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온양 사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죠.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대단하신 분이쥬. 병원서도 아주 유명하다니까유."
아담한 키에 따뜻한 미소를 가진 정월자(52)씨. 늦추위로 쌀쌀했던 지난 2월 17일 남편을 입원시킨 그녀는 깊어가는 봄날을 또 다시 병원에서 맞고 있다.
보호자가 없는 환자나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을 수시로 찾아다니면서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그녀는 웬만한 전문가보다 능숙한데다 마음까지 편하게 보듬어주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선행을 칭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여러 입원환자들이 연신 '기사 좀 잘 써달라'며 음료수며 과일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사연을 아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정씨 본인은 늘 스스로의 아픔을 삭이며 묵묵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1993년에 쓰러진 남편을 20여 년간 간호하며 3남매를 키워왔다는 그녀. 월자씨가 그동안 겪어왔던 절망과 가슴앓이, 슬픔과 바람을 들을 인연이 기자에게 찾아왔다.
1993년 쓰러진 남편, 지금까지 간병 중5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한 월자씨. 학원차를 운전하고 택시기사, 식당기사 등 운전 일을 하던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연년생으로 3남매가 생겼다. 하지만 1993년 여름, 당시 4살, 5살, 6살 아이를 키워오던 정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기고 만다.
"1993년 8월 2일 오전이었죠. 태안 남면 연육교 아래서 낚시하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너무나 당황한데다 몇몇 사람들의 여러 가지 불운과 실수가 겹치면서 4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CT촬영을 할 수 있었어요. 서산에서 수술을 받고 21일간 입원해 있는 동안 남편은 식물인간이나 다름이 없었어요."정씨는 그때의 기억을 차분히 되새긴다. 이후 남편은 대전 을지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정씨는 여기서 앞으로 그녀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존경할 만한 어른 한 분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남편이 입원했던 병실은 식물인간들만 있던 병실이었어요. 모두가 힘든 곳이죠. 하지만 거기서 5년 동안이나 며느리를 간병하고 있던 한 시어머니를 만났어요. 새벽에 일어나 따뜻한 물을 받고, 식지않게 모아놨다가 정성껏 며느리의 몸을 닦아주고, 만져주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며느리에게 자분자분 이야기 하는 그분을 보면서 너무나 많은 감동을 받았고 그분이 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결과 남편이 3개월 만에 눈을 떴답니다."이후 그녀의 헌신속에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에게는 조금씩 차도가 느껴졌다. 6개월이 지나자 '아파', '아니', '아멘' 같은 단어를 말하기 시작했고 숫자를 말해주면 그 숫자만큼 눈을 깜빡일 수도 있게 됐다.
이후 폐가 아프기도 하고 수술도 여러 번 하는 등 곡절도 많았지만 그곳에서 2년여의 병원생활은 그녀의 삶의 지향을 설정해 주게 됐다.
좋은 인연 좋은 이웃, 스스로 만들어온 월자씨하지만 남편이 나아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예기치 않은 불운이 조금씩 더해지기도 했다. 첫애가 학교에 입학하고 둘은 유치원에 다닐 무렵, 남편에게는 당뇨가 찾아왔다. 한때는 40㎏에 불과했던 몸무게가 100㎏가 넘기도 했었다.
1990년대 중반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되고 처음 지원받았던 돈은 10만 원 정도에 쌀 약간이 전부였다. 관리비 4만8000원에 전기·수도·가스세를 내고 나면 지금도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가 잘 안 될 정도다.
절박했던 그녀는 집(구온양 주공아파트)에서 15분 떨어진 국유지 공터를 개간해 밭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가시나무와 자갈들로 버려진 땅을 고르고 정비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남편을 잠시 맡기고 새벽 2시까지 밭일을 하곤 했다는 그녀.
"도라지, 참깨, 고추, 파 등 안 심어 본 게 없었어요. 반찬값이라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것들을 거두면 이웃들과 함께 나누곤 했죠. 이웃들도 계란 한 판을 사면 저희 집에 반 판을 두고 가고, 피자 한 판을 사서 반 판을 두고 가며 아이들과 함께 먹으라고 하는 등 좋으신 분들이 너무 많았어요."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주변까지 변화시키던 그녀에게 지난 2011년은 20년의 간병 중 가장 큰 위기였다. 작년 2월 심해진 당뇨로 남편을 보낼 뻔한데다, 문제가 생겨 수급비가 대폭 줄어들면서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낸 탓이다.
"그동안 아이들 키우면서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어요. 그래도 엄마 아빠 도와주면서 본인들도 건강을 상했을 정도로 착한 아이들이에요. 늘 고맙고 미안해요" 본인의 말 못할 고생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던 그녀는 자녀들을 언급하면서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다.
"얘들아 우리 서로 사랑하고 위로는 섬기고 아래로는 배려하면서 건강하게 열심히 살자. 그리고 우리 막내 성아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너 자신을 사랑해라. 세월은 참 빠르고 시간은 많지 않아. 우리 가족 빨리 다 건강하게 한데 모여 따뜻한 밥 한번 먹자꾸나."늘 눈에 밟히는 막내딸을 걱정하며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월자씨. 만개한 봄을 마음 편히 느끼고 즐기게 될 때는 언제 쯤일까?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충남시사신문 714호에도 송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