대안을 찾았던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생존하고 있는 <세상고쳐쓰기> 속 사회적기업들의 이야기가 반갑게 다가올 것이다.


세상 고쳐 쓰기 - 살맛 나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적기업가 21인의

이회수 엮음, 김종락.이경숙.이재영 지음, 부키(2012)


#세상고쳐쓰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