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의 저자 이지누는 '홀로 앉아 마시는 차가 풍기는 향은 차향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사람의 향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의 저자 이지누는 '홀로 앉아 마시는 차가 풍기는 향은 차향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사람의 향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어렸을 때 하던 소꿉놀이 중 '숨긴 글씨 찾기'라는 게 있었습니다. 놀이기구가 별로 없던 산촌이어서 그런지 땅 자체가 놀이판이 되었던 시대입니다. 숨긴 글씨 찾기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땅바닥에 글씨나 문양을 파 숨깁니다. 어떤 글씨나 문양을 새끼손가락 한마디 깊이로 땅을 파 숨겨 놓으면 술래가 그 글씨나 문양을 찾아내는 놀이입니다.

흙이 촘촘하게 다져진 흙마당은 뾰족한 나뭇가지나 몽당연필 같은 돌멩이를 움켜쥐고 후벼 파도 꽤나 힘이 듭니다. 하지만 모래가 많던 학교 운동장은 손가락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후벼 판 문양이나 글씨에 파냈던 흙을 다시 채우고 뒤꿈치로 콕콕 다져가며 감쪽같이 메워줍니다. 그러고 나서 술래를 부릅니다. 그러면 술래는 땅바닥의 흙들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고,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바짝 엎드려서 땅을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바닥에서 글씨나 문양을 찾아냅니다.

희한하게 아무리 꽁꽁 다져줘도 한 번 파냈던 곳은 파내지 않은 곳과 달랐습니다. 눈으로 볼 때는 비슷비슷해 구분이 되지 않지만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다짐 정도가 다릅니다. 솔가지로 땅바닥을 쓱쓱 쓸어내며 입으로 후후 불어내면 파냈던 곳이 먼저 패여 나가며 문양이나 글씨가 드러났습니다. 한 번 파낸 흔적은 어떻게라도 남았습니다.

폐사지에 발자국처럼 남아있는 흔적을 찾아 나선 '이지누'

폐사지를 찾아다닌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의 저자 이지누의 발걸음이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바짝 엎드려 숨긴 글씨를 찾아내던 술래의 마음, 천진무구하기만 했던 아동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표지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표지
ⓒ (주)알마

관련사진보기

대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소리,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고, 귀를 기울이고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하지만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의 저자 이지누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그것들, 사라진 절과 그 절에서 들을 수 있었던 소리, 그 절에 이끼처럼 끼어있는 느낌까지를 찾아서 엮었습니다. 코가 땅에 닿을 만큼 바짝 엎드려 숨긴 글씨를 찾아내던 술래처럼 말입니다.  

이지누 지음, (주)알마 출판의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는 저자 이지누가 전남지역에 산재해 있는 폐사지 아홉 곳을 답사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육감으로 느낀 소감까지를 갈무리한 답사기입니다.

구경꾼처럼 휙 둘러본 포장음식 같은 답사기가 아니라 때로는 머물고 때로는 찾아가기를 반복하며 찾아낸 모든 것을 넣고 깊이 우려낸 답사기, 여정의 글에 역사가 더해지고, 더해진 역사에 서정적 감미로움마저 곁들인 숭늉 같은 답사기입니다.

발자국 같은 흔적에 빗물처럼 고인 사연들

때로는 운수납자처럼 때로는 방랑자처럼 때로는 풍류객처럼 저자가 찾아 나선 폐사지는 진도 금골산 토굴터, 장흥 탑산사터, 벌교 장광사터, 화순 운주사터, 영암 용암사터, 영암 쌍계사터, 강진 월남사서터, 곡성 당동리 절터, 무안 총지사터 이렇게 아홉 곳입니다.

주섬주섬 다구를 꺼냈다. 월남사터를 찾으면서 어찌 차를 두고 올 수 있으며 시 몇 수 들고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햇것이 아니면 어떠랴. 탑 안에 향을 사르고 차 한 잔을 올렸다. 차가 식으면 음복이라도 하듯 내가 마시고 다시 우려낸 차를 거듭 올리기를 되풀이 했다. 다관이 비면 우리기를 서너 번, 그때마다 완당 김정희의 글 한 줄을 되뇌었다.

         조용히 앉은 자리 차는 반쯤 비웠는데 향기는 처음 그대로 靜坐虛茶半香初
         마음이 미묘하게 움직일 때 물은 흐르고 꽃은 피어나        妙用時水流花開

그랬다. 드문드문 동박새의 지저귐이 고즈넉함을 일깨우는 새벽의 절터는 그 자체로 이미 시時다. 산다화 붉은 빛 가득 드리운 탑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나마 말하지 않음은 차를 마실 때 굳이 해야 할 일이다. 홀로 앉아 마시는 차가 풍기는 향은 차향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사람의 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명선茗禪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선과 차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홀로 차를 마신다는 것은 입선入禪과도 같다. - 본문 274쪽

 폐사지에 발자국 처럼 남은 흔적에 빗물처럼 고인 사연들을 엮은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폐사지에 발자국 처럼 남은 흔적에 빗물처럼 고인 사연들을 엮은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임윤수

관련사진보기


흔적만 남아있는 폐사지에서의 저자가 찾은 느낌은 감미롭고, 폐사지를 찾아가는 발걸음과 머무는 시간들은 참으로 여유롭습니다. 저자가 이지누가 느낀 서정적 감미로움, 곳곳에서 즐긴 여유가 책을 읽는 동안 가랑비처럼 스며드니 어느새 폐사지를 서성이는 나그네의 마음입니다. 모자라는 상상력은 넉넉하게 들어가 있는 사진들이 보충해 주니 저자의 글에 기대어 폐사지 아홉 곳을 순례하고 있는 나그네 역시 감미롭고 여유롭습니다.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날, 발자국이 쿡쿡 찍히는 흙길을 걷다보면 쿡쿡 찍힌 발자국에 빗물이 그득하게 고입니다. 내가 걸어 온 흔적이 쿡쿡 찍힌 발자국과 그득하게 고인 빗물이라면 전남 지역에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폐사지 아홉 곳을 담고 있는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는 저자 이지누의 발자국이며 폐사지가 안고 있는 빗물 같은 사연입니다.

저자 이지누의 발자국이기도 한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에 기대어 하는 폐사지 순례는 구도자가 둘러멘 바랑과 같은 마음입니다. 폐사지로 가는 풍경은 감미롭고, 역사와 함께 버무린 이야기들은 깊이 우려낸 숭늉처럼 구수합니다. 발자국에 고인 빗물들이 하늘로 증발되고 땅으로 스며들듯이 폐사지에 유무형의 흔적으로 남은 사연들은 마음으로 스며들며 가슴을 적셔 줍니다.

덧붙이는 글 |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지은이 이지누┃펴낸곳 (주)알마┃2012. 4. 9┃값 22,000원┃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 전남 편

이지누 지음, 알마(2012)


태그:#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이지누, #(주)알마, #폐사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