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구릉족 기자협회에서 주최한 구릉족 기자대회에 참석했다. 구릉족 기자협회는 3년 전 창립되어 이번 대회가 2회째다. 네팔에 구릉족은 약 40만 명 정도 된다.
네팔 전체 인구 2800만 가운데 약 37%를 차지하는 네팔 몽골리안들이 13년 전 네팔 몽골리안 기자협회를 만들었다. 네팔 몽골리안 기자협회의 회원은 5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지방의 기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더 많을 것이다. 그중 구릉족들은 40만 인구에 100여 명의 기자가 있고, 라이족은 그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고 전한다.
몽골리안 모두 60개 종족이 넘는데, 아직 내가 만나본 종족은 그 수가 그리 많치 않다. 설령 만났다해도 일반인들이 특별한 지식이 없으면 어떤 종족에 속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네와리, 셀파, 라이, 림부, 머거르, 타다, 구릉, 타망 등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가끔씩이지만 그런 종족들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네팔 몽골리안들이 정치적 결사의 움직임이나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일이 흔하다. 나는 네팔을 바라보며 그 어떤 특정 집단이나 카스트 혹은 종족 간의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발전을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세상에 눈을 뜨는 행위는 결국 정치적 결사를 하는 일과 연결된다. 또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욕을 갖기 마련이다.
네팔은 힌두교와 불교적 전통이 강해서 그런 종족간의 이질감을 잘 조화시켜 온 것 같다.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크리스찬이나 이슬람 등의 다른 종교집단의 반목이나 세확장의 조짐들은 잠재적 불안이 될 요인으로 보인다. 정치적으로 이해 타산을 갖는 지도자들에 의해 균형을 잃어가는 종족 간의 조화가 눈에 띤다. 특히 그 핵심 세력으로 몽골리안들이 정치적으로 큰 눈을 뜬 느낌이다. 이미 몇 차례 몽골리안들이 조직적으로 정치적 요구를 한 사례를 기사화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움직임들이 다양한 직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중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언론인들의 움직임은 눈에 띤다. 내가 찾은 구릉족의 기자협회 모임 또한 종족에 대한 영향력 혹은 제반 문제 등에 대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곳에서 한 기자 지망생을 만났다. 그가 사라구릉(17·룸비니 아카데미 언론학부)이다. 소수 종족의 어린 여학생이 기자를 지망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작은 아버지가 기자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리포터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며 "특정한 종족 간의 이익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나라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시점을 가지고 왕과 총리를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들에 대한 존경심도 가졌다"고 말했다.
이제 청소년인 그는 "특별히 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지난 몇 년간 과도적인 네팔의 정치 상황이 어린 소녀였던 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준 것으로 보였다.
새삼 그녀가 주목받게 된 이유는 그녀의 꿈이 기자라는 것이다. 구릉족 선배 기자들은 보통 네팔 청년들의 꿈과 그녀의 꿈이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네팔의 많은 청년들은 대개 먹고 사는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이유에서다.
더구나 소수종족의 기자 지망생은 거의 없고, 그들이 기자로 성공할 가능성도 희박하다고 한다.
사실,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이나 종족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큰 포부보다는 친목회 성격이 더 강한 것이 구릉족 기자협회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미래의 조화로운 네팔에서 좋은 기자로서 성장하기 위해 네팔인들이 보다 질서있고, 조화로운 네팔을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한 과제인 듯하다. 절박함이 있는 곳에 희망의 크기도 크다는 생각이다.
갈등과 반목이 멈추지 않은 사회, 절차와 질서를 아직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 그래서 무질서한 나라로 보이지만 깊이 보면 가능성으로 넘치는 나라, 이제 네팔인들이 히말라야처럼 큰 영혼의 성채를 움직여 사라 구릉의 꿈도 아름답게 전개되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